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감고, 눈 뜬 오월의 사람들’ ; 이상호 초대전 페이지 정보 작성자 한재섭 작성일22-05-16 14:11 조회2,218회 댓글0건 관련링크 이전글 다음글 목록 본문 이상호 초대전. '눈감고 눈 뜬 오월의 사람들' 전시 일부 ‘눈감고, 눈 뜬 오월의 사람들’; 이상호 초대전 2022.05.04~05.25 / 광주 메이홀 이 글은 5·18민주화운동 42주년을 맞아 메이홀 10주년 초대전으로 세 번째 개인전을 갖는 이상호 전시에 관한 미술사가 한재섭의 전시도록 비평글을 일부 발췌 요약한 것이다. 상처와 고통을 넘어 그 시절의 기억을, 역사를 복원하되 사실로서 입증해내고. 그러면서도 그에 매몰되지 않고 그 바탕으로 현재를 바라보면서, 의지와 상관없이 현실과 비현실을 오가고, 생과 사 사이에서 떠도는 이들을 무시로 접하면서도 세상을 정직하게 바라보고 올바르게 그려내려 하는 이상호 작가의 전시다. 세간 복판에 마음자리를 내어 수행하듯 필선을 잡고 촘촘하게 채워 올리는 갈필들로 세상의 뭇 사람들을, 오월의 인물들을 그려내고, 거기에 판각을 하듯 한자 한자 정성들여 글씨를 써넣은 이상호의 작품들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함이다.(편집자 주) 세계와의 끝나지 않는 대결, 이상호의 지평선 #1 이상호와 광주 … 이상호는 1980년 광주의 10일이 남긴 도래할 파국을 준비하며 새롭게 태어난 민중의 정치적 역능을 보편적이고 대중적인 감각으로 나누기 위한 미술운동에 전력을 쏟았다… 특히 기존의 전통적 회화영역에서는 인정 되지 않았던 걸개그림과 판화, 만화, 거리(바닥) 벽화, 포스터, 깃발과 손수건 등의 시각매체를 과감히 사용하며 새로운 미술장르의 장을 열어나갔다. 이는 한국화, 서양화, 조각 등의 장르와 순수미술이니 응용미술이니 하는 구분과 경계도 지워버리는 새로운 민중의 미학을 위한 예술운동이었다… 이상호는 바로 정치와 예술의 해방된 상상력이 놀랍게도 완벽한 조화를 이룬 광주의 10년에서도 가장 최전선에 서서 최후까지 버틴 척후병이자 전위대였다. 광주의 10년은 이상호의 10년이나 마찬가지였다. 1987년 민미협(민족미술인협회) 주최 1987년 제 2회《통일전》에 전정호와 함께 그린 <백두의 산자락 아래 밝아오는 통일의 새날이여>(걸개그림, 240X260)가 제주도 순회전 중 경찰에 압수되며 작가 전정호, 이상호는 국가보안법 위반협의로 구속되었다. 국가보안법이 적용된 최초의 예술검열사례로 이후 작품은 검찰에 의해 불태워졌다… 1990년대 분단과 외세를 척결하고 민족자주와 통일이라는 이상호의 지상절대과제는 실현되지 않았지만 제도적인 민주화가 진행되면서 이상호 작품의 선은 섬세해지고 실제로도 종교적인 세계에 귀의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이는 1987년 고문으로 피폐해진 신체 때문이기도 하였지만 이 시대 민중미술운동의 나아가야 할 지점이 민중들의 고통을 위무해줄 수 있는 종교화로써의 가능성을 탐구한 결과 끝에 나온 실천이기도 하였다… 1990년대가 접어들며 거리의 민중들과 작가들이 모두들 떠나가버린 자리에서 이상호는 그렇게 덩그라니 남겨져 작업을 이어나갔다. 그리고‘정 붙일 데가 없어 병에 정들어’(허수경) 병원과 집을 오가며 삶을 이어 나갔다. 그리고 그에게는 민중미술운동작가, 국가보안법 검열 1호 작가라는 훈장만이 벽에 걸렸다. #2 산 너머 민중이라고, 산 너머 민중이라고 … 이상호의 드로잉이 시작된 것은 아버지의 임종을 지키는 날이었다… 암에 걸려 몸뚱아리를 지탱시켜주던 살들이 떨어져나가고 피부가 말라붙었을 때 그는 아버지를 그렸다. 1995년 6월. 맥주 몇 캔을 들고 가족들을 모두 돌려보낸 다음 홀로 아버지와 대면하며 그렸다. 칠흑보다 더한 밤이었다. 오줌주머니를 차고 쉴 틈 없는 기침소리와 악몽같이 들려오는 아버지의 신음소리를 저주하며 그는 아버지를 그렸다. 징용에 끌려갔다 돌아온 아버지, 삶이 아니라 그저 생명만 연장하고 있는 아버지, 세상에 떳떳하지 못했던 아버지를 보며 그는 저주가 아니라 불효를 떠올렸다. 세상에 떳떳하게 살고 싶었던 아들은 텅 비어버린 채로 자신 앞에 온 아버지의 삶을 부정할 수 없었다. … 나주병원 드로잉은 2001년, 2005년, 2007년, 2015년에 집중적으로 그려졌다. 1987년 남영동과 서대문형무소를 나온 직후 서울의 병원 시절부터 하면 30여년간 작가 삶의 가장 큰 부분이 정신병원이다. 감옥의 훈장과 다르게 병원 감금과 퇴원의 반복은 그의 삶을 외롭게 만든 큰 이유이기도 했다. 사람들이 오래 머물지 않았다. 그럴수록 나락에 떨어지는 삶을 붙잡은 것은 종교였다. 출가를 두 차례나 했지만 다시 살아나 자신을 짓누르는 병은 종교도 이길 수 없었다. … 세상으로 난 길을 잃어버린 사람들이라 딱히 그가 그림을 그리든 말든 신경을 쓰지 않았다. 잘 그렸냐고 물어본 적도 없고 잘 그리기 위해 노력할 필요도 없었다… 환우들은 모두 어딘가를 뚫어지게 응시하고 있었다. 대상이 없었다. 응시하는 두 눈과 대상 사이에는 허공만이 있었다… 한 가지, 허공을 주시하는 환우들을 보는 이상호 작가의 두 눈은 분명히 있다는 것만 철회되지 않는 확신이다. 자신을 그리는 작가도 자신이 몰두하는 행위에도 두 눈의 초점을 잃어버린 환우들을 끈덕지게 쳐다보고, 쳐다봤을 이상호 작가의 눈은 무엇일까. … 이상호는 사회에서 격리되고 감금당한 환우들 속에서, 거리와 광장에 출현하였던 민중들의 모습을 보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그의 그림 중에서, 또, 민중미술운동이 숱하게 그렸고 그리자고 주장했던 민중을 그렸던 것은 아닐까. 민중의 참 모습을 보았던 것은 아닐까… 처음 입원할 때 작가의 전력을 안 병원장이 ‘네가 그린다는 민중이 여기 다 있으니 눈 여겨 봐둬라’ 했다는 말은 아마 이상호 작가가 드로잉으로 우리에게 하고 싶은 말이기도 했을 것이다. … 이번《눈 감고, 눈 뜬 오월의 사람들》(5.4 ~ 5.25, 메이홀)은 그가 인생과 화업에서 민중을 만나기 전과 만난 후의 여정을 결산하는 자리로 매우 중요하게 위치 지워질 것이다. 시민들에게 발포를 거부한 안병하 국장과 살아남았다는 죄의식으로 목숨을 던진 이정모 열사, 그리고 우리가 지금 이 자리에서 당당하게 역사와 민중을 떠들 수 있게 만들어 준 5월 27일 도청에서 산화해간 사람들의 지워질 수 없는 흔적을 기록하고 있는 작품이다. 이상호 작가에게 또 이 땅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에게 1980년 오월의 사람들은 무심히 지나쳐서도 아무렇게나 내쳐져서도 안된다. 도청에 마지막 밤 남은 사람들은 무엇을 생각했을까. 저 질문은 1980년대만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도 앞으로도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에게 영원한 청춘과 사랑을 보증하는 질문이다… 그래서 그의 정치적 지평선은 바로 미학적 지평선과 같은 말이다. 지평선은 산 너머 민중에게 또 산 너머 민중에게 다 다를 때까지 세계와 대결을 계속할 수밖에 없다는 작가의 결기 있는 선언이기도 하다. - 한재섭 (미술사) 이상호 초대전 중 '시민군 이정모' 일대기 그림, 2022, 한지에 먹 이상호 <김동수열사도>, 2021, 천에 아크릴릭, 136x87cm / <총쏘지 않는 사람>, 2022, 한지에 채색, 73x52cm 이상호의 미완성작 <목포역의 새벽>(1992, 한지에 채색, 106x72cm)과 부분 이상호 <통일열차 타고 베를린까지>, 2019, 캔버스천에 아크릴릭, 145x215cm 이상호 <나주병원 환우 스케치>, 2005, 2007, 종이에 연필 이상호 <병상의 아버지>, 1995, 종이에 연필 이상호 초대전 중 인물드로잉 전시실 이상호 초대전 중 작가 작업실 분위기 재현 공간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이전글 다음글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