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재, 산이 되다’ 허백련과 연진회 기획전 페이지 정보 작성자 황유정 작성일19-07-19 11:02 조회3,198회 댓글0건 관련링크 이전글 다음글 목록 본문 광주시립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의재, 산이 되다' 전시 ‘의재, 산이 되다’ 허백련과 연진회 기획전 2019. 07.10-10.10 / 광주시립미술관 전통 위에 꽃 핀 호남 남종화, 변화와 계승을 생각하다 연진회로 이어진 의재毅齋 허백련의 정신과 예술 광주시립미술관은 호남미술의 주요 흐름을 다루는 아카이브 프로젝트를 매년 진행함으로써 지역 미술사를 연구하고 재정립하는 기회로 삼고 있다. 광주‧전남 지역은 소치 허련의 운림산방에서 이어진 유서 깊은 남종화의 전통이 오래도록 남아 있는 곳이다. 우리 지역의 뿌리 깊은 남종화맥은 유형‧무형의 소중한 자산으로, 그동안 많은 연구 논문과 박물관‧미술관 전시를 통해 지속적인 조명을 받았다. 특히 근대 이후 남종화 부흥의 구심점이었던 의재 허백련이 1930년대 광주에 안착함으로써 70년대 말까지 허백련과 동시대를 공유한 시민들은 자연스레 전통 수묵에 대한 관심과 열기가 뜨거웠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출발한 서화동호모임 <연진회>는 사승관계로 재결성된 후기 연진회에 이르기까지, 허백련과 함께 남종화의 정신과 예술을 계승한 단체로써 광주화단의 큰 축이었음은 알려진 바 있다. 그런데 7,80년대까지 지역화단에 미친 연진회의 조명에도 불구하고 당시 연진회를 거쳐 간 작가들 중 소수 몇 명을 제외한 대부분이 자료와 활동기록, 대표작 등이 유실되거나 적극적인 수집정리가 되지 않고 있다. ‘예향 광주’의 견인차였던 남도 한국화단의 자료가 지역 서양화단에 비해 크게 미비한 상태임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이번 전시 “의재毅齋, 산이 되다”展은 춘설헌 제자들의 인터뷰와 서간, 영상자료, 사진 등의 아카이빙을 통해 의재 허백련이 추구한 정신과 예술을 보여줌으로써 ‘의재 허백련’을 인문의 땅 광주의 대표적 자산으로 새롭게 부각시켜 보고자 한다. 더불어 일제 강점기부터 해방공간, 한국전쟁이후 80년대에 이르기까지 전통 남종화의 정신을 잇고자 한 <연진회>를 시발점으로 남도 한국화단의 폭넓은 자료구축의 계기가 되길 바라며 남도 수묵화에 대한 관심도 불러일으키고자 한다. 의재, 실천적 삶을 산 예술가 남종화의 마지막 거목으로 일컬어지는 허백련은 무등 자연의 일부가 되어 경계가 없이 사유하는 철학가이자 예술가로서, 민중을 걱정한 실천 운동가로서 삶을 견지한 거인이다. 이번 전시에서는 공간을 크게 세 개로 나누고, 첫 번째 공간은 허백련의 문기 넘치는 서화(書畫)를 중심으로 의재 정신과 예술을 함축적으로 느낄 수 있는 사유공간으로 마련하였다. 특히 최초로 공개되는 작품인 대작 <묵포도>(1932)는 농익은 포도 고목의 깔깔한 잎사귀와 구불구불한 줄기가 뒤엉켜 화면을 장악하고 있다. 1938년, 의재 허백련을 중심으로 36명의 서화 동호인들이 참여하여 창설한 <연진회(鍊眞會)>는 ‘참(眞)을 연마하여 인간을 도야 한다’ 는 목적으로 출발한 후, 1939년 광주시 금동에 연진회관을 마련함으로써 남도의 서화가들을 모으는 구심점 역할을 했다. 초기에 결성된 연진회는 1944년까지 지속되었으나 해방공간과 한국전쟁으로 인해 회원들이 뿔뿔이 흩어짐으로써 명맥을 잇기 어렵게 되었다. 허백련은 해방 이후 피폐된 농촌을 보고 농촌을 근대화시켜야겠다는 강한 의지로 농촌 부흥운동에 뛰어든다. 일제 강점기에도 창씨개명을 하지 않은 민족주의자 허백련은 우리 시대에 추구해야 할 이념으로 ‘홍익인간(弘益人間)’을 주장했으며, 민족혼을 되살리고자 단군신전 건립을 추진했다. 당시 많은 사람들에게 써서 나누어 준 <弘益人間> 글씨와 함께 삼애정신(三愛情神 : 愛天, 愛土, 愛家)을 바탕으로 농촌 부흥운동을 한 시기의 작품 <日出而作>(1954)이 전시되는데, 이 작품은 허백련의 현실을 반영한 이상적 농가풍경을 잘 보여준다. 연진회, 열정의 시대 1946년, 허백련이 작업 공간으로 무등산에 춘설헌을 마련하고 거처를 옮긴 뒤, 초기의 연진회는 한동안 공백기를 갖지만, 구철우, 허행면, 최한영을 비롯한 서화인들이 다시 뜻을 모아 광주 호남동의 완벽당 화랑에서 연진회를 재결속하게 된다. 두 번째 전시 공간은 이 시기의 연진회 제자들의 인터뷰 영상 및 주요 사진자료와 작품 등을 전시함으로써 허백련의 지도 방식과 제자들에게 미친 정신적 감화, 당시 정치‧문화계 인사를 포함한 다양한 교류의 폭 등 직접적인 사료를 제공한다. 두 번째 공간의 전시작가는 국전 등을 통해 일찍이 두각을 나타냈던 옥산 김옥진(1927~2017), 희재 문장호(1938~2014), 금봉 박행보(1935~ ), 녹설 이상재(1930~1989)를 비롯, 동작 김춘, 오죽헌 김화래, 인재 박소영, 월아 양계남, 화정 이강술, 계산 장찬홍, 우헌 최덕인, 직헌 허달재 등 현재 작품 활동을 하고 있는 작가를 중심으로 했으며, 그들의 60~70년대 작품과 변화한 근작까지 전시된다. 당시 작가들은 시대의 흐름에 따라 전통 수묵에 대한 고민이 깊었고, 현대화를 위해 전통에 뿌리를 두되 주제와 재료, 색채에 있어서 변화를 꾀하는 작가들도 많아졌다. 춘설헌, 인문학의 요람 마지막 세 번째 공간은 허백련의 화실이었던 춘설헌을 상징적으로 재현한 공간이다. 무등산 증심사 계곡에 위치한 춘설헌은 독립운동가 석아(石啞) 최원순(1891~1936)이 신병을 요양하던 곳으로, 오방(五放) 최흥종 목사가 물려받아 오방정(五放亭)으로 불렸으나 1945년 허백련이 인수함으로써 당호를 춘설헌(春雪軒)이라 하였다. 춘설헌은 화가와 문인들의 왕래가 빈번했던 인문학의 요람으로, 차와 독서와 그림으로 정신을 수양해 간 허백련의 아취가 흠뻑 배인 공간이다. 허백련에게 직접 그림지도를 받기 위해 찾아 온 제자들은 이곳에 머무르면서 체본과 방작을 기본으로 공부하고, 특별한 날은 합작을 해서 작품을 서로 나누기도 했다. 당시 월아 양계남, 우봉 최영국, 치암 남경희, 계산 장찬홍이 합작하고 허백련이 제(題)를 쓴 합작도와 양계남의 그림에 지운 김철수가 제(題)를 쓴 합작도 등을 만날 수 있어서 춘설헌의 운치를 새롭게 느끼게 한다. 남도 수묵화의 미래를 가야 할 3세대 한국화가 변화무쌍한 현대미술의 벽에 부딪혀 전통 문인화와 수묵화는 영역이 점점 협소해 지고, 지난 시대의 예술로 치부되기 십상이다. 하지만 의재 허백련은 ‘개성은 어디까지나 전통 위에서 꽃피어야 하며, 처음부터 자기 독단의 개성은 생명이 길지 못해서 전통을 철저하게 갈고 닦아야만 자연 자기 것이 생기게 된다’ 는 신념으로 자신의 예술을 통해 평생 실천해 왔다. 애정 깊은 전라도 산천을 주로 그렸던 허백련과 함께 역사를 걸어 온 연진회는 산처럼 큰 스승의 삶과 정신을 흠모하며 열정의 시대를 일구었고 호남한국화단의 지류를 형성했다. 시대의 변화에 따라 대중들의 호응을 받지 못한 전통 수묵화가 점점 위축돼 가는 상황이 되면서 많은 고민과 함께 최근 ‘전남수묵비엔날레’의 개최 등 침체된 수묵화단의 활성화를 위한 노력이 일어나고 있다. 전통 남종화의 뿌리가 있고, 의재 허백련을 통해 남화 정신의 계승이 가능했던 광주‧호남지방의 특수성은 큰 장점임이 분명하다. 더욱이 함축적인 문인화는 현대성이 큰 화목이다. 3세대 한국화가들이 남종화 정신을 놓지 않고 우리 지역의 특수성을 잘 살려나간다면 수묵화단의 미래를 기대해 볼 수 있을 것이다. - 황유정 (광주시립미술관 학예연구사) 허백련 <묵포도>. 1932 .한지에 수묵담채. 135x270cm 허백련 <日出而作>(부분). 1954. 한지에 수묵담채. 132x116cm.전남대박물관소장 변관식 <강변산수도>. 비단에 수묵담채. 33x112cm. 광주시립미술관 소장 정운면 <산수>(1932), 구철우 <묵매>(1970), 허행면 <불로장춘>(1942) 제1회 연진회원전 기념사진. 1939 연진회 미술원 제1기 졸업 기념사진. 1979.02 허백련과 연진회 제자들의 합작도 <이양신성>(1970년대) 등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이전글 다음글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