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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주의 현재에 관한 리포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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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광주미연 작성일04-02-05 14:08 조회8,78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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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주신세계갤러리 개관 8주년 기념전
    <광주 21景> 2002.8.25(월)~ 9.7(일)

    '광주의 현재'에 관한 리포트

    이세길(미술평론가)


    광주 말하기 :

    20세기 끝 무렵, 열정과 좌절이 뒤범벅된 수렁 속을 헤맨 청년의 나에게 고향 광주는 마치 로터리채널로 힘들여 돌리는 티비 화면처럼 느릿하고 묵직한 영상으로 남아 있다. 무릇 예기치 않았던 역사와의 조우遭遇가 개인의 평범한 삶에 그처럼 무거운 하중을 '길게' 안길 줄은 그 때는 잘 몰랐다. 남들도 그렇게 살아 온 것처럼 그저, 의식의 밑바닥에 가라앉은 형체 불명의 죄의식을 껴안고 내 여윈 실존의 삶은 그렇게 떠돌며 흘러갔다.

    21세기를 막 넘긴 2003년 8월 중순에 광주를 말하기…. 그것은 많은 전제를 깐 중층적 사유를 내게 요청한다. 솔직히 걸리는 게 많아 글을 쓰기가 쉽지 않다. 감히 인생이라 말하기 멋쩍은 삶은 리모컨으로 작동하는 티비 화면처럼 잽싸게 표변해 왔다. 한동안 암송하듯 지켜 온 '반성적 인식의 삶'이란 참 듣기 좋은 금언은 어느 사이엔가 추상어가 되어 버렸다. 백열등처럼 강렬하게 내 삶을 비춰 온 광주를 일상처럼 껴안고 살아 왔음에도 여전히 이 곳은 조급한 해석과 접근이 쉽지 않은 공간인 듯하다. 어쩌면, 섣불리 규정짓기를 사양하고 혼돈의 상태 그대로 광주라는 공간은 오래도록 남고 싶어하는지도 모른다.

    근대 이후의 광주를 건너 뛰어 현재형으로 역류해서 광주를 생각할 때 많은 사람들은 광주에 대해 말하길 자신 없어 한다. 왜 평범한 시민들은 자신의 '정든 땅 언덕 위'에 대해 언급하는 것을 꺼리고 민망스러워해 왔을까? 나로서는, 독재시대 이후 광주에 대해 광주 안팎에서 편협한 존재론적 자의식의 완강한 흐름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80년 5월이라는 한국현대사의 정신적 충격을 겪은 이후 어느 순간, '누군가'만 광주를 말할 권리가 있었고, 누구도 함부로 광주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할 수 없는 분위기가 있었다. 501.44㎢의 광주 안에서도 공연히 목소리를 키우는 사람과 공연히 목소리를 움츠려야 하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이러한 목소리의 차이는 상반된 정치적 기표로 한동안 작용했다. 참으로 불편했던 광주에 관한 '목청'의 독과점 의식은 국민의 정부가 소멸한 이후 상당 부분 완화되었다.

    광주를 말한다는 것, 광주를 표현한다는 것, 광주를 규정한다는 것…. 이처럼 서사의 표면에만 집착하는 접근 방식은 견고하지 못한, 뜬구름 잡는 긴 주석만 요청할지 모른다. 이 순간, '확증'할 수 있는 광주는 그 자체로 여느 메가폴리스들과 마찬가지로 '일상적 공간'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도시라는 것이다. 8.15 해방 당시 인구 8만의 도시가 반세기만에 140만에 가까운 인구를 껴안는 거대도시로 양적 팽창을 거듭해 오면서 광주 역시 여타 산업사회의 도시들이 당연히 겪어온 자본주의적 자기갱신을 거듭해 왔다. 광주의 현재 지점에 대한 탐구는 바로 그와 같은 근대적 일상성이 자연스럽게 확대되어온 '시간의 힘'에 대한 신뢰로부터 이루어져야 한다고 본다.

    그런 만큼 광주라는 공간을 둘러싼 선험적 또는 도식적 인식으로부터 한 발짝 물러서서 타자화他者化하여 바라보는 것, 시간 공간의 오랜 전화轉化 프로세스를 객관하는 것도 현실적으로 '난해'한 광주의 실체에 접근하여 말하고 읽을 수 있는 방도의 하나가 될지 모른다. 이 글은 그에 관한 짧은 리포트의 거친 표면이며, 광주신세계갤러리 개관 8주년 기념 전시 <광주 21景>은 그 실증적 이면의 하나가 될 것이다.


    광주 살피기 :

    광주가 역사의 지도에 점을 찍은 지는 오래되었다. 고려 태조 23년, 서기로 940년에 마한馬韓의 고토 무진주武珍州가 마침내 '光州'로 불려졌으니 역사상으로 천년이 넘는 묵은 도시라 할 수 있다.

    그럼에도 광주에는 천년 세월의 연대기적 질료의 흔적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동아시아의 역사적 발달과정이 갖는 한계는 그처럼 과거와 전통을 근대화 과정에 이의 없이 모조리 복속시켰다는데 있다. 정도 600년을 넘긴 서울에는 몇 개의 대문과 궁정 등 유물이 그런 대로 남아 있고, 전주와 나주 등지에도 봉건시대의 고고한 흔적이 낙인처럼 남아 있는데, 광주에는 몇 무더기의 성곽 돌무더기만 무등산 고갯마루에서 간신히 찾을 수 있을 뿐 거의 무화無化된 상태다.

    결론적으로 광주에서 찾아볼 수 있는 과거의 광주는 없다. 광주의 옛 모습을 복원한다는 프로젝트가 몇 년 전에 '의욕적'으로 발표된 바 있다.1) 그러나, 삭막한 콘크리트 밀림에 갇힌 '무진고성武珍古城'의 어설픈 복원이 보여 줄 극심한 부조화를 걱정하기도 전에 그 프로젝트는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고 반문하며 유야무야하고 말았다. 광주의 역사성이 어떻게 해서 구조적으로 결핍되어 왔는가에 대한 논의는 이 짧은 글의 몫이 아니다.

    광주에 대한 이런저런 독해의 방식이 한동안 뜻있는 식자들의 우환거리가 된 적이 있었다. 나처럼 현지에 사는 이의 닫힌 심사로 판단하길, 마음에 걸리는 그릇된 광주 독해는 1980년의 역사적 경험에 대한 과도한 '경계심'과 '관심'이다. 그러한 경계심과 관심이 광주에 대한 느슨한 접근을 왜곡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예기치 않은 폭력적 운명에 시달려 온 광주는 어찌 되었든! 다른 도시보다 시각적 느낌 또는 분위기가 다를 것이라는 예단이 있다. 때론 그것은 맞다. 그러나 때론 그것은 현지인들을 원하지 않게 잠재된 악몽의 터널 속으로 몰아넣기도 한다.

    대단히 단정적이지만, 한 손에 총을 들게 하고 한 손에 피를 묻히도록 몰아가는 데 미필적 고의로 일조한 계층(아니면 지역)에서 그런 예단을 갖고 광주를 바라본 게 사실이다. 그런 예단이 유행처럼 번질 때, 현지인은 침묵의 누적을 감수하며 입을 다물었다. 그것은 '지역감정'이라는 간단하고도 환멸스런 용어로 오랫동안 유령처럼 떠돌고 있다.
    많은 화가, 문인, 사회과학자, 역사학자들이 마치 인플루엔자에 감염되듯 광주를 정성스레 어루만져 왔지만, 사실 어느 누구도 그 곳을 제대로, 정확히, 엄밀히 본 사람은 없는 듯하다. 광주는 광주 아닌 제3자를 위한 도덕적 예배가치 혹은 정치적 '명동성당' 쯤으로 간주된 것은 아니었는지 2003년 오늘 새삼스럽게 자문을 던져 본다.

    결국 많은 오해가 있지만, 광주는 어느 누구 혹은 일방, 정파를 위한 정치적 꼬뮌으로서의 배설구는 아니라는 생각이다. 어쩌면, 기형의 자본주의에 현혹 당한 여타 대형도시들처럼 몽롱한 소비의 대형창고라는 데서 현실적 인식의 지도를 그려가야 타당할지도 모른다. 광주는 한반도 남단의 자본제적 발달과정에서 타의에 의해 일정 정도 뒤쳐졌을지언정 여느 도시처럼 성장지형도의 자연스런 궤도에서 이탈한 적은 없다.

    오래도록 순결주의에 감금된 광주에 대한 정신적 또는 정치적 기대는 사실 알려진 것 이상으로 매우 풍류화되어 있다. 그러한 외부의 시선과 애정에 대해 광주의 일부 사람들은 '고향에서 온 대필 편지의 상투적인 안부' 쯤으로 시큰둥하게 여기는 경향도 있다. 그런 시니컬한 태도까지도 한때 열병을 앓듯 광주를 지극정성으로 대해 온 이력의 후유증이라고 한다면, 너무 면피성 발언일까?2)


    서울의 압구정동 로데오거리나 신촌과 같은 진부한 일상의 공간.자본이 추동하는 탈근대적 풍경은 광주 구시청 사거리, 전남대 후문으로 그대로 전이되어 있다. 화사하고 섹시하고 럭셔리한 스쿠버 룩이나 쿠튀르풍의 젊고 팽팽한 아방가르드는 충장로 거리에 여전히 넘치고 넘친다. 그런가 하면, 바로 그 순간 도청 앞에서는 통일대축전 행사가 '학생 따로 시민 따로'의 무덤덤한 분위기 속에서 열리고, 그걸 기쓰고 막는 불쾌한 희극의 삽화는 이미 과거지사가 되어 있다. 단순하게 도식적으로 말하자면, 광주에서 볼 수 있는 것은 서울에서도 볼 수 있고, 그 역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광주 아닌 다른 곳에서 광주를 특별히 '다르게' 느낀다는 것은 아마도 '역사적 현재'로서의 1980년이라는 나쁜 꿈의 기억에 대한 선입견 혹은 정신적 민망함 때문이 아닐까 싶은데, 확인 내지는 확언할 수는 없다.

    '남도정신의 원류를 찾아서'라는 큰 테제 아래 진행되어 온 신세계갤러리의 개관기념전 2003년 버전은 이처럼 시 공간의 배경을 좁혀서 광주의 과거와 현재에 대한 다양한 추체험으로 역사에 지쳐 있는 공간의 위안을 기도한다는 느낌을 받는다. 작가와 개인 참여자들의 자유롭고 유쾌한 상상력과 감성으로 '광주 살피기'에 무사히 또한 성공적으로 육박해 들어갈 수 있을지 전시장에서 확인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광주 엿보기 :

    광주는 무엇인가? 어떻게, 무엇을 두고 광주를 말해야 하는가? 광주를 점잖게 자찬自讚한 옛 기록3)으로부터 터무니없는 모함과 험담으로 광주에 지긋지긋한 통증을 안기는 사례4)가 복잡하게 교차되어 있다. 최근에는 광주라는 명시적인 삶의 지점을 통찰하는 여러 매체들, 가령 [www.jeonlado.com]과 같은 인터넷 박물지로부터 현실에 기반한 광주에 관한 정보를 많이 얻는다. 이런저런 정보와 자료를 교직해서 '늘여진 현재'로서의 광주를 (순 개인적인) 나름의 시각으로 엿보면 이렇다.

    광주가 예술의 여러 영역에서 다양한 스펙트럼5)을 지니며 시대적 의미를 풍성하게 해 온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특히, 미술문화의 경우 '광주'에 대한 집요하고도 성실한 실천운동과 전통적인 예술 지상주의의 상호 경쟁적인 조응은 또 다른 의미로서의 광주의 자기 존재감을 강하게 부각시키는데 일조 했다.

    콜링우드의 지적처럼 문화와 예술이 현실을 떠나 떠도는 막연한 상상이 아닌 까닭에 어떻게 해서 그러한 독자적인 'gwangju look'의 부각이 가능하게 되었는가를 생각해 볼 필요도 있다. 그것은 아마도 '전라도'로 통칭되는 이 지역에 대한 뿌리깊은 정치경제적 소외가 문화와 예술이라는 대척對蹠의 영역에 대한 활로를 열게 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그러한 반사적인 영역의 확보는 '예향'과 같은 부적절한 칭송을 꼬리표처럼 달고 다니게 했다.

    또한 생각해 볼 점은 광주 또는 광주사람의 지배체제에 대한 반응심리다. 그러한 반응은 역사적으로 대단히 즉자적이었음이 분명하다. 아니, 왕조의 창시자들이나 통치그룹들마다 내보였던 호남지역에 대한 근거없는 경원敬遠심리가 보다 더 즉자적이었을 것이다. 단편적이긴 하지만 흥미로운 과거의 기록6)을 보더라도 이 지역의 지배체제에 대한 감정이 별로 우호적이지 않았을 것은 뻔하다.

    반드시 즉발적인 '감정' 때문만은 아니지만, 구한말의 의병운동, 6.25 당시의 빨치산운동, 4.19 이후의 사회운동, 5.18민중항쟁에 이르기까지 저항의 정신은 같은 체제와 시대를 사는 동류항에서 배척 당한 이들의 강고한 몸부림으로 여겨진다. 이를테면, 같은 '패'에 낄 수 없어 느끼는 극심한 소외감이 생존의 자구책을 감행하도록 내몬 것은 아니었는가 말이다. 그러다 보니 부당한 정치 권력을 옹호하는 외세에 대한 혐오에까지 '의향'으로서의 즉자적 반응 영역은 확장되었다.

    끝으로 쇠락한 농촌공동체를 기반으로 하는 이 지역 경제 토대의 부실함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근대 이후 고착된 타 지역과의 현격한 경제력 차이7)는 그것이 단지 기간산업시설의 상대적 부족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역대 권력의 부당한 소외정책이 결과한 것이라는 생각이 지배적이다. 그러한 일상화되고 숙명적인 피해의식은 당연히 당대의 현실적 모순들에 직접적이고 지속적으로 접근하게 만드는 동력이 되었다.

    이미 균형추를 상실한 생산-소비구조는 전통적인 생산기반의 몰락만이 아니라 그를 유지하는 공동체와 문화의 동반 영락零落을 유도하는 것이었다. 자연히 광주의 도시 기반은 도심과 부도심을 가르는 천민자본주의가 완고해질수록 뿌리째 흔들리게 되었고, 도시활동의 토대를 이루는 빈민, 서민, 노동자들의 취약한 삶의 공간은 갈수록 위협받게 된다. 결국 도시 주변부로 내몰리게 되는 가파른 삶들은 아사餓死 직전의 농촌사회로 재투입되는 것이 아니라, 치열한 생존 정글인 한강 주위로 산재 흡인되어 나가고 만다.

    그렇다면, 과거-현재를 담보한 광주의 미래는 어떻게 그려볼 수 있을까? 요즘, 이 지역에서는 명 짧은 유행가처럼 문화수도니 문화도시 따위를 모두들 주창하고 있지만, 사실 그 밑그림조차 잘 보이지 않고 너무 인위적으로 유포되는 게 문제다. 그처럼 자기 입맛대로 기대에 부풀려진 아젠다가 워낙 전략적인 정치술어의 형태로 제시된 터고, 착실히 구축해 나가야 할 문화사회에 대한 각 영역과 집단의 전반적인 태도도 '준비 미흡' 상태여서 기대난망이라는 게 솔직한 생각이다.

    그 뿐인가. 광주광역시 홈페이지에서 '공식적'으로 제시하고 있는 광주시의 중점시책을 보면, 그야말로 뜬구름 밟는 듯 이상향을 추구하는 것이어서 도무지 믿음을 갖기 어렵다. 광주의 미래상 역시 '국제중심도시, 첨단정보도시, 문화예술도시, 녹색환경도시, 인본민주도시'를 복합적 총체적 종합적 관점에서 지향하는 것이라는데 치미는 멀미를 다스리기 힘들다.

    다른 것 다 젖혀 두고 이번 전시에 참여한 평범한 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두 가지만 주문하자면 이렇다. 첫째, 광주에 사는 자부심을 갖게 되었으면 좋겠다. 그 자부심의 원천이 무엇인지는 굳이 말하지 않겠지만, 광주 밖에서는 인정받는8) 광주가 광주 안에서는 인정받지 못하는 불행은 빨리 끝내야 한다는 생각이다. 둘째, 시민들이 무엇에 삶의 희망을 걸 것인가를 명료하게 결정할 수 있어야 한다. 가령, 부실한 문화 지표는 엄연한 현실9)인데 장밋빛 문화수도 대망론은 삶의 화폭에서 너무 흐릿하고, 만병통치약처럼 선전됨에도 여전히 빛을 보지 못하는 광산업으로 포장된 미래 광주는 너무 의심스럽고 지루하다.

    미리 전제했지만, 순전히 개인적인 시각으로 엿본 광주였고, 여전히 쉽게 풀리지 않는 공간의 숱한 비밀이 토박이인 내 자신을 감싸고 있음을 느낀다. 미술문화의 유효한 전술의 하나일 전시라는 현실주의적 '필터링'을 거쳐 이 비균질적인 양상들이 어느 정도 해명될지는 알 수 없다. 결국 2003년 오늘, 140만명의 인구가 다양한 존재방식으로 구성하고 있는 광주의 편린, 그 끄트머리의 한 끝만 만지고 있을 것이란 생각이다.


    광주 이미지 :

    볼거리는 늘어가도 생각은 짧아지는 시대를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널려 있는 볼 것들은 기실 상투성의 혐의를 못 벗고, 그에 대한 사념思念은 파편처럼 공허하게 흩어져 버린다. 도발적인 힘으로 매혹시키는 기억에 남을 이미지들은 드문 반면, 확신 없는 미적 전망들만 저자거리처럼 웅성거린다. 가히 '현대적 도취'라 이름할 마술 같은 현실은 대중의 심미적 판단을 마비시키며 감성의 살결만 가볍게 어루만지고 있다.

    하루가 다른 지형 변화의 거센 흐름 속에서 자칫 미아가 되고 마는 현실의 공간을 대체 어떻게 붙들 수 있을까? 여기 예술가 시민들의 집요하고 성실한 응시에 의한 광주의 또 다른 '위치규정 positionality'이 있다. 저마다 유지하고 있는 광주의 현재에 대한 실존적 정서의 편차는 다를지라도 현실미학의 독선적 수사학에 쉽게 함몰되지 않고 주변화된 광주의 이미지들을 이끌어내는데 나름대로 공력을 들였다.

    이를테면, 도청앞 금남로 남동성당 등 역사의 증언이 가능한 공간으로부터 너릿재 뽕뽕다리 서방사거리 등 추억의 장소가 다양한 매체장치를 통해 되새김질되고 있다. 그런가 하면, 첨단지구 도심 야경 등 광주의 면모 일신 형태에 대한 미적 접근이 해석적으로 덧붙여지고, 복개된 광주천 신개발지구에 대한 세심한 관찰이 현실로서의 광주에 대한 다각도의 이해를 돕게 된다. 또한, 광주호 주변 무등산 전경 등 광주에 대한 인문지리적 일별이 전통 회화어법으로 제시되는가 하면, 신세대의 눈으로 바라 본 당대의 생활풍속화가 광주의 현재 지점에 대한 탈현대적 시각을 보여줄 것이다.

    새롭고 효율적인 매체는 날로 확산되고, 세계화된 문화 시장은 역동적으로 접근해 오는 등 디지털 문명시대를 뒷받침하는 문화지형은 자못 그 범주의 깊이와 폭을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분방하고 민첩하다. 마구 무질서하게 섞여나가는 것 같으면서도 차이와 다름이 공존하고, 서로의 목소리를 또렷이 낸다. 그러한 현실을 염두에 둔다면, '광주의 현재'에 대한 순수한 타자성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지 모른다. 또한, 광주를 둘러 싼 시대적 조건이나 존재방식에 대한 맹목적 해석의 헤게모니도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물론 호미 바바가 말한 것처럼, '현재의 외상外傷을 이해하기 위해 조각난 과거를 짜 맞추어 보는 것'과 같은 식의 단순하고 낯익은 접근법도 과히 적절치 않다.

    오늘 제시되는 <광주 21景>은 사실 미술의 어법으로 풀어진 '시공간 압축 time-space compression'의 한 형식이지만, 오래도록 시대의 딜레마를 껴안고 온 광주의 유무형적 퇴적층에서 감지하는 공간의 운동성을 그대로 드러내는 시도의 하나가 될 것이다. 우리는 광주라는 공간의 속살을 여러 방식으로 '데생'해 온 작가, 시민들의 시대를 읽는 독법을 따라 시각적 추억들로 가득 찬 풍요로운 이미지 정원을 담담하게 산책할 수 있을 것이다. <이세길 미술비평>


    (주)

    1) 光州市가 10억여원의 예산을 투입해 추진하고 있는 무진고성지 복원사업 중 2백30여 미터에 달하는 성곽축성이 마무리 단계. … 이에 따라 市는 동문지의 수문과 성문루 장대 망루 등의 건립공사에 들어가 복원사업을 마무리할 방침인데 늦어도 10월말까지 문화재관리국의 승인이 떨어지면 곧바로 다음 사업에 착수할 계획.[무등일보, 1997/10/17]

    2) 80년대. 광주. 그게 어떻게 쉽게 어루만져질 상처이기나 한가. 섣부른 혹은 서투른 위로는 오히려 상처를 더 깊게 만드는 법인데…. … 그 날의 광주에 대한 지식인의 해묵은 '부채의식'에서 태어난 영화 <꽃잎>. … 서둘러 광주를 형상화하려는 허튼 기도보다는, 지금은 차라리 광주를 손대지 않고 그냥 놔두는 게 낫지 않을까. … 싸구려 위로를 받느니 차라리 냉정한 무관심을 택하겠노라고.[최영미,「광주는 언제 신파를 극복할 것인가」,『사회평론-길』, 1996년 5월호]

    3) 가령 이런 류의 글들이다. "우리 고을은 호남의 이름난 고을로서 산으로는 고대高大하고 웅위雄偉한 서석산瑞石山이 있고, 강으로는 물이 깊고 맑은 극락강極樂江과 황룡강黃龍江이 있어 남주南州의 청숙淸淑한 기운을 형성하고 있다. 이러한 까닭으로 재학才學과 충효忠孝가 전후로 배출하여 우주宇宙를 유지하고 역사에 찬란하여 크게는 국가의 보필이 되고 작게는 고을의 모범이 되었으니, 이 어찌 아름다운 산천의 맑은 정기精氣가 모아 생육生育한 것이 아니랴." [『光州邑誌』, 高宗 己卯(1879) 四月, 長興 高濟尤의 序에서]

    4) 대개는 기득의 세력과 그를 유지하는 언론권력의 횡포, 또는 정치를 하는 철새형 낭인들의 편리에 의해!

    5) 이른바 고급예술의 영역뿐만 아니라 김연자로부터 봉만대에 이르는 대중 예술인의 혁혁한 활약도 배제할 수 없다.

    6) 세종 12년 경술년(1430)에 읍인邑人 노흥준이 광주목사 신보안을 구타한 사건이 있었다. 조정에서는 흥준을 장형에 처하고 변방으로 내쫓은 다음 광주읍을 무진군으로 강등하였다가 문종 원년(1451)에 다시 복구하였다. 성종 20년(1489)에는 판관 우윤공이 원인모를 화살에 맞은 사건이 일어나자 조정에서는 읍인의 소행으로 의심하고 광산현光山縣으로 강등하였다가 연산 7년(1501)에 다시 광주목으로 복구한 기록이 있다. 그 뿐이 아니다. 인조 2년(1624)에 광주사람 원愿이 '이괄의 난'에 가담했다 하여 광산현으로 강등하였다가 인조 12년(1634)에 다시 목牧으로 복귀하였고, 숙종 27년(1701)에는 장희빈의 오빠 장희재의 첩인 숙정宿正이 광주사람이라는 터무니없는 이유로 광산현으로 강등하였다가 몇 년후에 목牧으로 복구된 바 있다.[『朝鮮王朝實錄』,『光州邑誌』, 인터넷 등]

    7) 2000년 당초 예산 대비 전국 광역시 재정자립도는 서울이 94.8%로 최고인데 반해 광주는 62.2%로 최하위를 기록하고 있고, 도의 경우도 전남이 15.9%라는 빈사상태의 기록으로 역시 최하위를 면치 못하고 있다.

    8) 이 마저도 '어느 정도 인정받는' 식으로 수식어를 붙여야만 무색함이 덜할 정도가 되었다는 것이 좀 비참한 심정이다.

    9) 한국문화예술진흥원이 펴낸 『2003년 문예연감-2002 문화예술 총결산』에 따르면 광주 전남권의 지난 해 전시 및 각종 공연활동 횟수는 서울 경기는 물론 부산 대구 전북, 심지어 충청권에도 뒤쳐지는 것으로 나타났다.…지난 해 총 7,080건의 국내 미술전시 가운데 광주 전남에서는 425건이 열린 반면 서울 3,383건, 부산 442건, 대구 경북 547건으로 전통적으로 우위를 보인 것으로 알려진 미술에서도 전시 횟수가 대구 경북은 물론 부산의 규모에도 미치지 못하고 있다.[전남매일 2003/8/19] ■
    [2004.0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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