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상하의 이미지라는 무대 페이지 정보 작성자 콘노 유키 작성일24-12-10 10:55 조회163회 댓글0건 관련링크 이전글 다음글 목록 본문 윤상하 <I fail to fly again today but it’s okay>, 2024, 캔버스에 유채, 180x180cm 윤상하의 이미지라는 무대 2024.11.28-12.18 / 예술공간 집 (앞글 생략) 윤상하의 회화 작업에서 나타나는 세계는 타율을 방어하는 몸부림에서 나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그의 작품은 타율과 자율 사이에서 흔들리는 모습, 개인과 고독이 단독적이고 폐쇄적이기만 하지 않는 딜레마로 흔들리는 지점을 보여준다. 윤상하의 회화 작업에서 드로잉이 보여주는 자유로운 선, 흐름, 거침없는 표현이 특징적이다. 작가가 말하기에 “현실에 오염된 의식의 세계는 우스꽝스러움과 기괴함, 예측불가능과 허상으로 가득 채워져 있다.” 그의 말처럼 윤상하가 그리는 무대는 현실과 허상이 만나고 뒤섞이는 곳으로 그려진다. 이러한 무대는 작품에 설정한 침대와 거실(<그림공장 402호>, 2022), 고치(<요정의 고치>, 2023), 지하와 공장(<오작동지하공장>, 2021)처럼 폐쇄된 공간에서 출발한다. 이 안에서 그려지는 몽환적인 장면은, 적어도 인간이 규격화된 공간에서 보내는 삶을 벗어나는 동시에 사적 공간으로 침투하는 현실을 바탕으로 한다. 그의 회화는 평상시에 내 의식을 침범하는 현실을 그리면서, 그 현실에서 잠시 유리되는 곳을 상상적으로 그려 넣는다. 윤상하의 작품을 보면 ‘현대인의 고독’이라는 표현과 잘 어울리는데, 이는 현대 사회에 사는 ‘개인’과 ‘고독’이 겪는 딜레마 또한 보여준다는 점에서 그렇다. ‘고독’은 ‘개인’이기에 느끼는 것일까, 아니면 ‘개인’이 아니기에 느끼는 것일까? 질문을 더 밀고 나아가 보자. ‘개인’은 어떤 의미에서 ‘개인’으로 머무를 수 있을까—바꿔 말해, 개인 또한 폐쇄된 공간일까? 에리히 프롬(Erich Fromm)이 『자유로부터의 도피』에서 묻는 바가 바로 그것이다. 윤상하의 회화 공간은 내가 있는 공간이 사회와 긴밀한 연결고리를 가진 채 튀어나온, 현실과 허상이 뒤섞이고 스며든 이미지로 출현한다. 그에게 회화는 현실로부터의 도피도 허상으로부터의 도피도 아닌, 두 세계가 붙어 있는 상태이다. 이 상태에서 우리는 억압과 방어가 동질화하는 것 또한 보게 된다. 현실이 나를 억압할 때 나는 방어한다. 그러나 내가 방어할 때, 공장의 생산라인처럼 개인이길 멈추기도 한다. 고독의 극복이 나에게서 멀어지는, 즉 자기자신의 상실을 통해서 달성된다는 딜레마를 겪는다. 그의 작품 공간을 결코 폐쇄적으로만 볼 수 없다. 회화의 선이 개인적이고 감정적인 것에만 머물지 않는다. 윤상하의 회화는 개인적이고 감정적인 것이 현실과 상호 침투될 뿐만 아니라, 억압에서 출발한 방어와 방어에서 출발한 억압의 양자를 공존시킨다. 이번 개인전에서 윤상하는 이전 작업의 연장선에서 소재를 다룬다. 꿈이라는 공간 역시 현실과 허상이 뒤섞인다. 《good night snooze》(2024)는 선잠을 주인공 삼아 동화적인 서사가 회화 작업으로 펼쳐지는데, 여기에는 이전 작업과의 차이를 보여준다. (이전 작업에서) 그가 설정한 공간이 분리에 기반하면서도 현실 또는 개인과의 접촉을 통해서 허물어진다면, 꿈은—특히 선잠은 그 자체가 허물어지는 것부터 출발한다. <your stage is over>(2024)에 나타나듯이 윤상하가 주목하는 곳이 ‘무대(stage)’인 이유, 그곳이 곧 ‘무대’라는 말로 설명되는 이유가 있다면 꿈의 공간—작가가 말하는 선잠의 공간이 깨어 있는 상태로 돌아오는 과정, 즉 ‘단계(stage)’를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꿈 또한 최면처럼 현실과 가상이 공존하며 억압과 방어가 전환되는 곳이다. 그렇지만, 꿈의 출발은 공간적 폐쇄성과 달리 현실과 가상이 불가분의 장소로, 이미 벌어진 상태로부터 시작한다. 이전 작업이 폐쇄된 공간에서 픽션이 펼쳐지는 과정을 담았다면, 이번 전시의 출품작은 꿈이 끝으로 향하는 과정을 담는다. 이전의 드로잉 기반의 애니메이션에서 현실과 허상이 뒤섞인 장면은 멈춰 있지 않은, 즉 멈추면 하나의 평면 드로잉으로 돌아와 버리는 운동성 안에서 추동되고 구동되었다. 이와 달리, <your stage is over>(2024)나 <my hero is dead>(2024), <I win everything here>(2024)에서 화면은 멈춰 있고 제목의 어감은 회화 공간이 종결된, 즉 장면이 끝으로 다 와버린 인상을 부여한다. 그런데 그렇게 끝나기만 할까? 무대가 끝나는 무대가 끝나지 않도록 꿈 내외로, 바꿔 말해 꿈/회화라는 이미지의 공간 내외에 시선을 유도하는 방법이 있다. 두 점의 <where is my old castle?>(2024)에서 주인공은 옛성을 찾는다. 화면 안에도, 밖에도 우리는 옛성을 찾아볼 수 없다. 선잠의 무대, 더 근본적으로 회화라는 현실과 허상이 뒤섞인 매체에서도 우리는 옛성을 찾을 수 없다. 회화 내외로 우리가 시선을 돌릴 때, 꿈의 종착하는 단계에서 또 다른 시작이 있음을 이 작품은 보이지 않는 곳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where is my old castle?>에는 옛성을 화면 안에서도 밖에서도 찾기 어렵다—그 어디에도 없음에 역설적으로 세워지게 된다. 이때 옛성은 이미지적으로, 어딘가에 있으리라는 믿음의/이라는 영역으로 세워진다. 보이지 않지만 시간적으로는 과거로 내려가고, 공간적으로는 위로 솟아오르는 옛성의 이미지는 무대에 연장성을 가져다준다. 어쩌면 이 꼼짝도 못 하는 종착이라는 상태야말로, 가스통 바슐라르(Gaston Bachelard)가 『꿈꿀 권리』에서 말라르메(Stéphane Mallarmé)의 시에서 읽어낸 권태 속 상승과 하강 운동의 힘일지도 모른다. 권태가 그렇듯이 무엇이 더 일어나지 않는, 기대치가 바닥난 상태—그럼에도 그곳에 옛성을 찾을 때, 우리는 과거라는 시간으로 내려가고 더 높이 고양된 이상(ideal)의 또 다른 단계에 다다를 수 있다. 윤상하의 회화에서 선잠이라는 끝을 전제로 하는 소재가 또 다른 단계=무대의 시작을 고한다면, 그것은 궁극적으로 현실과 허상 못지않게 뒤섞인, 과거와 이상의 간절함에서 출발한다. 같은 제목의 다른 작품을 보면, <your stage is over>에는 무대 공간이 보인다. 이전 작업에 등장하던 폐쇄적인 공간이 다시 나타난다. 꿈이 올려진 무대인 회화가 꿈이라는 무대를 올리게 될 때, 어떤 일이 벌어질까? 여러 얼굴에 둘러싸인 무대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 비어 있는 무대에 없는 이는 꿈에서 깨어나 현실로 돌아가버렸을까? 혹은 꿈의 등장인물로 남아 무대 주변을 떠돌고 있는 것일까. 현실과 허상이 전환하듯이 무대의 뒷막과 관중석 사이에서 연기와 목도를 작품 안에 반복한다. 무대의 비어 있음은 연기하는/강요받는 주인공 되기와, 이를 지켜보는/지켜볼 수밖에 없는 관객 되기를 반복한다. 무대가 끝난 무대는 이렇게 무대의 서막을 올린다. 무대가 끝나는 무대—그곳이 끝나지 않을 때, 우리는 안녕을 선잠에게 고하는 전시 제목에서 작품을 현실과 허상이 뒤섞인 이미지로 받아들이게 된다. 이 그림은 마치 찾던 이를 마치 찾은 듯, 누워 있는 곧 잠드는 이를 잠에서 깨우는 장면처럼 보이는 동시에 작별이라는 잠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장면으로도 보이기 시작한다. 이 이중적인 이미지에서 현실과 허상이 뒤섞인 무대는 막을 내린 것이 아니라 이제 비로소 막을 올린다. - 콘노 유키 (미술비평) 윤상하 <otaku>, 2024, 종이에 연필, 45.5x39.2cm 윤상하 <Your stage is over>, 2024, 종이에 연필,_54x38cm 윤상하 <It’s over there>, 2024,_종이에 연필, 54x39cm 윤상하 <Your stage is over>, 2024, 캔버스에 유채, 아크릴, 122x122cm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이전글 다음글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