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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도서정과 시대의식의 표출- 조각가 양두환 회고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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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대숲바람 작성일07-09-29 15:33 조회10,38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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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0년대 후반부터 70년대 초까지 불과 10여년 동안 목조각가로서 뚜렷한 자기정립과 굵직한 수상경력 등으로 불꽃같은 작품활동을 펼치다 30대 초반의 젊은 생애를 마감한 조각가 양두환의 회고전이 그의 모교였던 조선대학교 미술관에서 열렸다.

      조선대학교 개교 61주년과 미술관 개관 18주년 기념전 성격으로 쉽지 않은 대대적인 회고전을 마련한 것인데, 9월 17일부터 30일까지 약 보름동안 계속되었다. 이번 회고전에는 그 동안 여러 곳에 흩어져 있던 그의 조각작품들과 서양화, 크로키, 드로잉 등을 최대한 한데 모아 그의 삶과 예술세계를 조망하는 자리로 마련되었다. 특히 초기의 석고상과 석조, 그의 주된 작품세계인 목조 인물상과 새로운 주제의식으로 요절 전에 심혈을 기울였던 ‘상황’ 연작 등을 비롯, 각 작품들을 제작하기 전의 수없이 거듭했던 밑그림들을 한 자리에서 살펴 볼 수 있는 귀한 전시였다. 이번 전시 도록에 실린 작품세계 탐구의 글을 요약하여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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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조로 새겨낸 남도 서정과 시대의식

    조 인 호 (미술사, 광주비엔날레 전시부장)


      오랜 미술 문화전통에 비해 상대적으로 현대조각의 기반이 극히 취약했던 남도미술계에서 양두환(梁斗煥, 1941-74)의 등단과 짧은 생애 조각가로서 활동은 안팎의 주목을 끌기에 충분하였다. 27세 만학도로 뒤늦게 대학에 진학하여 1학년 때 <양지(陽地)>로 첫 출품한 [제3회 전라남도미술전람회](1967, 약칭 전남도전)에서 최고상을 수상하고, 1972년과 73년에는 [대한민국미술전람회](약칭 국전)에서 2년 연속 문공부장관상을 수상하는 등 혜성처럼 화려하게 빛나다 갑작스런 요절로 사라져버렸기 때문이다.


    풍요와 가족애를 담은 목가적 서정성

      조각가로서 양두환의 작품 활동은 10년이 채 되지 않는다. 초기의 석고상 몇 점을 제외하고는 목조가 대부분인데, 목재의 제한된 형태와 크기 때문이겠지만 인물입상, 모자상 또는 가족상을 주로 다루었다. 표현형식도 대체로 주어진 원기둥 형태 내에서 가능한 포즈를 연출하면서 필요에 따라 신체 골격을 따라 부분적인 덩어리감을 단순화하거나 표면에 목조 특유의 재질감을 남기기도 하였다.   

      양두환의 조각 작품은 크게 세 가지 유형으로 나눌 수 있다. 성장환경과 관련지을 수 있겠지만 목가적 서정성을 드러내는 경우와, 당대 시대현실에 따른 시의적인 주제를 다룬 경우, 그리고 특별히 주제에 얽매이지 않은 두상이나 인물상 등의 일반적인 작품들이다.      

      목가적 서정성은 한국 근․현대미술에서 가장 낯익은 소재이다. 왜냐하면 일제 식민지 시기에 향토적 서정주의로 전형화 되었고 그것이 [국전] 등 공모전을 통해 고착되기도 하였지만 일반인에게는 정서적으로 가장 편안하고 보편적인 소재였기 때문이다. 양두환 역시 자기 시대에 유행하던 인물의 단순화나 과장, 모더니즘 계열의 조형성 강조, 비정형 추상, 아니면 아주 아카데믹한 사실조각보다는 인간의 본래 감성을 따르면서 주관적인 단순 변형을 약간씩 곁들이는 구상조각을 주로 하였다.

      이러한 특징을 잘 드러내고 있는 작품이 `71년 [제20회 국전]에서 문공부장관상을 수상한 <풍요(豊饒)>인데, 원통형의 목재를 적절하게 활용하여 엷은 천속에서 드러나는 여체의 골격과 살붙임을 새겨내면서 표면에 끌 터치들을 남겨 질감의 변화를 나타내고 있다. 또한 <원시림>은 인물 위주의 다른 작품들과 달리 우거진 수목과 그 속에서 노니는 야생 동물과 모자를 갈쭉한 원기둥 형태 속에 맞춰 새겨낸 독특한 작품이다. 마치 아프리카 조각처럼 문명 이전 순수 생명의 세계를 굵직굵직하게 처리하여 반추상에 가깝게 조각해낸 작품이다.


    시사적 메시지의 상징적 형상화

      또한 시사적 메시지를 형상화시킨 경우로는 1972년과 ’73년의 <상황> 연작이 그 예이다. 규모나 주제, 작품구성형식에서 작가의 열망과 의지가 강하게 반영된 단연 돋보이는 작품들이다. 이 가운데 2년 연속 문공부장관상을 수상한 <상황 72>는 이전의 목가적 서정성이 담긴 작품들과 달리 형식과 주제 면에서 새로운 변모를 시도했던 것 같다. 애절한 표정의 두 남녀가 키만큼 높은 가림판을 사이에 두고 서로 마주 서있고, 비둘기를 든 남자 앞에는 여인을 향해 사내아이를 배치한 가족상으로 서로를 단절시키는 가림 장벽에는 쇠사슬을 오브제로 사영하여 메시지의 울림을 더 크게 하고 있다.

      이듬해의 <상황 73>은 장벽을 사이에 두고 아이를 안은 남자와 간절한 염원의 무릎 꿇은 여인을 마주 향하게 배치한 작품이다. 높이가 2.7m에 달해 단일 목조로서는 거대한 기념비적 조형물이면서 장대한 서사적 연출을 의도한 대작이지만, 그러나 과욕에 따른 인체구성의 불균형 때문인지 목표했던 국회의장상에 실패하고 입선에 그치면서 큰 좌절을 맛보게 되었다. 이 ‘상황’ 연작은 민족분단과 남북 이산가족 문제 해결을 위한 남북적십자회담(‘72-73)과 ‘7.4남북공동성명’(`72) 발표 등 남북간 정치적 교섭이 진행되고 있던 당시의 정치 사회적 최대 이슈를 적극적으로 다룬 야심작이었다. 즉, 목가적 서정성 위주의 구상조각이나 아카데믹한 인체조각, 순수 조형주의와 비구상 조각들이 일정한 세를 이루고 있던 시기에 사회적 주요 이슈에 대한 기념비적 조형작업으로서 ’70년대 말에 일어나 ’80년대를 풍미한 현실주의 미술의 앞 선 예라 할 수 있다. 


    남도 조각의 길라잡이

      양두환의 조각세계는 ’60년대 이후 훨씬 복잡 다양해지는 조형적 형식 속의 한국 현대조각 전체에서 볼 때 독보적이지는 않다. 왜냐하면 늦은 나이에 조각 학습과정 속에서 등단 한데다, 본격적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한 졸업 후 불과 3년여 만에 빛나는 영예들도 무상하게 돌연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목가적 서정성 위주의 이전 모자상 유형들과는 또 다른 시의성 있는 주제의식과 장대한 구성형식의 작품세계로 전환을 보여준 ‘상황’ 연작은 그만큼 작가 자신이나 주위의 기대를 새롭게 하는 작품들이었다. 서구 모더니즘 계열의 조형주의나 비정형 추상주의의 거친 파격, 아니면 아카데믹한 사실조각과는 다른 양두환의 남도 미술문화 전통에서 배어나는 회화적 감성과 당대 사회적 이슈에 대한 적극적 조형화 작업은 이후 후배들의 작품 속에서 여러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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