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 안에서 들여다본 것들; 노은영의 작품세계 페이지 정보 작성자 고영재 작성일22-12-02 11:42 조회1,524회 댓글0건 관련링크 이전글 다음글 목록 본문 노은영 <하나의 차원>, 2022, 캔버스에 유채, 130.3x162.2cm 자연 안에서 들여다본 것들; 노은영의 작품세계 ‘그렇게 흘러 지나간다’ / 2022.10.24.~11.13. 나주 예술의전당, 12.14~20. 서울 G&J갤러리 ‘자연스럽지 않은’ 징후들에 관해 회화를 전공한 노은영의 초기작업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도시풍경이다. 빌딩숲을 다시점으로 중첩시킨 풍경은 오롯이 인간에 대한 관심에서 비롯되었고, 욕망이 실현되는 공간, 혹은 인간의 다양성이 점철된 공간으로서 도시를 표현했다. 회색빛 아파트를 배경으로 우두커니 선 사람이나 우울한 표정의 군상에선 실존, 갈등, 불안과 같은 젊은 날의 치기 어린 감정들이 느껴진다. 본인에게 맞지 않은 옷을 입은 듯한 노은영의 회화 작업은 서른 즈음에 들어서며 차츰 변화를 맞는다. 작가 스스로 나를 알아가는 과정에서 대안을 찾게 되는데, 그는 “자연스러운 리듬에 치유가 있다는 것을 자연을 통해 부지불식간에 알게 되었다”고 설명한다. 유년시절부터 자연의 호흡법이 친근했던 작가는 약육강식의 메커니즘에 의해 돌아가는 문명과 자연을 동일선상에 두고 ‘자연스럽지 않은’ 현대 사회의 모습을 이내 자연을 통해 우회적으로 드러낸다. 이 지점에서 자연은 그저 감상이나 관조의 대상이 아닌 우리 삶의 현재를 역으로 투영할 수 있는 하나의 장치가 된다. 더불어, 표현의 범주가 개인을 둘러싼 갈등에서 사회적인 갈등이나 폭력으로 넘어가며 화폭은 이전보다 풍성해진다. 현대사의 비극이 서린 광주 주남마을과 4수원지, 전일빌딩, 그리고 현재적 시점에서의 재개발 현장,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부정적 진단, 가해자의 익명성이 지니는 모순 등 과거의 시간을 체감하지 못했거나 혹은 지금의 사회적 고민들에 둔감한 세대 안에서 느끼는 괴리감과 안타까운 감정들이 화면을 가득 메운다. 주남마을의 현현한 고목이나 허수아비, 무성한 수풀 속에 자리한 전일빌딩과 그 위의 헬기, 역시 숲 한가운데 자리하고 있는 크레인이나 집 잃은 재개발촌의 강아지 등, 노은영은 직설을 최대한 자제하며 포착된 특정 상황이나 의외의 조합을 통해 상징적 화폭을 구축한다. 빠른 호흡 속에서 잊히거나 사라져가는 것들, 공생하지 못하고 대립하는 우리 사회의 어두운 부면과 작가적 감정이 주조색인 암청색과 암갈색에 의해 더욱 배가되어 드러난다. 특히, 켜켜이 쌓아 올린 성실한 붓질에 의해 작가의 은유적 풍경은 특유의 밀도를 형성한다. 노은영 회화의 장점은 무엇보다 관찰력과 비유이다. 다채로운 각도에서 심리적 공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세밀한 관찰과 사유의 결과는 자연풍경이나 혹은 그 안의 사람, 사물, 행위에 빗대어져 보는 이로 하여금 생의 다양한 모습을 투영하게 한다. 뒷산에서 바라본 무등산 풍경을 통해 스스로가 넘어야 할 현실의 벽을 표현한 <한들 장막> 버리지 못한 욕망이나 마음속 짐을 쌓은 돌로 은유한 <불타오르는 중> 삿된 인연의 정리를 상징하는 <가지치고 담 쌓고>에서 보여주는 비유에 의한 자연은 단순히 유미적 시선에서의 ‘그려낸’ 풍경이 아닌 모종의 서사가 깃든 함축적인 풍경에 가깝다. 함께 존재함을 향해 개인적·사회적 서사와 그에 따른 갈등과 모순을 자연 풍경으로 응축해내는 과정 중에, 작가가 천착하고 있는 지점은 ‘공존’이다. 그가 말하는 공존은 꽃이 좋아 꽃을 꺾는 게 아닌, 꽃을 보기 위해 다시 그 꽃밭을 찾는 식의 함께 살아감을 의미한다. 부연하자면, 하나의 규정된 틀 안에서 어우러짐의 무조건적인 가치를 찾는 것은 아니다. 작업의 메시지를 유심히 살펴보면 개별성을 존중하는 선에서부터 작가가 말하는 공존은 모색된다. 작품 <풀잎에도 상처가 있다> <꼭꼭 숨어라 머리카락 보인다> <하나의 차원> <박새> <너를 만나러 가는 길> 그리고 가장 근작인 협업 영상작품 <베일의 시간> 등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것은 개체들 간의 다름과 이 다름에 대한 이해의 피력이다. 무성한 나뭇잎처럼 풍성히 존재하지도 못한 채, 외려 무수한 정보나 물음에 의해 드러나 버리는 나는 겨우 얼굴 하나 가리는 것에 만족한다. 개개의 돌이 쌓여 한 덩어리의 주체로 거듭나듯이 각각의 이해와 마음들이 모여 하나의 우주는 팽창한다. 각자 다른 방향으로 시선을 두는 박새는 그러함에도 하나의 자연 안에 자리하는가 하면, 나와 너의 온전한 교감의 길은 그 먼 거리만큼이나 아직 요원해 보인다. 노은영이 자연에 투영해온 심리적 기재는 무의식적인 자기 치유에 가깝지만, 어찌 보면 그 작업이란 것은 가장 본능적인 호흡에 의한 자연을 통해 우리가 삶에서 마주해야 할 현실을 바로 보는 과정일지도 모르겠다. 종국에는 현재이자 지금의 삶이다. 디스토피아적 의식이 돋보이는 <모든 사건은 나름의 의미가 있다>와 <여정> 연작에서의 직접적인 자기 투시, 생의 근원이자 순환의 삶을 상징하는 <생명의 땅> 시간성의 순기능이 엿보이는 <그렇게 흘러 지나간다>까지, 일련의 근작들에서 목도하게 되는 것은 현재에 대한 끊임없는 고민이다. 물론 그 고민의 이면에는 개인적인 트라우마가 잔존하고 작가 또한 여적 과정 중에 있기에, 그의 회화 안에서 작품 자체로서 쉬이 읽히는 작업적 친절함 따위는 기대하기 어렵다. “정답을 내리는 게 불편합니다. 하나의 정의는 없다고 생각해요. 저 또한 누군가 알려주지 않지만 삶의 의미를 알아가는 과정 중에 있는 것 같아요. 막막하지만 혼자서 관찰하고 사유하는 시간이 많습니다. 해석의 다양성과그저 던져주는 게 좋은 건지도 모르겠어요.” 작가의 표현 그대로 관람자에게 던져진 <머리 말리는 남자>에는 숨겨진 의미가 가득하다. 얼핏, 오래된 나와 새로운 나의 병치로 읽히는 머리 말리는 남자의 화면 속에는 모로 누운 사람의 다리가 자리한다. 보는 이의 관점에 따라 이 다리는 죽은 이의 그것이거나, 휴식을 취하는 사람, 더러는 어떤 사건의 당사자일 수도 있다. 화면 중앙의 밝은 색의 나무는 고정적인 해석이나 관념을 희석시키는 장치가 된다. 해석은 온전히 관람자의 몫이고, 경험치에 따라 작품의 서사는 삶이라는 하나의 과정 안에 놓이게 된다. 노은영의 작품세계를 관통하는 전체적인 기운은 분명 일련의 적막함과 고독이지만, 시간의 켜에 의해 쌓아올려진 작업들이기에 의외로 동적이며 치밀하다. 달리 보면, 쌓아올리고 뭉개지고 다시 쌓아올려짐으로 인해 불투명해지는 것이 아닌, 결국에는 모든 것이 자연스러움을 향해 가는 과정인지도 모르겠다. 물론, 열려있는 가능성의 와중에 작업세계를 이해할 수 있는 큰 틀거리는 필요해 보인다. 홀로 웅크리는 시간보다 교감의 시간을 갖기를 원하는 작가이다. 궁극에는 작품 자체만으로소통의 힘을 발휘할 수 있기를 바라본다. - 고영재 (미술비평·전시기획), [전라도닷컴] ‘고영재의 작가탐험’ 2022년 12월호 노은영 <주남 마을>, 2019, 캔버스에 유채, 130.3x162.2cm 노은영 <가려져 버린…잊혀져 버린…,>, 2020, 캔버스에 유채, 90.9x72.7cm,, <가지치고 담 쌓고>, 2021, 캔버스에 유채, 130.3x162.2cm 노은영 <꼭꼭 숨어라 머리카락 보인다>, 2021, 캔버스에 유채, 89.4x130.3cm 노은영 <홀로서기>, 2021, 캔버스에 유채, 72.7x60.6cm 노은영 <모든 사건은 나름의 의미가 있다>, 2022, 캔버스에 유채, 324.4x130.3cm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이전글 다음글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