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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문종의 농사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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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광주미연 작성일04-02-05 14:08 조회10,67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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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8년 서울미술관에서 열린 '문제작가전'에서 나는 처음으로 박문종의 그림을 보았다. 힘찬 먹그림으로 표출된 파격적인 기법과 분노와 응어리, 비극성을 함축한 형상과 이야기 구성의 연출은 절실한 그 무엇으로 충만했다.
    그러나 우리가 만난 건 한 참의 시간이 지난 후였다. 1993년에 두 번째 개인전을 갖던 그 즈음으로 기억한다. 필자는 그 당시 작업실에서 끈끈한 정서의 힘과 투박하고 소박하지만 고집스런 근성으로 버무려 놓은 그림들에서 그림과 삶에 대한 고민을 적당한 선에서 얼치기로 맞물려놓거나 타협하지 않고 지독하게 바닥까지 내려가 거기에서 비로소 자기 그림에 대한 진정한 모색을 궁구하려는 작가정신의 고집스러움, 그 비타협성, 자존의 내음 같은 것을 환기해본다.
    그 전시를 기점으로 나는 박문종의 그림을 해마다 지켜보게 되었다. 광주에 있는 작업실을 거쳐 담양에 직접 마련한 현재의 화실까지 옮겨갔고 그는 그렇게 그림에만 몰두하고 있는 작가이며 광주의 무수한 작가들 중 가장 인상적인 작가다. 예행이라는 이름뿐인 광주에 그는 그 이름을 유일하게 빛내준다.

    광주 시내에 있던 조그만 아파트 한켠에 마련된 작업실에서 수많은 종이더미를 헤집고 다니며 그가 그려놓은 그림들을 보았을 때도 그랬지만 최근 그의 작업실에 들러 작품을 보면서 필자는 근래 동양화단의 그 무분별한 서구 미술양식의 수용과 범람, 허망한 실험, 동양화도 서양화도 아닌 비밤밥 양식의 혼돈과는 확실히 다른 우리그림의 한 특성으로 꽉짜인 울림이나 감동 같은 것을 맛보았다. 탁월하고 솜씨 좋은 손맛과 우직함, 이 작가만의 진지한 시선과 마음의 그물에서 건져 올려지는 정서나 느낌의 탄탄한, 촘촘한 것들도 접했다. 동시에 여전히 먹과 황토, 약간의 채색이 한지나 장지 위에서 연출해내는 동양화의 맛이 손상되지 않으면서도 새로운 조형공간과 회화적 힘으로 상승하는 데서 주목된다. 그리고 다른 어떤 것보다도 그의 그림은 고졸하고 순박하며 어리숙한 미감으로 가득하다. 최근작은 마치 아이들의 낙서처럼, 민화에서 만나는 웃음을 절로 자아내게 하는 허투름한 맛이 일품이다.

    전남 무안이 고향인 그가 태어난 당시는 집안이 비교적 부농이었는데 아버지의 형제가 많아 분가하면서 가세가 어려워졌고 따라서 어머니의 고생은 필연적이었다고 한다. 5남매를 기르면서 땅을 지킨 어머니에 대한 자신의 생각은 지금도 각별한 것이다. 늘상 논과 밭, 냇가와 야산, 그리고 들 앞에 조금 떨어진 곳에 위치한 영산강과 강 건너 멀리 월출산을 보며 자랐다고 한다. 어른들 도와 농사일을 하고 자연재해로 인해 교회에서 밀가루 배급으로 연명하기도 하며 어렵고 가난한 삶을 살면서 그는 농촌의 곤궁함과 목포로의 열차 통학을 통해 쇠락해 가는 주변 도시의 풍경을 보며 보냈다. 어린 시절부터 무턱대고 공책을 그림으로 메꿔가던 그는 고등하교 졸업 후 집에 틀어박혀 주로 미술 교과서 도판에 나오는 겸제 산수화 등을 그전의 낙서와는 달리 제법 격식을 갖춰 모사하곤 했는데 이웃마을 아저씨의 소개로 목포의 남농 제자되는 분을 소개받아 본격적으로 수학을 하게 된다. 대다수 동양화가들이 그렇듯이 소위 채본을 받아다 열심히 모사하는 수업을 받기를 해오다 의제 문하의 광주 연진회 1기로 들어가 비교적 긴 시간을 기숙사 생활을 하면서 화풍을 익혔던 것이다. 그후 4년여간 그는 '얼치기 동양화가 생활'을 하면서 밤새워 제법 고급스런 술집에서 술 마시고 다음날 병풍 몇 벌 그려내는 식, 혹은 여관방 전전하며 손님 끌어 모아 그림 파는 일등 당시 선배들 따라 보따리 장사를 하며 살았다고 한다. 그러나 80년대 들어와 동양화 붐은 몰락하고 더 이상 돌파구가 보이지 않자 그는 늦은 나이로 대학에 들어간다. 당시 자신이 들어간 지방 대학에 동양화 전공이 없어서 그는 혼자 양화하는 사람들 틈에서 더부살이를 했다고 한다. 졸업 후 혼자 이것 저것 해오던 그는 80년대 광주의 특수한 상황과 정서가 현실에 대해 새로운 인식을 갖게 되는 계기를 마련해주자 자연히 현실참여 운동하는 사람들, 특히나 문학인들과 끼여 술자리를 갖게 되고 현실에 대한 인식의 폭을 넓히면서 자연스레 사회의 현실적 문제를 그전에 자신이 체득했던 수묵기법으로 옮겨 삽입하는 그림을 그리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80년대 민중미술과 케테 콜비츠, 중국의 장조화 그림들을 접하고 이를 섞어서 그린 것이 80년대 후반의 작업이었던 것이다. 그는 그렇게 해서 88년 그림마당 민에서 첫 개인전을 치룬다. 좀더 현실문제에 대한 진일보를 보여준 당시 작업은 기존 동양화하는 작가들에게 다소 충격적인 것이었다. 그 누구도 수묵으로 그런 현실적 문제를 그린 작가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전시를 치르고 그는 심한 전시 후유증에 시달렸다. 매체에 대한 새로운 실험과 확산된 공간을 원했지만 지리한 답보 상태가 지속되었고 생각의 협소함으로 한계가 노정되었다고 여긴 그는 90년대 들어와 그간의 작업을 전면적으로 재점검하게 되었다. 결국 "그림을 어떻게 내 그릇에 담아 낼 것인가"에 대해 집중적인 혼자의 시간을 갖게 된 그는 작업의 대상에 매체가 얼마나 효율적이고 조형적인가를 따지게 되었다.
    그는 당시를 이렇게 회상한다. "내가 나를 느끼는 건 화실이라는 그 공간안에서만 가능햇고 모든 걸 내 안에서 해결하려했으며 나는 나에게로 도망쳤다. 하여튼 주변머리없는 나로서는 고립무원은 자연스러운 일이 되었다."

    작업태도나 생각이 보다 열리고 자유로워져야 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을 한 그는 다시 자신으로 회귀해본다. 그의 그림의 밑바탕은 농촌에 뿌리를 대고 있다. 유년시절을 그곳에서 보낸 까닭도 있지만 이 땅을 매개로 살아온 사람들의 삶의 궤적을 추적하는 일은, 이 땅에서 나서 숨쉬고 있는 자로서 당연한 일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또한 자신의 의지와는 다르게 농촌의 현실은 날로 피폐해가면서 그것이 물리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자신과 오늘을 사는 우리의 실제적 성장과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점차 소멸 되어가는 현실을 안타까워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서 농촌의 현실과 땅에 대한 인간의 욕망구조가 그의 그림의 중심이 된 것이다. 당시 그는 자신의 심정을 이렇게 노트에 남기고 있다.
    "나는 앞으로 농촌에 살면서 작품을 할 수 잇기를 기원하며 할수만 있다면 저 남쪽 끝 빛나는 붉은 황토 흙을 전시장에 옮겨 놓고 싶었다. 옮겨 놓을 수 만 있다면..."
    그는 그렇게 해서 담양에 정착했고 이제 본격적으로 땅과 인간들을 그릴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래서 그의 그림은 무엇보다도 자신의 고향 남도 땅과 그곳에 얽힌 인간의 삶의 이야기이다. 땅과 그 땅을 매개로 삶을 영위하면서 세상을 살아나간 세상을 살아나간 사람들의 질긴 이야기고 그 목숨이고 욕망들일 터이다.
    "96년 초 전시회 이후 도시의 굴 속 같은 작업실에서 이래 저래 파지만 내다가 몇 가지 생각의 가닥을 잡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대상에 대한 좀더 객관적인 것과 기왕의 생각들을 실천에 옮기는 일이었습니다. 작업의 내적 에너지를 위해 그래서 납득되는 환경이 필요했고 그걸 밑천 삼아 이야기를 만들어나가는 방법을 생각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담양은 나에게 많은 것을 제공합니다. 넓은 들이 그렇고 단순 명쾌한 산이 그렇고 사람 사는 모습이야 어느 시골과 다를 바는 없지만 사람 사는 역사와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어 좋습니다. 이곳의 들의 형태는 독특합니다. 가령 강가에서 시작된 들판이 미세하게 움직이면서 산에 이르기까지 높낮이를 달리하면서 층계를 이루고 지속적으로 반복해서 펼쳐져 있습니다. 여기에 산에서 시작된 물은 급하지 않게 층층이 논과 밭을 적십니다. 그래서 때로는 내려다보고 혹은 보는 눈을 낮추어 단순한 선을 중첩하고 반복해도 전혀 무리가 없어 보입니다. 그 위에 어떤 구조물과 사람들이 올라서면 그만 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도 마을과 나무와 사람들 그리고 그 절정에 정자가 있습니다. 이건 아주 오랫동안 만들어진 계획된 삶의 공간입니다. 이곳에서 어떤 일이 있었고 누가 살다갔는지 그 삶의 궤적과 구조가 높은 누정에서 보는 듯 한 눈에 잡히는 곳이기도 합니다. "
    박문종의 그림은 이런 구조를 압축하고 때로는 풀어서 생겨난 것들이다.

    좋은 그림이란 한 작가가 사물, 대상, 세계에 대한 깊이 있는 시선(결코 상투적이고 습관화된 것이 아닌)아래 이루어진다는 생각을 해본다. 다시 말해 느낌의 깊이, 감각과 세계관의 심화에 기인한다는 사실이기도 하고 또 그러한 것이 어떻게 그림의 자족적인 측면을 효과적으로 만족시키면서 독립되어 도드라질 줄도 아느냐 하는 점일 것이다. 조형적 힘과 그림에 대한 본원적이고 집요한 문제의식과 팽팽하게 균형을 잡고 있느냐 하는 점, 그리고 이는 단지 그림의 문제뿐만이 아니라 이를 넘어서서 그 한 개인의 인생관, 삶의 자세에 다름아니지 않나 한다.

    우리 농촌의 현실이 비교적 직접적으로 연출되어 강한 호소성으로 불거져 나온 초기작을 거쳐 황토밭, 황톳길 연작 및 농경도에 이르는 과정은 지속적으로 그림 안에, '농촌의 현실과 땅에 대한 인간의 욕망구조'라는 문제를 내용과 형식 모두의 틀에서 풀어내려는 시도로 여겨진다. 처음에 보여준 열정, 흥분, 격정이 가라앉으면서 보다 형식적인 측면에 치중하는 동시에 차분하고 고집스럽게 긴 호흡으로 짚어 가는 맥이 돋보이는 것 같다. 이 일관성과 집요함이 그를 고집 세고 옹골찬 작가로 인식시킨다. 보다 탄탄한 회화적 구성이 돋보이는 최근작은 초기의 먹 자체만의 구사보다는 흙과 먹의 조화와 섞임 아래 두드러지는 흙 맛이 실감난다. 흙에 대한 이 작가의 관심이란 그 흙에서 받는 인상과 정서의 우려냄과는 조금 다른 보다 본질적인 그 무엇인 그러니까 그 감정이란 것이 심리적인 차원이 아니라 실존적 차원에 보다 가깝지 않나 하는 것이다. 황토의 자식으로 태어나 땅에 대한 추억과 기억으로 무장된 한 개인의 세상에 대한 인간과 삶과 자연에 대한 인상, 역사가 황토밭을 매개로 해서 반복되고 있다. 황토밭, 그 땅에 대한 역사는 이미 쓸쓸해졌고 비감과 애수를 동반하지만 이 작가는 거슬러 올라가 그 땅에 스며있는 고난의 지층을 탐사해보기도 하고 단순히 인상적, 정취적인 차원이 아닌 땅에 대한, 땅과 농촌과 가족사와 여인사로 풀고 있다.

    땅(大地)은 원초적인 여성적 생산력, 그리고 그와 맺어진 여성성 등을 상징하고 있다. 또한 땅은 죽음과 삶을 번갈아 연쇄적으로 생산하고 또 재생산하는 영원한 모태라는 사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사농(士農)이 중시되던 조선 사회에서 땅이 사회적 부와 권위, 가문의 영에와 뿌리의 역할을 해왔고, 가통(家通)이 땅의 계승과 같은 차원에서 인식되면서 인간의 모든 사회적 지위와 실존을 규정하는 틀에 다름아니었으며 이는 오늘날까지도 우리의 토지관계/삶을 규정해주고 있다는 것이다. 박문종은 그 땅(경작지)을 '땅-주인-어머니'라는 관계 아래 놓고 이를 형상화시키고 있다. 땅에 대한 역사의식과 이데올로기의 망을 헤아리고 있다고나 할까, 또한 감성적이고 개인사적 추억과 막연한 연민의 정취 및 고착화된 과거지향적 감상에 머물 수 있는 지점을 피하기 위해, 그로인한 가벼움과 얇아짐을 경계하기 위해 화면을 이성적, 구조적으로 파악하면서 끈끈한 밀도와 단단한 조형력으로 덮고 있다. 그래서 단순하게 반복되는 선, 모든 조형언어를 최소화시켜 화면을 해결하는 한편 화면을 구축해나가는데 신경을 쓰고 있다. 그린다기 보다는 호흡과 운율이 연상되는 그리기, 추상화되어 화면 전체로 퍼져 가는 맛 그 가락과 운율이 흔히 말하는 남도창의 탁음 같은 것, 그 쉰 목소리와 늘어지는 가락의 유창함이랄까 그런 것이 아주 곰삭아져서 맛이 나는 그림으로 드러난다. 그리고 그렇게 적당히 자연적으로 생생하게 표출되면서 인위적으로 가공된 인테리어적 감성의 디자인 화를 비껴서고 있고 기량과 작위를 누르고 있다. 그래서 그의 그림에는 근성과 뼈대의 강인함이 부드럽고 어눌한 외피를 쓰고 나앉아있다.

    그는 광주항쟁 이후의 현실인식과 그림의 의미를 부단히 접목시키면서 '현실에 대해 발언하는 수묵'을 실현해왔는데 동시에 과도한 정치성의 내용이나 도식적 풍자나 일정한 내용주의에 걸려 있는 비판적 형상보다도 근원적인 고향의식과 남도 자연의 힘과 땅의 사회경제적 이데올로기를 심층적으로 해명해내는 쪽으로 고민하고 있다. 그렇다면 그는 단순히 남도의 자연과 그 고향의식에 절은 낭만적 정취나 감상을 우려내기보다는 보다 근원적으로 땅이라는 문제에 천착하고 있다고 여겨진다. 인간 역사의 근원이며 그 땅의 역사야말로 인간의 역사라는 의식에 기인하는 그의 그림은 상투적 자연주의와 갈라선다. 인류역사란 땅따먹기 투쟁사이고 땅 한 조각(필지)을 사고 파는 것처럼 보일지 몰라도 실상은 땅과 관련된 사회관계 자체를 사고 파는 것이고 이런 사회관계를 상품으로 팔기 위해서는 공권력에 의한 경제외적인 강제력이 필요했던 것이 바로 땅을 둘러싼 역사이다. 우리에게 있어 백성들의 인식 속에 있는 것은 민족국가가 아니라 사실 땅(土)이었을 것이고 그 백성들을 마을의 생활에 묶는 것은 형벌이나 다른 수단의 폭력이 아니라 땅에 대해 갖고 있는 단순한 매력이었을 것이다. 땅에 얽힌 역사는 곧 바로 인간 삶의 그 투쟁과 고난과 욕망의 역사이다. 더욱이 그 땅에서 농사를 지으며 생을 영위한 농부들에게 땅이란 목숨보다도 귀한 그 무엇이었다. 더욱이 엄청난 노동을 요하는 땅에서의 벼농사를 생존의 조건으로 지니고 살아온 우리 선조들은, 농부들은 아예 삶과 노동 자체를 땅에 속박시킨다. 음력 5월부터 10월까지의 고온 다습한 여섯 달 동안의 비교적 단기간에 단위 면적 당 다른 작물의 추종을 불허하는 생명열량을 생산해주지만 그 만큼 집중과 강도가 높은 노동을 요구하는 이 농사일로 허리가 굽는 농촌 사람들의 남루하나 싱싱한 삶과 노동은 땅과 하나로 떠오른다. 작가는 어린 시절 그 고된 노동에 허리가 굽은 어머니를 두고 그 땅에 얽힌 사연 많은 속사정을 자신의 생으로 알고 자라온 사람이다. 그러니 어린 시절부터 보아온 땅에 관한 사연, 단상, 추억, 회한이나 뼈저림 같은 것이 자연스레 화폭위로 불거져 나오는 것이 가능하리라. 이후 점차 화학물질로 온 농토가 초토가 되고 인간의 생존 터전인 농촌 자체를 파괴하는 획일적 공업화와 도시화로 인해 궁핍화, 쇠락한 고향, 농촌 땅에 대한 회한이 작업으로 이어져 나오고 있다. 가난한 살림살이와 버거운 노동으로 5남매를 기르면서 땅을 지킨 자신의 어머니에 대한 추억이 '어머니'라는 작업으로 지속되고 있고 그 어머니가 바로 땅의 역사를 온몸으로 증거 해 온 분이라는 인식이 묻어있다.
    사실 풍경이란 인체의 오관을 통하여 지각되는 인위적으로 조성된 경관 내지 사람의 손길이 다소라도 닿은 경관이고 물리적 요소뿐만 아니라 물리적 경관에 내재하는 인간과 인간의 활동까지도 포함하는 포괄적 개념이다. 풍경을 형성하는데 있어서 골격이 되는 것은 자연환경이고 자연환경의 형태를 결정짓는 것은 생태적 원리이다. 풍경은 눈앞에 보여지는 우리 생활환경의 일부분이므로 이와 더불어 살고 있는 주민의 손때가 묻으면서 형성된다. 따라서 풍경을 이해함에 있어서 필수적인 것은 거기에 살고 있는 사람이 누구인가 하는 것이다. 즉 사람에 대한 이해가 가장 중요한 것이다. 그래서 일까 박문종의 모든 그림에는 인물, 특히 여자가 항상적으로 존재한다. 풍경은 일차적으로 우리 눈앞에 펼쳐진 환경을 대상으로 하지만 결국 그것은 인간의 감수성에 관한 문제이며 나아가서는 인간의 인식방법에 관한 문제이다. 자연을 대하는 인식의 방법이 실제의 현실적인 대상을 통하여 바라보거나 실천되는 경우 우리는 그것을 풍경이라 부른다. 즉 풍경이란 자연과 대상에 대한 인간의 인식방법을 총칭하는 말이고 우선은 대상에 대한 시각적인 관계를 가리키는 말이지만 결과적으로는 자연에 관한 태도로 귀착되는 것이고 그래서 풍경은 일종의 자연에 대한 인식의 패러다임이다. 따라서 우리가 풍경을 말하려는 것은 감미로운 감정을 되살려 보자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점차 상실 되어 가는 가치관 그 자체에 주목하자는 것이다. 아마도 박문종의 작업도 여기서 크게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가 그려낸 이 농촌, 마을 풍경은 우리의 전통적인 전통마을이다. 꼬불꼬불한 곡선형길이 있고 논과 밭이 흐트러져있고 배산입지(背山立地)에 산수로 둘러쳐진 전통마을이 지형적 특색이 지도를 보듯, 그려져 있다. 그것은 전통적 동양적 시방식으로 처리되어 있다. 고정적이며 일원적인 서양의 시점에 비하여 유동적이고 다원적인 시점은 곧 동양의 자연관이나 인생관에 다름이 아니다. 인간의 시선을 넘어 가시적 공간 모두를 포괄한다고 믿는 무한한 자연 공간에 대한 이 생성적 시공간을 드러내기 위한 삼원시법이 그러하다.
    특히 채색이나 먹선, 붓놀림이 심하게 드러나지 않는 그림 그저 먹을 붓으로 찍어 쿡쿡 찍어 놓거나 슬쩍 얹혀 놓은 느낌, 굿이 그리거나 묘사하거나 꾸미지 않는 무심하게 끄적거리거나 풀어놓은 상태의 그림이다. 그리다 만 듯한 의도적인 어눌함과 소박미가 물씬거린다. 그것이 신난한 농촌의 일상적 삶과 운명적인 가난의 뼈마디를 애잔하게 흩고 있다. 동시에 텁텁하고 끈적한 흙 질감이 부드럽고 두툼하게 화면을 덥고 있어 그 질감의 여러 층차에 따른 심리의 굴곡이 다채롭다. 아울러 붉고 따스한 황토색과 회백색의 느낌이 함께 조율되어 오랜 벽화나 퇴락한 느낌도 부추킨다. 그림의 위계적 질서나 주종의 관계도 상실되어 모든 요소들이 동등한 관계로 나열되어 있다. 그는 결코 솜씨있게 그리지 않는다. 그림을 꾸미거나 조형의 지나친 꾸밈에 체질적으로 알레르기를 일으킨다. 이 촌사람 근성이 그의 그림을 생생하게 일으켜 세운다. 그의 그림그리는 과정이나 제작 태도 역시 논에 물대고 모심고 추수하는 모든 농사일과 같은 맥락에서 상통한다. 그림 그리는 일이나 세상 사는 일, 농사짓는 일이 한 몸에서 나온다. ♣


    박영택은 63년 서울에서 태어나 성균관대와 동대학원에서 미술사를 전공하고, 80년대 인사동에 있었던 금호미술관 큐레이터로 활동하며 주로 젊은 작가들을 소개하는 작업을 많이 했으며, 특히 광주지역 작가들에 많은 관심을 보여 왔다. 90년대 중반 그는 추계예대 겸임교수로 있다, 지금은 수원 경기대에서 강의한다. 최근 그는 전시카다로고가 매체에 작가들의 작업을 소개하는 글쓰기를 활발히 하고 있다. 작년 마음산책에서 젊은 작가들의 작업을 소개하는 책을 냈고, 이 글은 그 책에 쓴 글이다. 011-414-9078 wabhak@hanmail.net.

    박문종은 57년 무안 출신으로 일로에서 창작활동을 시작해 광주에서 연진회를 수학했고, 호남대와 조선대대학원을 졸업했다. 광주와 서울에서 두번의 개인전과 여러 단체전에 참여했고, 2002광주비엔날레에 출품했다. 웹사이트 전라도닷컴에 그가 '박문종의 그림농사'란 코너를 통해 글과 그림을 올리고 있다. 검색창을 통해 검색하면 최근 그의 작업에 대해 살펴볼 수 있다. 야후나 네이버 같은 겁색사이트들에서 그에 관련된 기사들을 찾아볼 수 있고, 주요 미술매체들에는 그에 관한 아티클이 별로 없다. 011)9601-8385, 이메일은 별로 사용하지 않는다.

    -- 박 영 택(미술평론가) [2004.0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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