김광례 조형전 ‘흰 칼끝, 검은 흙’ 페이지 정보 작성자 양진호 작성일25-10-27 17:28 조회164회 댓글0건 관련링크 이전글 다음글 목록 본문 김광례 <새들과 종(태고의 시간), 2025, 스테인레스 스틸, 검은흙 세라믹, 조명 김광례 조형전 ‘흰 칼끝, 검은 흙’ 2025.10.17-11.30, 오월미술관 미루어진 완료의 시제, 애도 어떤 사람은 애도의 경제성을 처방한다. 고통스러운 현실을 직시하고 상실 이전의 상태로,일상으로 복귀하기 위해서는 상실한 대상에게 투자했던 리비도를 천천히 거두어 새로운 대상에게 거리낌 없이 재투자할 수 있는 경영 전략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애도의 불평등을 지적한다. 인간은 누구나 전쟁이나 학살, 사회적 참사의 희생자가 될 수 있는 취약한 존재이기 때문에, 모든 이의 죽음은 공적 애도의 대상이 될 수 있으며, 따라서 애도는 공공성의 장으로 소환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애도를 경제적 관점과 정치적 요청으로 이야기하는 것으로 충분한가? 정말 애도는 리비도의 문제이며 새로운 목표물을 찾기만 하면 성공에 이르는 목적 지향성 행위인가? 애도 받아 마땅한 모든 사람들이 전지구적 애도-연대를 구축하고 나면 나의 애도는 완성되는가? 애도할 때 우리는, 치료받아야 할 환자 또는 공적 행위를 하는 시민 사이에서 양자택일을 강요받아야만 하는가? 독방에서 사형 집행을 기다리고 있는 어느 청년의 사진을 두고 롤랑 바르트는 기이한 시간감을 이야기한다. “그는 죽었고, 그는 죽게 될 것이다.”(????밝은 방????, 39절) 그가 사진을 손에 쥐고 있는 현재에서 볼 때 청년은 이미 죽은 상태이지만, 사진 속의 현재에서 볼 때 청년은 아직 살아있고 곧 죽게 된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뒤엉킨 “중복과 착종의 시간”이 사진으로부터 분출하여 그의 의식을 뒤흔든다. 그는 최근에도 비슷한 체험을 했다. 얼마전 돌아가신 어머니의 어린 시절 사진을 들여다보다 저 돌출하는 시간과 맞닥뜨리고 말았던 것이다. 개인적 상실의 경험을 상기시키는 이 (선적이 아닌) 점적인 시간의 출현을 롤랑 바르트는 푼크툼(punctum)이라고 불렀다. “푼크툼은 찔린 자국이고 작은 구멍이며 조그만 얼룩이고 작게 베인 상처”이다. “사진의 푼크툼은 사진 안에서 나를 찌르는 (뿐만 아니라 나에게 상처를 주고 완력을 쓰는) 그 우연이다.”(10절) 하지만 우리는 이 고통의 암점(暗點)을 회피하지 않는다. 오히려 기꺼이 찾아 나서며 그 주변을 반복적으로 맴돈다. 푼크툼은 그것을 발견하게 될 사람이 미리 정해놓을 수도 없고 누군가 만들어놨다 하더라도 그 자신에게는 소용이 없을 수 있다. 다만 찾을 때까지 계속 찾을 뿐이다. “나는 괴로움을 겪고 싶었을 뿐 아니라 내 고통의 독특함을 존중하고 싶었다. 왜냐하면 이 독특함은 어머니에게 있었던 절대적으로 환원 불가능한, 단번에 영원히 상실한 그 무엇의 반영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상실한 것은… 하나의 존재가 아니라 하나의 특성…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것이었다.”(31절) 시간이 가면 상실의 슬픔은 사라진다고 흔히들 말한다. 물론 그러하다. 슬픔은 잦아들고 사라진다. 하지만 슬픔이 사라지기만 하면 애도는 끝나는가? 대체 불가능한 것을 잃었다는 것, 그 부재의 사실은 바뀌지 않는 현실이다. 푼크툼은 날카롭게 베어 내어진 부재의 현존이며 그 암점에서 피어나는 고약한 냄새이다. “사진의 푼크툼”이 있듯이 다른 것의 푼크툼도 있다. 그것은 온갖 예술작품들 속에 있을 수 있으며 흔한 생필품 속에서 발견될 수도 있다. 우리는 그 불편한 시간을 기꺼이 찾아낼 때까지 애도의 행위를 이어간다. 통점을 찾았다고 해서 애도가 끝나는 것은 아니다. 대체 불가능한 대상의 부재가 거기에 영원히 현존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 암점에 손가락을 넣고서는 부재를 어루만지며 되뇌인다. 애도는 부재를 그린다. 하지만 그 그림을 완성시키지는 않는다. 완성되고 나면, 완성되어 버리면, 그림 속의 현재가 현재 속의 과거로, ‘있다’에서 ‘있었다’로 질적 전환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애도는 ‘있었다’의 깨침을 목표로 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있었다’에서 일탈하여 ‘있다’에 머무르려는 반목적적 행위이자 그 완성의 순간을 계속 미루어놓는 미완료의 시제이다. 애도는 처음부터 모순된 시도이다. 시작할 수밖에 없지만 시작과 동시에 그 완성을 계속 미룰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애도는 그저 슬픔에 빠져있는 한때가 아니라 완료(perfectum)를 지연시키는 적극적 행위이다. 김광례 작가의 조형 작업(작품과 제작 방식)은 통과 의례나 이벤트가 아닌 ‘삶으로서의 애도’를 제안하고 직접 그렇게 살았던 롤랑 바르트의 태도를 떠올리게 한다. 전시작들 가운데 연작들은 특히 그러하다. 「밀봉된 슬픔은 유통기한이 길다 (퇴적층의 시간) No. 1~5」(2025)는 한 인간이 어떤 상실에 대한 애도를 얼마나 깊게, 얼마나 오래 지속할 수 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 상실과 애도의 기록은 슬픔의 퇴적층이며 그 단면에서 슬픔의 화석들은 제 얼굴을 드러낸 채 각자의 사연을 이야기한다. 여기서 작가의 애도는 시간성에 갇혀 있는 한 개체로서의 인간을 뛰어넘어 인류 애도의 역사로, 나아가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는 존재 일반의 심층으로 확장된다. 「타버린 대지 위에 새겨진 기억 No 1~12」(2025) 또한 이러한 애도의 지속을 증거한다. 밝은 면과 어두운 면이 서로 일렁이는 가운데, 그 위로 쏟아진 잿더미들은 끊어질 듯 이어질 듯 선을 이룬다. 이 선들은 ‘푼크툼’을 발견하고 그에 머물고자 했던 작가의 상흔이다. 하나의 덩어리는 하나의 통점이자 부재의 암점이기 때문에, 작가는 그 조형을 완성하지 않고 계속 미루어 둔다. 암점과 암점으로 이어지는 시간의 선상에서 애도는 차이와 반복을 거듭한다. 「촛불 (비로소 나를 태워야 알 수 있는) No. 1~9」(2025)의 작업 방식은 작가가 어떻게 애도를 이어왔는지를 명확히 드러낸다. 백토 위에 유약을 층층이 바르고 마르기 전에 반복적으로 걷어 올리다가 작가는 예기치 못한 촛불의 형상을 얻었다고 고백한 적이 있다. 이 촛불은 작가에게 돌출의 시간을 마주하게 했으며 곧장 푼크툼으로 작동되었다. 하지만 이 놀라운 순간에 멈추지 않고 작가는 새로운 작업을 이어간다. 촛불은 다시 제 모습을 드러내고 계속 재생 및 확산되며 그렇게 축적되면서 빛을 더해간다. 김광례 조형전 《흰 칼끝, 검은 흙》은 어떤 측면에서 보자면 반복된 실패의 기록이다. 재료와 제작 기법 상의 다양한 실험들이 때로는 극단적으로 수행되었고 이 과정에서 상당량의 작업들이 파과(破果)로 떨어졌다는 후문이다. 하지만 우리가 살펴본 바로는 애도란 본디 그렇게 지속되지 않던가. 연작들을 포함한 모든 전시작과 출품되지 않은 실패작까지, 이번 전시와 비-전시는 ‘삶으로서의 애도’를 지속해온 작가 자신의 역사이다. 작가는 이 미루어진 완료의 시제를 통해 ‘있다’와 ‘있었다’ 사이를, 존재와 무 사이를, 삶과 죽음 사이를 이어간다. 그렇게 생성과 소멸 사이에서 저 자신을 윤리적 주체로 붙들고 있다. “이제 나는 여행을 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늘 여기에 머물 것이다. 이 꽃들이 시들고 마는 일이 결코 일어나지 않도록.”(롤랑 바르트, ????애도 일기???? 1978. 8. 18.) - 양진호 (철학자, 조선대학교 현대 조형미디어전공 외래교수) 김광례 <새들과 종(태고의 시간) 중 부분, 2025, 스테인레스 스틸, 검은흙 세라믹, 조명 김광례 <까마귀(소멸과 생성의 시간), 2025, 고무, 흰흙에 프린트기법, 30x38cm 김광례 <삶은 바람처럼 스치고 죽음은 안식처럼 머문다>, 2025, 검은 흙 부조, 54x43cm 김광례 <늙은 노부의 몸>, 2025, 투명한 고무와 흰흙 부조, 40x55cm 김광례 <그후로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2025, 검은 흙, 47x37cm / <다섯 표정의 군상> 연작 중, 2025, 검은흙 부조, 54x47cm 김광례 <파괴와 잔존>, 2025, 검은 흙에 유약, 25x32cm 김광례 <붉은 산 1~11> 연작 중, 2025, 흰흙에 붉은 유약, 24x25cm 김광례 <촛불 (비로소 태워야 알 수 있는), No.1~9>, 2025, 수지, 흰흙에 유약, 각 18x18cm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이전글 다음글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