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과 소외로부터’ 윤준영의 작품세계 페이지 정보 작성자 고영재 작성일21-08-28 13:01 조회2,070회 댓글0건 관련링크 이전글 다음글 목록 본문 윤준영, <무저갱>, 2020, 한지에 먹, 콩테, 채색, 120X120cm ‘불안과 소외로부터’윤준영의 작품세계 섬; 닫힌 공간 한국화가 윤준영은 나와 사회와의 간극에서 야기되는 고독과 상실감을 이야기한다. 한지 위에 먹과 콩테를 올리는 작가의 화폭은 무채색의 재료가 주는 느낌에서 감지되듯 꽤 함축적이고 절제되어 있다.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라는 주제로 만든 기획전에서 윤준영의 작품과 처음 만났었다. 대학을 갓 졸업한 예비 작가들을 위해 기획한 자리였지만, 젊은 시선들이 전달하는 주제와 문제의식은 예상보다 흥미로웠던 기억이다. 윤준영의 초기작에서 두드러지는 형태는 ‘섬’이라는 이미지로 규정된 한 덩어리의 구조체였다.작업적 서사의 출발은 사회 안에서 체감되는 소외와 불안, 갈등, 그리고 단절 등으로 작가는 우리가 살아가는 이 사회를 소통 부재의 견고한 요새로 인식했다. 어느 누구도 바라보지 않고 어느 누구에게도 귀 기울이지 않는 하나하나의 섬이 사회라는 커다란 섬을 더욱 견고하게 만든다고 생각했다. 공동체의 물리적 형태임을 역설하는 집합공간들은 실은 두꺼운 벽과 벽으로 고립된, 의미 그대로 단절된 공간들의 응축이다. 얼핏 어느 고대국가의 도시 같기도 한 밀집된 건축물들은 푸르스름한 창공에 부유하는 형국으로 자리한다. 공기의 흐름이 느껴지지 않는 공간과 공간들의 집적은 노예 수송선 안에 과적됐던 이들처럼 개별성이 거세되어 있다. 이러한 구성상의 은유와 더불어 초기 작품인 <섬> 시리즈나 <Laputa> <Island> 등에서 엿보이는 표현방식은 다소 의식적이다. 고전적 재료인 콩테의 물성과 색감은 빛이 느껴지지 않는 검은 공간들을 부연하기에 적절한 재료였을 테다. 경량의 한지에 수묵으로 엷게 깔린 배경 위로 구축된 무거운 질감의 콩테는 건조한 기운의 화풍에 비해 극적인 효과를 자아낸다. 작업이 본격화되면서 윤준영의 작품에는 상징성이 배가된다. 초월과 자유를 암시하는 새와 고독의 현재를 비추는 의자, 각기 그 호흡법은 다르지만 모두가 살아있는 이들의 삶터인 빌딩숲과 자연숲, 그 숲들과 외따로 떨어져 있는 초소와도 같은 건축물, 관찰하는 주체, 혹은 이방인으로서의 나의 투영이기도 한 개의 모습 등 요소요소에 상징적 도구들을 부가하며 이전보다 더욱 시적인 화면을 구성한다. 회색빛의 거대한 섬에 속박되어 날지 못하는 새들, 그리고 그들의 버거운 날갯짓, 철저히 고립된 자아의 의식 저편에는 여전히 어우러지기 힘든 세상이 자리하고, 욕망으로 점철된 듯 뒤엉킨 개개의 호흡은 잿빛 구름덩어리와 같은 형상으로 한 데 피어오르고 있다. 2015년의 작품 <이방인>과 <집적된 공간>에선 큐브 형태로 단순화된 건축물들이 등장하는데, 작가는 이 시기 즈음부터 실재적 공간의 구체성이 아닌 공간이 담보하는 상징성에 천착하여 작품의 형식과 내용에 밀도감을 준다. 입방체의 면면에 조그맣게 뚫려 있는 창은 나와 타자를 연결하는 유일한 창구이지만, 협소한 크기의 창문에서 서로간의 교감은 여의치 않아 보인다. 형식적인 감정만이 흐를법한 공간의 틈새는 기계적인 소통을 암시한다. 기계적인 소통은 획일화된 가치와 시선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질서 밖의 개인 외부세계와 나에 대한 기록으로서 등장했던 작가의 구성된 공간은 구체적 서사성에서 함축성으로 그 성질이 변화되어 왔다. 설명적 요소를 걷어냄으로써 사유의 폭을 확장시켰다고 볼 수 있는데, 응축된 공간은 분절되고 외부로부터의 갈등요소는 보다 개인적인 영역으로 집중되었다. 미로 형태로 구축된 벽과 벽으로 이어진 구조물은 2015년 해외 레지던시를 계기로 구체화되었다. 작가는 각기 다른 국적과 환경이라는 고유의 조건을 넘어서 개개인이 사회를 마주하면서 느끼는 공통의 감정들을 도식화하였다. 전체라는 틀 안에서 무력화된 개인의 심리를 보여주는 미로는 제각각 꺾인 벽들로 인해 출구를 찾기가 어려워 보이지만, 그 안에는 드문드문 희망을 암시하는 기호들이 자리한다. 작품 <Home>과 <곳> <낯선 구조>에서 볼 수 있는 별빛이 박힌 푸르스름한 밤하늘과 달, 하늘로 힘차게 도약하는 새들, 미로 속에 깊숙이 위치한 유년시절의 한옥집 등 근원적인 평온과 기원으로서의 대상들이 화면에 색다른 숨결을 부여한다. 굽이치는 검은 물결의 바다와 풍성한 나무숲, 황량해 보이는 산과 들판 등 윤준영이 표현하는 자연은 경외의 감정 이전의 직관적인 두려움에서 비롯되었다. 2018년의 작품 <반짝이는 빛 속에 있기를 바랐는데 매일 까만 어둠을 헤맨다>에선 거대한 산과 자그마한 집이 극렬한 대조를 이룬다. 사회를 향한 불안과 두려움이 없던 시절로의 회귀를 이야기하는듯하지만 돌아가는 길은 아득히 멀게만 느껴진다. 작가만의 대조법은 검은 바다와 무성한 수풀 한 가운데 서 있는 희고 유약한 구조물에서도 돋보인다. 작품 <광활한 적막> <가둔 밤의 정원> 등의 작품에는 개별적 존재를 의미하는 구조물이 서있다. 외부세계의 무한한 힘에 짓눌려 있는 이 구조물들은 자기만의 방, 혹은 진지(陣地)로 이해된다. 같은 주제의 표현이지만 도식화된 미로가 주지적이라면 검은 바다와 수풀, 존재를 잠식하는 거대한 달은 자못 주정적이다. 작가는 이러한 형식적 변화의 틀을 두고 “자연에 홀로 놓여 있는 상태에 느낄 수 있는 두려움이나 위압감은 사회 안에서 한 개인으로서 느끼는 감정과 매우 닮아있다.”고 설명한다. 근작인 <무저갱>과 <검은 물>에서 이전의 검은 물결은 더욱 거대하게 화면을 잠식한다. 망망대해와 같은 의식의 바다 한 가운데에는 인간을 상징하는 개별적 존재가 여전히 위태롭게 자리한다. 품어낼 수 없었던 물결을 힘겹게 가둠으로써 사회라는 큰 공간 안의 내가 아닌 내 안의 공간을 새로이 만들기도 한다. 의식의 저 깊은 구덩이는 실제로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기에 갈 수 없는 ‘그 곳’을 떠오르게 한다. 푸코가 규정하려했던 반(反)공간으로서의 유토피아처럼 “자기 이외의 모든 장소들에 맞서서, 어떤 의미로는 그것들을 지우고 중화시키기 위해 마련된 장소들.”(미셸 푸코, 헤테로토피아)과 유사한 자기 정화의 시공간을 윤준영은 이야기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작가가 바라고 있는 작업을 통한 ‘매개’의 역할은 당연하게도 나와 타자의 깊은 성찰에서부터 비롯된다. 우리 모두 어디 즈음에 서 있는지 고민해보는 시간이다. - 고영재(독립큐레이터) / 전라도닷컴 [문화야 놀자] ‘고영재의 작가탐험’ 2021년 9월호 연재 윤준영, <breathe>, 2013, 한지에 먹, 콩테, 채색,_162X130cm 윤준영, <이방인의 집>, 2016, 한지에 먹, 콩태, 채색, 97.5x132cm 윤준영, <가끔은 끝도 없이 적막해졌다>, 2017, 한지에 먹, 콩테, 채색, 78X100cm 윤준영, <반짝이는 빛 속에 있기를 바랐는데 매일 까만 어둠을 헤맨다>, 2018, 한지에 먹, 콩테, 채색, 97X130.3cm 윤준영, <소란한 침묵>, 2018, 한지에 먹, 콩테, 채색, 97X130.3cm 윤준영, <There>, 2019, 한지에 먹, 콩테, 채색, 110X100cm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이전글 다음글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