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을 기록하다 : 이세현의 작품세계 페이지 정보 작성자 고영재 작성일19-08-23 10:02 조회2,869회 댓글0건 관련링크 이전글 다음글 목록 본문 이세현 <Boundary_軍艦島>, 2017 시간을 기록하다 : 이세현의 작품 세계 “우리는 수없이 많은 사건과 시간을 지나 지금에 살고 있습니다.” 이는 ‘옥매광산, 강제징용, 해남, 광복절’이라는 단어에 해시태그가 붙여진 이세현 작가의 SNS에 걸린 문구이다. 사진 찍는 젊은 작가 이세현은 제대로 역마살이 낀 듯, 전국의 ‘유의미한’ 장소를 누빈다. 바다를 건널 기회가 생길 때에도 이내 그 곳의 의미 있는 장소를 찾아 나선다. 역사적 장소에 집착하는 사진가의 속내가 궁금하다. 내 몸과 같은 카메라 올해 서른여섯 먹은 이세현은 대학에서 사진을 전공했다. 작가의 작업 키워드는 단연 관찰과 기록이다. 처음 카메라를 들 때부터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는 <에피소드(episode)> 시리즈에는 ‘아무개’의 소소한 일상이 보는 이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영화 속 스틸 사진과 같은 프레임에는 삶의 공허함이 배어 있지만, 무심히 텅 빈 공허함이 아닌 일상이라는 이름으로 사색할 법한 생의 고민들이 화면 곳곳에 배어 있다. “어쩌면 일기와도 같아요. 동시대를 같이 느끼면서 살아가는 우리들이 삶 안에서 바라보는 문제들은 아마도 비슷할 겁니다.” 빛바랜 흰색 런닝을 입은 채 모로 누워 있는 청년의 뒷모습이 슬픈 이유는, 작품을 마주하는 이들 또한 그러한 힘든 젊음을 살아왔고 혹은 살아가기 때문일 것이다. 마개가 열린 세면대 배수구에 머물러 있는 거품에선 나와 너의 아침 일상을 상기하게 된다. ‘채 씻겨나가지 못한 거품, 그래도 시작되는 아침’과 같은 어설픈 비유처럼 작가가 사진으로 기록한 일기는 곧 나의 일기가 된다. 꽃송이 떨어진 꽃대 뒤로 자리한 꽃무늬 프린트, 아수라장 같은 국회의 모습이 실린 신문기사 옆으로 잔뜩 집중하며 쓰레기통 안을 바라보고 있는 아이, 주어진 시간 안에 건너야 함을 알려주는 신호등의 깜빡임 등 이세현은 의도치 않은 상징적인 장치를 통해 개인과 사회의 단면을 무수히도 기록한다. 이세현 <에피소드> 연작, 2011~2012 아침에 눈을 뜨는 순간부터 카메라를 집어 드는 작가는 스스로 사진 찍는 행위에 중독돼 있다고 말한다. 매일 매 순간을 포착하기 위해 자유롭게 셔터를 누르는 그가 초기 작업에서부터 썼던 화명도 ‘미스엠마’이다. 몰핀(morphine)의 속어이기도 하다는 이 화명에서 작가가 받아들이는 긍정적인 중독의 태도, 그리고 사진을 향한 순수한 애정을 엿 볼 수 있는데, 이세현은 실재성을 담보하는 사진의 매체적 특질을 통해 나와 너의 삶, 더 나아가 사회라는 범주에서 함께 공유하고 공감할 수 있는 질문들을 던진다. 공공작업과 기부의 형태로 관객과 소통한 작업 <순환(circulation)>은 감상하는 주체의 적극적인 참여로 작품이 완성된다. 작가는 허공 위로 던져진 돌을 포착한 소품 작업을 600여 점 정도 빼곡히 내 걸고, 관객은 소정의 금액을 기부하면 전시된 작품 중 한 점을 가져갈 수 있는 형태이다. 단, 조건은 작품을 떼어 낸 자리에 관객이 직접 원작과 동일한 구도의 그림을 그려 다시 설치하는 것이다. 관객들에 의해 기부된 금액은 미혼모와 같은 사회적 약자들에게 돌아가며 뜻 그대로 물질로써 ‘순환’하게 된다. 시간성을 품은 돌은 작가에 의해 던져지고, 그 던져지는 행위는 일종의 사회적 물음으로 치환된다. 관객은 구입과 기부, 그리고 창작의 형태로 작가의 물음에 화답한다. 이세현 < Circulation_024>, 2014 (광주 로터스갤러리 개인전 일부) 증거로서의 장소 이세현의 알려진 시리즈 <경계(Boundary)>는 구체적인 어떤 ‘곳’을 기록하는 작업이다. 일상의 기록으로부터 보다 구체화된 본 작업의 소재는 역사적 사건이 일어난 장소들이다. “역사적 장소를 사진을 통해 기록함으로써 다시금 질문을 던진다.”는 작가는 언급한 물음을 가시화하는 방법으로 던져진 돌을 사용한다. 프레임의 중앙 상단에 위치하는 돌은 모두 실재하는 장소에서 채집한 것으로 그 자체가 과거와 현재, 미래를 잇는 대상이 된다. 나아가, 사건이 일어났던 곳의 관찰자를 상징하는데, 3인칭인 관찰자는 작가의 적극적인 개입으로 인해 1인칭의 주체로 변모한다. 익숙하게는 전일빌딩 옥상에서 담은 5.18민주광장, 일제강점기의 강제노역과 여순사건의 아픔이 지척에 자리한 마래 제2터널, 118명 광부들의 안타까운 사연이 서린 해남의 옥매광산 등 이세현은 우리 삶터 가까이 있는 의미 있는 장소들을 절실히도 발로 밟는다. 비구상 회화처럼 보이는 노근리 쌍굴다리의 총탄 자국, 최전방 부대에서 바라본 양구의 펀치볼(punch bowl)과 아스라이 보이는 비무장지대, 4.3사건으로 사라져버린 제주 곤을동 사진에선 전쟁과 항쟁의 상흔들을 유추할 수 있다. 다큐멘터리 작업은 다분히 역사성과 현실성을 내포하기에, 때로는 향수자로 하여금 버거운 형식으로 느껴진다. 또한, 허구의 서사가 아닌 철저히 사실에 기반을 두기 때문에 얼핏 건조한 프레임으로 간과되기도 한다. 사건이 있었던 장소를 사진으로 담아내고, 현재적 시점에서의 장소성에 질문을 던지는 작가의 행위는 ‘기록’과 ‘해석’의 경계에 있다. 박제화된 유물처럼 그 자리에 위치한 장소는 동적인 제스처에 의해 진행형의 공간이 된다. 이 극적인 엇박이 이세현 사진의 태도이자 동력이다. 언급한 대로 다큐멘터리는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기에 불편하다. 그러나 외려 온전한 사실로서 힘을 갖는다. 눈이 부시도록 푸른 하늘과 푸른 바다 사이에 자리한 군함도, 그 군함도의 실루엣과 유사한 제주 알뜨르 비행장의 격납고까지, 작가는 본 작품들에서 일본에서의 한국, 한국에서의 일본을 읽어낸다. 이세현 <알뜨르 비행장>, digtal pigment print, 2019 이세현은 무려 열세 번 째 개인전을 앞두고 있다. 자신이 찍은 모든 장소를 보여주고 싶은 마음에 콜라주 형태로만 선보였던 <경계> 시리즈를 대형 사이즈의 독립된 작품으로 전시한다. 앞서 설명한 작품들과 함께 원폭이 투하됐던 히로시마, 고성의 산불 현장부터 작위적인 스토리텔링을 상징하는 동상, 사라져버린 터에 대한 지금의 기록인 경주 황룡사지까지 그간의 다채로운 시선들을 펼쳐낸다. <잘 놀다 오겠습니다>라는 주제로 열렸던 작가의 첫 개인전은 흥미롭게도 군 생활 당시 군대에서 열렸던 전시이다. 강원도 화천의 최전방에서 사진을 찍지 못해 금단현상까지 생겼다는 작가, 그의 카메라는 어느덧 80만 컷을 향하고 있다. 본인 사진의 결을 물었을 때 작가는 “계속 카메라를 가지고 놀고 싶다.”는 거침없는 답변을 해왔다. 어찌 보면 작가는 ‘사진계’에 머무르기 위한 작품보다 자신의 분신과 같은 카메라를, 그리고 사진을 즐기기 위해 끊임없이 찍는지 모르겠다. 역사와 사회라는 화두는 항상 다루기 껄끄러운, 그만큼의 책임이 부가되는 주제이다. 시대와 현실에 기반을 둔 작가의 문제의식이 보다 집중된 작품세계로 발전할 수 있기를 바라며, 종국에는 보편성을 획득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본다. _ 고영재 (광주롯데갤러리 큐레이터, [전라도닷컴] 9월호) ※ 2019 롯데갤러리 창작지원전 1부 전시로 기획된 이세현의 사진전 ‘경계 Boundary’는 9월 6일부터 30일까지 광주 롯데갤러리에서 열립니다. 이세현 <Boundary_A-Bomb Dome>, 2017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이전글 다음글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