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규채(羅奎埰) 사진전 ‘진공묘유 (眞空妙有)’ 페이지 정보 작성자 윤 익 작성일19-04-15 09:18 조회2,236회 댓글0건 관련링크 이전글 다음글 목록 본문 라규채(羅奎埰) 사진전 ‘진공묘유 (眞空妙有)’ 2019. 04. 02 – 05. 31 / 무각사 로터스갤러리 사진은 기억을 위한 예술이다. 기억은 우리가 잠시 잊고 있었던 진실을 인식하게 한다. 사진에 담겨진 모든 대상(對象)과 풍경(風景)은 지나간 특정의 시간이다. 사진은 철저히 어떤 순간의 현실 자체를 담아내며 과거로 환원한 실재의 시간과 공간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200년이 조금 안 되는 짧다면 짧은 역사이지만 인간은 사진을 발명하고 그 이후 많은 것을 기록하였다. “카메라”라고 불리는 마술 상자는 이러한 이유로 오늘날 우리에게 시간의 비밀을 통하여 다양한 추억과 설렘을 안겨주었다. 과거의 사진을 보면 우리의 일상과 삶의 모습이 얼마나 변화하였는지 그리고 오늘 우리가 어디에 존재하는지 여실하게 보여주기 때문이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다양한 사진을 많은 매체를 통하여 접하고 있다. 개인마다 소지하는 스마트폰을 통해서도 지구촌 곳곳의 소식과 상황을 사진이미지를 통하여 확인 할 수 있다. 처음 사진이 소개되었던 당시의 상황에 비추어 보면 혁명에 가까운 상황으로 그 용도가 발전하고 있다. 사진이 보급되던 초기시절에 많은 화가들이 사진으로 인하여 좌절하고 회화의 미래를 걱정하였다. 하지만 이는 사진과 회화가 서로 다른 영역과 언어로 그 역할과 기능을 하는 자극제가 되어 오히려 각자의 영역이 다르게 발전하게 되었다. 회화에는 실제성을 담아내는 기능에 있어 사진보다 사실적이지 못하며 주관적인 요소가 개입되는 복합적 단점이 존재한다. 한편 사진의 장점과 약점은 시간에 있다. 정지된 시간을 거짓 없이 담아내는 기능은 순환하고 생성하는 세상의 섭리(攝理)에 지나치게 단편적이기 때문이다. 수많은 화가와 사진가들이 이러한 한계점을 극복하는 노력을 하였고 이는 미술사를 통하여 증명이 되었다. 사진이라는 매체에 담겨있는 이미지는 어느 정도의 진실을 말하는 것일까? “순간” 이라는 시간의 멈춤과 빛의 만남으로 갇혀있는 평면적인 이미지를 우리는 만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러한 질문이 또 다른 질문과 답으로 이어지는 끝없는 시도로 인하여 사진가들은 실현 가능한 다양한 가능성을 보았으며 이는 진실의 추구라는 큰 목적으로 전개되고 있다. 이를 통하여 예술은 언어 이전의 언어처럼 본질을 향한 노력으로 그 한계성을 극복하고 있는 것이다. 담양(潭陽)에서 태어나 자라고 작업을 하는 라규채(羅奎埰) 사진가는 이러한 사례의 대표 작가이다. 작가는 고교 2학년 시기에 담임이었던 신영우 선생님을 통하여 처음으로 사진을 접하였다. 당시 감수성이 예민하고 질문이 많던 시기에 일과를 제외한 모든 시간을 사진 작업에 열심이던 그의 담임선생님은 그에게 사진에 관한 새로운 생각을 갖게 하였다. 문명과 기술의 조합이며 아름다운 추억을 전하는 사진을 넘어서는 무언가 일생을 통하여 이루고 싶은 목표를 희망하게 된 것이다. 그는 훗날 사회에 나와 직장을 잡고 첫 봉급으로 카메라를 구입할 정도로 사진의 매력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고 독백한다. 어떤 소임을 위하여 일생을 통해 정진하는 노력과 자세는 그에게 사진작가로서 이루고자 하는 스스로의 완벽함을 추구하고 있는 내면적 수행(修行)의 과정으로 보인다. 과거 선비들이 붓을 들어 자신을 수양하는 목적으로 그림과 글을 행하던 모습처럼 그는 사진 작업을 통하여 그의 세상을 마주하며 자신을 들여다본다. 오늘날 그의 사진은 관람자들에게 보여주는 사진이 아닌 그만의 세상을 찾고 담아내며 의미를 부여하는 철학과도 같은 작업으로 진행되고 있다. 그의 사진에 담겨진 풍경(風景)은 단순한 감상의 대상이 되는 자연이나 세상의 모습을 초월하여 세상의 구조적 순환을 가능케 하는 원리(原理)에 접근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불과 물 그리고 나무와 쇠, 흙으로 이루어진 우리의 존재 이전의 세상을 보여주는 신비로움의 대상으로 기억 이전의 기억을 바라보게 하는 숭고한 작업이다. 작가는 그의 사진작품을 통하여 본질을 본다는 것은 사물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 내면의 인식을 제안한다. 불교에서 말하는 연기법(緣起法)으로 인하여 세상은 완벽하게 조화로우며 모든 것은 서로와 상관하고 생성하며 변화한다. 사진이 갖는 기계적 속성에 의한 순간만을 정확하게 찍어내는 방법으로는 이러한 생명을 담아내는 작업은 불가능하다. 우리의 세상은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로 구성되어 있으며 전자의 보이는 세계는 그저 결과론적 의미로서 외형(外形)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일상에서 바라보는 세상은 언제나 인간의 가늠을 능가한다. 한편 이미 세상은 완벽하며 그 조화로움과 아름다움은 언제나 우리를 겸허하게 한다. 영원히 지속되는 생명의 순환에서 인간은 매우 나약한 존재이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이러한 이유로 라규채 작가는 이를 경험하고 인정하며 자신만의 고유한 언어로 그 해결점을 모색하게 되었다. 그는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사진가는 프랑스출신 “베르나르 포콩”이라고 한다. 포콩은 한때 전 세계를 대표하는 메이킹포토의 선구자이었다. 그러던 그가 어느 날 돌연 더 이상 사진작업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일은 사진계에 잘 알려진 일이다. 그는 이후에 그만의 새로운 시도로 사진을 해석하고 접하는 자신의 예술적 업을 새롭게 이어나가고 있다. 라규채 작가 역시 오늘날 새로운 한계에 도전하며 그 새로운 출발점에 위치하고 있다. 베토벤이 음악가의 생명인 청력을 상실하고 자신의 한계를 초월하며 음악을 창조하듯 그는 사진의 절대적 조형언어인 정지된 시간의 시각적 이미지를 과감하게 초월하여 눈으로 보는 사진 이상의 작품에 도달하고 있다. 이제 그의 작품에는 대상과 풍경을 감싸는 비어있는 공(空)의 공간에 가득한 대기의 잔잔한 생명의 호흡과 울림이 소리로 들려온다. 이번 전시의 주제인 진공묘유(眞空妙有)의 참다운 의미가 가슴으로 느껴진다. 흑백사진이며 거친 입자로 대기원근법(大氣遠近法)을 통한 시간과 공간이 응축되어 화면 가득한 비움과 채움의 조화가 사진의 몸을 빌려 세상을 이루고 있다. 무려 30여년을 주제로 보여주던 대나무, 한국을 상징하는 소나무 그리고 잔잔한 풍경으로 전개되는 이번 작품들은 대상을 담아내는 작업보다는 대상과 결별하는, 즉 버리고, 비우는 작업들의 결과물이다. 마치 느긋하게 눈을 감고 마음의 눈으로 세상을 경험하는 심상(心象)으로 다가오는 작품들은 우리에게 새로운 인지능력을 느끼게 한다. 작품들은 흑백의 이미지를 초월하여 시각과 청각 그리고 촉각으로도 느껴지기 때문이다. 정의하고 규정지으며 분석하는 오늘날 서양식 사고의 인식론에서 거리를 두며 담담하게 보아야 진실에 눈을 뜨게 하는 이번 작품들은 보다 큰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자연의 섭리(攝理)를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 윤익 (미술문화기획자, 조형예술학 박사)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이전글 다음글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