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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유와 해방을 향한 시각 협주곡- 정산 백현호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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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광주미연 작성일08-05-18 15:24 조회11,20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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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작은 작가 자신과의 부단한 부딪힘과 열념과 고뇌, 거듭남의 연속이다. 그러나 그 작업이 자기만족에 머무를 수 없는 것이고 보면 궁극적으로 작업의 과정과 결과물들이 소통되어질 미술현장이나 세상, 수용자 또는 향유자들의 기대와 반응, 자연인으로서 작가 개인적인 현실 삶 등의 많은 것들에 영향 받기도 하고 수많은 것들과의 관계가 얽히고 섥히며 작가의 길을 개척해 나가게 된다. 

    전통 화맥이 뚜렷한 지역화단에서 그런 세상의 여러 조건들과 자기작업과의 균형을 유지하면서 독자적인 회화세계를 모색해 온 정산 백현호(丁山 白賢鎬)의 10번째 개인전이 열리고 있다. 5월 15일부터 21일까지 광주 금남로3가 대동갤러리에서 펼쳐지고 있는데, 설명적 형상을 과감히 털어내고 단순화시킨 화면구성과 수없이 쌓아올린 채색들, 그 위를 다시 반복해서 덧쌓으며 중첩시킨 반투명한 백색의 산세들이 깊고 내밀한 무게감을 우려내면서 환하게 빛나는  '천지인(天地人)' 연작들로 선보여지고 있다. 정산이 그동안 모색해 온 자신만의 회화세계에 대한 끊임없는 탐구의 한 매듭을 지어보이는 것이면서, 최근 새롭게 시도하고 있는 반추상적 채색산수 작업들을 발표하는 자리이다. 

    물론, 이전에도 묘사적 요소들과 함께 화면처리나 채색에서 색다른 시도를 조심스럽게 내비치기는 했지만, 그 산수자연 소재나 시각요소들을 훨씬 단순화시켜낸 연작들이다. 말하자면 사물의 형상을 묘사하기보다 그 자연을 심상 속에 띄워 관조하면서 마음 속 산수풍경들을 재구성해낸 작업들이다. <脫- 다시 먼 산에서>, <脫-산 밖의 길>, <脫-멀리서 가까이서>, <覺- 天地人>과 같은 작품 명제에서도 나타나듯이, 대상이었던 산과 자연소재들에서 자유로이 벗어나 마음 속 화경을 이루어내려는 작업태도를 엿볼 수 있다. 이번 전시에 붙여진 김영순 논설위원(광주매일신문)의 아래 카달로그 서문을 참고 삼아 정산의 근작을 좀더 가까이 들여다 볼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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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유와 해방을 향한 시각협주곡
             
    김영순(광주매일신문 논설위원)

    아서 단토는 ‘예술의 종말’을 부르짖었다. 그리고 일군의 작가들이 예술의 종말 이후의 예술을 보란 듯이 구가하고 있다. 그리고 거기서 새 시대의 비전을 거리낌없이 쏘아 올린다. 대중은 다소 생소한 예술언어를 때론 찡그리며 때론 맛나게 수용하고 있다. 예술은 사방팔방으로 열려있다. 그 길을 ‘예술의 종말’ 이후의 예술가들이 달려가고 있다. 어디로 다다를지 모를 길을 내처 달리고 있다.


     예술의 역사는 모방과 재현으로부터 시작됐다. 그리스 시대부터 예술은 곧 모방으로 정의 내려졌고 르네상스는 모방 테크닉이 완벽해지는 시기였다. 그리고 이후 모방 패러다임이 더 이상 강제되지 않았다. 물론 작가 개개인의 취향에 따라 모방에 집착하는 경우도 있긴 했지만 모방과 재현이 예술의 필수공식으로 지배되지 않았다. 그같은 경향이 강하게 드러난 것은 20세기 들어 모양새를 갖춘 모더니즘에 이르러서다. 모더니즘은 모방과 재현의 틀에서 탈피해 미를 예술의 개념에서 간단히 빼버렸다. 아서 단토의 말마따나 예술에 있어서의 ‘빼기의 역사’가 펼쳐지게 됐다.


     이전 시기에 충족되지 못한 철학과 내러티브를 모더니즘이 채웠다 하더라도 이 역시 예술의 총체적인 모습에 대한 탐구에 있어 적절한 답을 내리지 못했다. 모더니즘의 폐기가 시작된 것이다. 이젠 예술의 형식, 틀, 양식은 물론 예술을 규정하는데 그 어떤 것도 필요하지 않다. 그냥 표현하면 되는 것이다. 이를 놓고 아서 단토는 ‘예술의 종말’이라 했다. 64년 앤디 워홀이 브릴로 상자를 갤러리에 전시했을 때 단토는 예술의 종말을 선언했다. 워홀의 브릴로 상자와 수퍼마켓의 브릴로 상자 사이엔 아무런 차이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워홀의 브릴로 상자는 예술작품임에 틀림없다는 거다. 이전 모방과 재현시대가 규정했던 예술적 틀은 물론이고 선언문 시대의 모더니즘이 규정하고 있던 예술이 종말을 거두었음을 단토는 예리하게 짚어냈다. ‘예술의 종말’은 예술가들이 그동안의 관습과 개념에 얽매여 있었던 예술이란 이름의 감옥에서의 해방과 자유를 의미한다.


     그렇다면 예술의 종말 이후의 시기에 작가들은 어떤 작업을 해야 하고, 하고 있는 것일까. 정말로 해방을 만끽하고 자유를 찾은 것일까. 답답했던 예술적 울타리를 걷어차고 푸른 창공으로 예술의 나래를 펴고 있는 것일까.


     그런 이들도 있다. 마음껏 자유를 향유하는 이들이 있다. 그러나 적잖은 이들이 구습에 머물러 있다. 어떤 이는 향수에 얽매여, 어떤 이는 새로운 자유를 담아낼 그릇을 찾지 못해서 등등의 여러 가지 이유들로 인해 오래된 관습을 아직 부둥켜 안고 있다. 그것 역시 오늘날 포스트모더니즘이 지향하는 다양성 중에 하나라는 관점에서 인정해 주어야 할 부분이다.


     한국화가 정산 백현호. 그 역시 바로 얼마 전까지 모방과 재현을 착실히 고수해왔던 작가다. 진경산수라 할 수묵산수에만 무려 30년 넘게 머물러 있었고 또 한참이나 그렇게 아니면 영원히, 수묵산수로 치달려 갈 것만 같았다.


     그같은 염려(?)가 한 순간에 쏵 쓸려나갔다. 개인전을 준비하는 작가의 작업실 문턱을 밟는 순간 그가 30년간 굴려왔던 수레바퀴에 브레이크가 걸렸음을 눈치챘다. 그리고 다른 궤도의 길이 상당히 진전됐음도 동시에 알아챘다. 예전에 그가 마음껏 농락했던 농담의 수묵산수가 아니었다. 물론 진경산수도 아니었다. 간략한 형태와 색채가 살아 꿈틀거리고 있었다. 30년간 붙잡아온 재현과 모방을 놓아버린 ‘마음의 산수’가 펼쳐져 있었다.


     사람좋은 웃음으로 손을 반기는 정산은 변화의 기미는 오래 전부터였노라고 했다. 그렇다면 왜, 이제야라는 질문에 “먹고 사는 일에 치여서”라고 대수롭잖게 대꾸하며 또 삐긋 웃는다.


     먹고 사는 일이라, 그랬다. 90년대 초반 화폭에다 휘저어댔다. 형태를 비틀어도 보고, 늘어뜨려도 보고, 색상도 요리조리 짜보았었다. 그 때마다 희열을 느꼈었다. 그러나 자신의 갈길은 화폭에서의 자유와 해방 대신 질서정연한 수묵산수일 뿐이었다. 생계를 해결해야 할 가장으로서 컬렉터들의 요구를 무시할 수 없어서였다. 반듯함에서 비뚤어져 나오다가도 생계라는 현실에 부딪히면 ‘앗, 뜨거워라’ 하며 다시 되돌아가곤 했다. 고로 전시장에서 대할 수 밖에 없었던 정산의 작품은 현대성을 가미한다고 하더라도 전통산수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것들이었다.


     늘 새로 시작이다 하면서도 저지르지 못했던 일탈의 거보를 3년 전 내딛었다. 어떤 변명이 가로막더라도 더 이상 양보할 수 없었다. 정산은 그러한 까닭에 변화의 첫 발을 성큼 디뎌보았다. 전통산수의 기본기를 토대로 한 <하늘 연가> 시리즈다. 하얀 구름이 푸른 하늘에 펼쳐진 청아한 느낌의 채색화다. 보는 이로 하여금 명상 속으로 빠져들게 하는 그림이다. 그러나 그는 거기에 머물지 않았다. 곧바로 화려한 채색의 산그림으로 옮겨간다. 과격할 정도로 컬러풀하다. 월출산 덕룡산 만덕산 등 남도의 산들이 그의 색단장과 힘있는 갖가지 준법들로 예쁘게 치장했다. 붓을 세워 힘있게 긋는 중필법, 위에서 찍어서 내리 꺾는 소부벽준 등 전통 준법을 동원해 보색 대비의 화면에 강렬함을 보태었다. 이글이글 타오르는 내면의 강한 에너지를 아낌없이 토해낸 그림들이다.


    아무리 커다란 변화라 하더라도 이 때까진 실경의 테두리에 맴돈다. 여기서 정산은 한바퀴 더 뒹군다. 화려한 색을 걷어내고 선도 깔끔하게 처리했다. 이른 바 <하늘과 땅 그리고 인간> 다시 말해 <천․지․인> 시리즈로 접어든다. 2007년의 일이다. 단순한 구도, 단순한 색상 한껏 걷어냈다. 드디어 정산이 자신의 작업에 ‘빼기’를 시작한 것이다. 시각적 빼기를 위해 그는 얼마나 많은 더하기를 했는지 모른다. 바탕에 깔린 밑 색만 하더라도 다섯 겹을 칠하고 그 위에 또 색을 올렸다. 그러면 그 안에서 색이 우러나온다. 수없이 행해지는 더하기의 과정을 거쳐서야 그의 빼기 작업이 실현된 것이다.


     수없이 올리는 색 위에서 선으로써 산의 형상이 잡아진다. 덧칠 속에서 작은 산들은 사라지고 큰 테두리산만이 작은 산들을 안으로 보듬어 안은 채 살아난다. 마치 무등의 선 같은 산이 화면 중앙에 자리하면서 위로 하늘, 아래로 땅임을 표시한다. 그것은 외형으론 산이나 산이 아니다. 그의 삶이다. 말로 형언키 힘든, 진득한 삶의 편린들이 덧칠해지는 과정에서 사라지고 이젠 큰 형체만이 대변하듯 큰 산으로 남아있다. 삶은 그 안에 녹아들어 있다. 지난 삶의 형편들을 굳이 말로 설명하지 않아도 되듯 그림에서도 녹아들어 형체를 알아 볼 수 없다. 그리고 산을 오르는 또는 땅을 걷는 사람 몇이 그 살아 꿈틀거리는 이야기들을 말하며 듣는다.


      30여 년간 답답할 정도로 밟아온 전통산수의 기본기가 바탕이 됐다. 그래서 색과 선의 해방이 자연스럽다. 뻑뻑하거나 어색하지 않다.


     오랜 재현과 모방의 시대를 거쳐 이제 빼기의 시대로 나온 정산의 작업이 언제 그마저도 모두 흐트러뜨리고 완전자유를 얻게 될지, 그날 그는 어떤 작업을 하게 될지 심히 궁금하다. 어쩌면 이미 그 자유의 1막을 열었는데도 둔한 필자가 못 느끼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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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동갤러리 / 062-222-0072
    정산 백현호 / 062-228-2455, 018-613-2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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