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에서 길어 올리다; 설박의 작품세계 페이지 정보 작성자 고영재 작성일20-07-01 12:45 조회1,977회 댓글0건 관련링크 이전글 다음글 목록 본문 설박 < 산山,수水>, 2020, 화선지에 먹, 콜라주, 광목 (광주 신세계갤러리 개인전) 전통에서 길어 올리다; 설박의 작품세계 대학원 시절 전시답사 길에 접한 인왕산이 여전히 눈앞에 선명하다. 장마가 한창이던 6월 중순께 경복궁 너머로 보이던 인왕산은 정선의 <인왕제색도>를 그대로 떠올리게 했다. 비에 말갛게 씻긴 암벽은 묵중한 중량감을 뽐냈는데, 산허리에 걸쳐진 안개와 함께 압도적인 절경을 선사했다. 세속의 먼지가 씻겨 내려진듯한 경관은 보이는 그대로 가슴 벅찼고, 순간 정선의 인왕산이 중첩되면서 감탄 아닌 감탄을 쏟아냈던 경험이다. 여름날 장맛비를 머금은 인왕산의 실경뿐 아니라 도성을 품어 안은 산의 위용은 겸재의 대담한 필묵에 의해 아직 살아 숨 쉬고 있었다. 자연을 소유하거나 가두지 않고 삶과 함께하는 자연을 꿈꿨던 선인들의 자연관이 가장 잘 반영된 형식은 무엇보다 산수화이다. 농경이 주를 이루던 동아시아 문화권에서 자연이란 삶에서 가장 소중하고 절대적인 존재였기에, 옛 사람들은 자연을 인간처럼 살아 움직이는 존재로 인식했다. 기운생동(氣韻生動)을 작풍의 최고 목표로 삼아, 형상 안에 음양의 이치를 담고자 했을 정도로 산수화에는 자연에서 삶의 이치를 체득하고 그 속에 동참하려 한 선인들의 의식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다양한 기술과 시각적 현란함으로 무장한 현대미술 안에서 묵묵히 수묵산수의 미감에 탐닉해온 설박의 작업이 보는 이에게 편안한 눈맛을 선사하는 이유도, 그 작풍의 시원이 우리의 자연관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일 테다. 수묵의 맛과 멋 대학에서 한국화를 전공한 설박의 본격적인 화업은 이제 10년을 넘어가고 있다. 문인화가인 부친의 영향 탓에, 먹과 화선지는 설박 작가에게 숨 쉬듯 익숙한 존재였다. 전원의 정취가 어린 나주 금천면에서 나고 자란 작가가 수묵산수화의 형식에 천착했던 이유도 자연이 스스로에게 너무나 당연하고 익숙한 소재였기 때문이다. 졸업 이후 3년간 먹을 다루는 연습을 했던 그는 재료적 실험과 함께 다양한 기법을 모색하는데, 현재까지 선보인 콜라주 방식의 산수화는 이 시기에서 연유했다. 먹물로 염색한 화선지를 손으로 찢어 붙인 절제된 감성의 수묵산수는 전통과 현대의 정서를 아우르기에 적절했다. 먹의 농담을 자유자재로 조절하여 물들인 화선지를 반추상 형태의 파편으로 켜켜이 붙여, 결국에는 굽이굽이 휘몰아치는 산세의 형국을 만들어낸다. 화폭에서의 여백은 자연스럽게 하늘이 되고 흐르는 시내가 되고 강물, 그리고 폭포가 된다. 작가는 산의 무한한 깊이를 표현하기 위해 대상을 주로 중첩되게 구성하였고, 전통 회화의 투시법인 심원법과 평원법를 활용하여 무겁고 어두운 어조의 산수와 나직하고 평온한 느낌의 산수를 고루 제시하였다. 실재하는 풍경과 구체적인 형상을 염두에 두지 않는 설박의 수묵산수는 필시 관념산수(觀念山水)이다. 동양화에서 중시하는 사의(寫意)의 추구까지는 아니더라도 자연이 내재하는 정신적 가치에 매료된 그는 그저 본인 감성의 밑바탕에 깔려 있는 자연을 품고 싶었다. “하나의 주제나 사회적인 이슈보다 동양적인 사유방식, 그리고 인간과자연에 관심이 많았어요. 표현의 압박이 있었지만 담백하게 산수만 표현하고 싶었습니다.” 자연적인 성질의 재료와 흑백의 절제된 색이 주는 편안함과 안정감은 설박 회화의 큰 장점이다. 더불어, 특정하지 않은 주제와 비설명적 화폭은 보는 이의 시선에 따라 다양한 해석의 여지를 남긴다. 관람객은 그의 작품을 보며 메시지의 강요 혹은 시각적 공해가 주는 피로감에서 잠시나마 벗어날 수 있다. 먹과 종이라는 한정된 재료, 그리고 흑과 백이라는 지극히 제한된 색으로 특유의 감성을 전달하는 일은 녹록지 않다. 먹물 염색 과정에서 생겨나는 우연한 번짐의 효과나 농묵과 중묵 · 담묵을 자유롭게 구사하는 작가적 자신감에서 표현의 힘은 점차 배가되어 왔다. 평면성을 담보하는 회화 형식에 국한하지 않고, 종종 크고 작은 구성적 실험을 단행한 설박은 파노라마 형태의 작품 설치로 관람자에게 극적인 서정을 부여하기도 했다. 2013년 개인전 <어떤 풍경>에서는 전체적인 풍경을 한 화면에 담지 않고, 하나로 이어지는 경관을 일곱 개의 패널에 나눠 담았다. 대작 규모의 개별 작품을 천장에 일정한 간격을 두고 매달아 관람객이 작품과 작품 사이를 노닐 수 있도록 유도했는데, 이는 보는 이로 하여금 와유(臥遊)의 멋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한 구성이었다. 지속과 실험의 경계에서 작가는 10년의 작가생활동안 총 열 번의 개인전을 치루며 꽤 바쁘고 성실한 시간을 지내왔다. 최근에 발표한 <불완전한 풍경에 대하여>전이 근 5년만의 작품발표이다. 긴 공백만큼이나 설박의 근작에서 두드러지는 경향은 형식적 실험에 고군분투하고 있다는 점이다. 전통회화에 대한 애정과 감성은 잃지 않되, 보다 근원적인 성찰을 꾀하려는 작가는 주요 재료로 천을 이용하고 있다. 주변 환경에 의해 자유자재로 그 형태나 이미지에 변화를 줄 수 있는 천은 부드러운 성질만큼이나 다양한 상징성을 지닌다. 바람, 호흡, 필선, 기운, 유연함, 포용 등 자연의 다채로운 성정을 대변하는 천은 프레임 밖의 산수를 표현하는 데 적합한 소재이다. 기존의 평면작품과 어우러지는 설치작품과 함께 먹물 염색한 광목천을 한 공간 안에 하나의 덩어리로 늘어뜨린 대규모의 작품까지, 본 전시에서 작가는 나름의 파격을 시도했다. 흑과 백이 주조색이던 화면에도 상징적인 채색을 가함으로써 변화를 주었다. 자연을 상징하는 흑백의 곡선 드로잉에 날카로운 느낌의 직선의 면을 채색하여 모서리에 배치했다. 자연과 인공의 어울림, 혹은 자연의 질서에 반하는 우리 삶의 긴장감을 비유적으로 드러내어, 전시 주제 그대로 ‘불완전한 풍경’을 풀어 헤쳐 놓았다. 현대미술 안에서 산수화의 가치와 의미, 넓게는 현대라는 지금의 삶에서 근원성을 지닌 자연이 시사하는 바가 무엇인지, 또한 창작의 이름으로 어떠한 지향점을 두고 나아가야 하는지 작가는 새삼 고민하는 과정 중에 있다. 작가와의 짧은 대화를 끝내며, 앞으로 몇 년 간 더 긴 공백이 있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창작자의 작업적 고민은 충분히 가치 있으며, 더디 가더라도 이 또한 작업의 한 과정이다. 항상 그렇듯, 설박 작가에게 앞으로의 작업을 물었다. 그는 화려한 미사여구 없이 현재 자신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이야기했다. “유명세보다는 나를 꾸준히 보여줄 수 있는 작업이 무엇인지 고민하고 싶어요.” 멀리 가기 위해 쉬어간다는 말이 있다. 내 삶을 내 자아를 깊이 투영하여 종국에는 타인의 삶과 내면도 어루만질 수 있는 진솔한 화폭을 기대해본다. - 고영재 (독립 큐레이터, 전라도닷컴 ‘고영재의 작가탐험’ 2020년 7월호) 설박 <어떤 풍경>, 2013, 송은아트큐브 개인전 설박 <어떤 풍경>, 2018, 화선지에 먹, 콜라주, 100x170cm 설박 <Unknown Scenery>, 2019,_화선지에 먹, 콜라주,_20×20cm 설박 <불완전한 풍경에 대하여>, 2020, 광목에 먹 설박 <유위자연>, 2019, 천에 먹, 해동문화예술촌 전시 중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이전글 다음글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