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와 세상의 투영 ; 정희승의 ‘나는 너다’ 페이지 정보 작성자 조인호 작성일21-11-08 13:09 조회2,173회 댓글0건 관련링크 이전글 다음글 목록 본문 정희승 <이침꽃을 줍다>, 2021, 캔버스에 아크릴, 130.3x162cm 시대와 세상의 투영 ; 정희승의 ‘나는 너다’ 2021.11.03 – 11.29 / 오월미술관 ‘나는 너다’ 교조적 이념과 의식의 그물망을 던져 씌운 일방적 동일시는 아닐 것이다. 나의 진리가 곧 너의 것, 세상의 것이어야 한다는 과잉된 자기중심도 아닐 것이다. 너의, 세상의 아픔과 고뇌, 그 무엇이라도 안고 스미어 함께 하고 싶은 상호동화의 바램이라고 할까. “단 한 걸음도 생략할 수 없는 걸음으로, 그러나 너와 나는 구만리 청천(靑天)으로 걸어가고 있다. 나는 너니까…” 그의 마음과도 꼭 같은 황지우의 시 ‘나는 너다’의 한 대목처럼 정희승은 이 시대와 세상을 함께 살아가는 이들과 하나이고 싶어 한다. 내안에 비친 세상이, 그 유형무형의 기운과 삶의 흔적들이 내 안에서 제대로 된 그림으로 다시 틔워지도록 면벽수행 화두처럼 화폭에 나를 비춰낸다. 온전한 너이기 위해 늘 나를 먼저 들여다보는 것이다. 12년만의 이번 개인전에 자화상이 유독 많은 이유인 것 같다. 부끄럼쟁이 유년시절 사진에서 본래의 순수를 재확인하고(<순금의 기억-유년시대>, 불혹에 이르렀음에 정말 흔들림 없이 가야할 나의 길을 생각하며(<마흔>), 그림으로 어쩌지 못하는 참담한 세상 소식들 앞의 무력감에 고뇌하거나(<자화상>, 여전히 아득한 세상 어둠 앞에서(<문 앞에 어둠>), 나는 그림은 세상에 무엇이어야 하는지를 다시 일깨우는 섬광이 정수리에 내리꽂혀 전율에 휩싸일 때(<빛-스미다>도 그는 항시 화폭에 자신을 불러 세워 자문자담을 거듭했나 보다. 그런 바탕 위에서 80년대의 암중모색 시절에도, 90년대와 2천 년대 이후 현재까지도 계속 이어오고 있는 거리전과 현장전, 오월 정례전, 사회현실에 맞선 작품활동에서도 그는 늘 세상과 자신을 통찰하는 정제된 어법으로, 의식화된 발언보다는 묵직하고도 진한 울림의 그림들로 정서적 공감대까지 높여 왔다. 세상 공기는 사람들을 통해 느껴진다. 그의 그림에는 이웃, 동료들이 자주 등장한다. 과장되지 않은 어법으로 대화하듯 표정과 생각들을 담담하게 그려내면서 그들 삶을 향한 경애와 위로, 응원의 마음을 담아내고 있다. 세상 한가운데서 40여년 화업을 일궈오는 동안 서로에게 도반이 되어 준 화우들을 무엇보다 소중한 ‘나는 너, 너는 나’(6인의 초상 <나는 너다>)로 여기기 때문이다. 군더더기를 덜어낸 그의 절제된 화폭에는 상징적 소재들이 함축된 의미로 묘사되곤 한다. 고달픈 청춘의 마지막 비극 현장에 공통되게 남겨져 있던 <흐르는 육개장> 등 컵라면 연작, 비좁지만 세상의 모든 것일 수도 있는 후배의 그림감옥 작업실 <전경의 방>, 걷고 있는 길도 주변도 온통 희뿌연 불확실뿐인 도시의 한 컷 사람들 <안개>, 파도에 떠밀려온 난민 아이의 주검 <알란 쿠르디>, 안스러움과 기도의 마음을 전하는 이웃 꼬마아이 <서우>, 낙엽진 노란 은행잎들 대신 한푼의 온기를 기다리는 지하도 계단의 엎드린 걸인 <만추>, 어디로 흘러가는지 알 순 없지만 연초록 희망으로 세상 가득 돋아나기를 바라는 518번 시내버스 <창>, 어느덧 숙녀가 된 딸을 바라보는 아빠의 만감이 담긴 초상 <지원>, 강렬한 필촉과 대비적 색채의 붉은 동백이 모아진 두 손 안에서 촛불처럼 피어난 <아침꽃을 줍다> 등등... 이런 세상 풍정들을 그리고 있는 화자의 심적 상태를 따라 줄줄이 눈물처럼 흘러내리는 비통함이 화폭을 가득 적시기도 하고, 고달프지만 그 자체로 귀한 일상임을 다독이는 가감 없는 묘사로, 예감할 수 없는 불확실한 현실감 때문에 표정도 주변처리도 회화적 구성으로 변주시켜내기도 하였다. 다른 한편으로, 시대의 기록과 발언, 풍자, 통찰로 지나온 40여년의 작업들을 곧 예순을 앞둔 지점에서 몇 점의 시대별 작품들로 간추려보기도 한다. 대학시절인 1984년의 다색목판화 <김씨의 초상>, <광주천 풍경>부터, 광주전남미술인공동체(광미공) 시절 공동작업으로 이뤄낸 1990년의 목판화 <오월 연작> 일부, 불로동 시절이 묻어있는 진눈깨비 속 사직공원 풍경 <겨울숲>, 조국의 민주화를 외치며 분수대와 민주광장을 가득 메운 오월 그날 시민들의 열기를 35주년을 맞는 시점에서 다시 푸른 희망으로 되살려낸 <광장>, 광주의 그 때 오월 상흔과 이후 세상단편들과 T셔츠에 새겨진 미얀마 민주화운동에 보내는 응원의 메시지와 지금의 시대단상들까지 그는 여전히 화폭이라는 창을 통해 현실과 마주하고 있다. 이러저런 그의 가슴속 얘기들을 그림으로 읽어가다 전시장 한켠 대미부분에서 마주하게 되는 작품 두점, 다른 전시작품들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다. 1999년 같은 시기에 그려진 작품들인데, <황사>는 청춘의 불로동시절부터 인생주름 숨길 수 없는 지금에 이르기까지 그의 옆에서 묵묵히 지지자가 되어 준 인생동반자의 초상이다. 자신을 위해 가족을 위해 이직을 결심하기 전 번민을 거듭했을 그 심란한 심중을 봄날의 황사풍경으로 담아놓았다. 현실의 한복판 거리에 서 있는 모습으로 눈높이 시선과 연결되는 빨간 신호등, 쳐진 어깨 구부정한 뒷모습으로 스쳐가는 행인들과는 달리 눈을 들어 앞날을 가늠하며 생각 가득한 아내 표정에 그의 마음을 함께 겹쳐내었다. 무어라 일일이 표현해낼 수 없는 그 착잡한 속내를 소박한 연분홍 진달래꽃 한 묶음으로 담아 <너에게> 건네고 있다. 그리고 어떤 화려한 언사로 대신할 수 없는 그 마음에 답하듯 아내는 남편의 40여년 작업의 자취를 정성들여 자료집 도록으로 정리해주었다. 너무나 오랜만의 이번 전시는 화투를 주된 소재 삼아 세상사를 풍자했던 2009년의 전시 때와는 달리 전반적으로 비장미가 묵직하게 깔려있다. 물론 예전에 시대현실과 대응하는 크고 작은 전시를 통해 보여 온 그의 강렬한 메시지와 이미지의 작품들은 대체로 비장함이 주류를 이루어 왔었다. 시대와 세상을 품는 그의 가슴이 쉼 없는 내적 성찰로 진중하게 다져지고 군더더기를 뺀 견고한 형상언어로 드러내어지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은 의식화된 이념만이 아닌 태생적인 깊은 감성에 마음의 교감과 동화작용이 녹아들면서 이루어지는 화폭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사실 지난 40여년의 작품 내력이나 근작들을 세세하고 규모 있게 펼쳐내기에는 소박한 전시이다. 그렇더라도 또 하나의 돋움대가 될 이번 발표전 이후로도 더욱 더 깊어져 가는 내공을 바탕으로 시의성과 공감대를 높이며 시대를 통찰하는 작품들을 계속해 나갈 것이라고 본다. - 조인호 (광주미술문화연구소 대표) 정희승 <빛-스미다>, 2018, 캔버스에 아크릴, 162x130.3cm 정희승 <나는 너다>, 2018, 캔버스에 아크릴, 91x72.7cm 정희승 <순금의 기억-유년시대>(2018), <마흔살>(2002), <문 앞에 어둠>(2015) 정희승 <나는 너다>(허달용, 최병진, 김태삼, 자화상, 김대성, 김우성), 2003, 캔버스에 유화, 각 162x97cm 정희승 <나는 너다>(연작), 2018~2021, 캔버스에 아크릴, 각 45x45cm 정희승 <나는 너다>(자화상), 2020, 캔버스에 아크릴, 45x45cm 정희승 <흐르는 육개장>, 2019, 캔버스에 아크릴, 140x140cm 정희승 <광장>, 2015, 캔버스에 유화, 145x145cm 정희승 <창>, 2015, 캔버스에 유화, 104x162cm 정희승 <안개>, 2000, 캔버스에 유화, 97x162cm 정희승 <황사>, 51.5x53cm / <너에게>, 39x39cm, 1999, 종이에 오일파스텔 정희승 개인전 '나는 너다', 오월미술관 정희승 개인전 '나는 너다', 오월미술관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이전글 다음글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