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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으로부터의 서사; 조정태의 작품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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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고영재 작성일20-04-29 13:55 조회1,14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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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정태 <별이된 사람들에게>(부분), 1998,_혼합재료,_390x162cm

     

    사람으로부터의 서사; 조정태의 작품세계

     

    긴 여행길에 들어설 때 항상 챙겨 드는 물품 중 하나가 소설책이다. 쉬자고 떠나는 여행이지만 비행기 안에서의 시간은 유독 지루하기에, 인물과 서사 중심의 소설은 여행 초입의 무료함을 달래주는 가장 좋은 벗이 된다. 3년 전 유럽 여행길에 집어든 한강의 장편소설 <소년이 온다>도 그러했다. 소설의 배경이 광주의 오월인 탓에 책 구입을 주저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 시대를 체감하지 못한 탓도 크지만, 나에게 오월은 일종의 오래된 채무와 같았기 때문에 관련한 저작물을 더러 외면해 왔던 터다. 그러나 사건이 중심이 아닌 사건 안의 사람들에 초점을 둔 본 작품은 마치 그 시대를 경험한 듯 생생함을 전달했다. 희생된 사람들, 그리고 남겨진 이들의 이야기, 사람의 이야기는 넓은 의미에서 우리의 이야기이기도 했다.

    86학번으로 민주화운동의 현장에 있었던 조정태의 작업도 실재성을 본질로 한 경험적 서사에서 비롯되었다. 미적 가치를 우위에 둔 허구적 서사가 아닌 그것이 역사에서 기인한 것이었기에, 정작 개인 작업에 대한 고민은 더디게 흘러왔다. 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치 않는 중심은 역시 사람이다.

    현실과 자아의 틈새

    조정태.JPG

    대학 졸업 이후 조정태 작가가 붓을 든 세월이 어느덧 29년째에 접어들었지만, 본격적인 화업(畵業)으로서의 시간은 이제 8년을 넘겼다. 조정태는 학내미술운동이 한창이던 1986년과 91년 사이 학생회 중심의 활동으로 대학생활을 지냈다. 스스로의 회고처럼 서정적 감성을 타고난 그는 한편으론 비판적 학우이기도 했다. 그는 졸업 이후 광미공(광주전남미술인공동체)에 참여하며, 오월 연작판화와 망월동 신묘역 기념탑 기획 등 주로 미술운동으로서의 작업을 함께 했다. 광미공 해체 이후에도 현실 참여적 성격의 미술단체에 몸담으며 전시와 함께 관련한 프로젝트를 기획·주도했다. 그러나 사회적 메시지가 확연한 미술운동 중심의 활동에서 자기만의 시선에 대한 갈증은 계속되었고, 그 과정에서 현실 비판적 성향과 특유의 서정성은 양가적(兩價的) 성질로서 작업 안에 양립됐다.

    90년대 중후반 조정태의 초기 작업에서 엿보이는 것은 정적인 감성 안에 녹아든 사람과 사회이다. <달맞이꽃에게>시리즈에 등장하는 작부는 단순히 호기심의 대상이 아닌 나와 다를 바 없이 삶의 희망을 저당 잡힌 동시대인이다. <광야도> <> <노인의 땅>에서는 제법 농익은 화술로써 현실감각을 드러냈다. 한편, 일상 안의 자화상을 포함한 동료와 지인이 소재가 되는 인물작품은 대부분이 어두운 색채와 회화적인 붓질로 구현되어 표현주의와 유사한 미감을 전달한다. 이주노동자를 비롯한 내 삶의 지근거리에서 포착한 사람들과 그들의 생의 단편은 초상화, 혹은 인물구성의 형식으로 현재까지도 꾸준히 담아내고 있는 소재 중 하나이다.

    역사적 사실을 기반으로 사회현실을 쟁점화한 작품들 또한 내용면에서 때로는 직접성을 때로는 간접성을 띤다. <탄핵의 뿌리> <얼룩무늬의 추억> 등 콜라주 형식으로 정치사회를 풍자한 작품들은 민중미술의 전형으로 해석할 수 있지만, <겨울 망월묘역> <일상적 풍경-호국 정신> <인간세상>과 같은 작품은 작가 본연의 감성을 바탕으로 보는 이에게 해석의 여지를 남긴다. 어찌 보면 조정태는 20여 년 가까이 직설과 간접화법의 패를 모두 쥔 채 스스로 부유한 듯하다. 그 과정에서 정체성에 대한 고민은 지속됐고, 8년 전 뒤늦게 석사과정을 밟으면서 작가로서 바로 서기 위한 모색을 단행한다.

    이 시기 다뤘던 화폭 중에 눈여겨볼만한 형식은 풍경화이다. 과도기에 선 자신의 모습과 역사적 문제의식을 풍경에 투영하며 상징적인 어법을 취한다. <천지> 연작 <겨울 - 나목> <- 황사>에서 보이는 자아성찰, <백산> <망월> <일상적 풍경> 시리즈에서 감지되는 공적 시선에서 이전보다 정제된 느낌의 사고를 발견할 수 있다. 나라는 내부세계와 사회라는 외부세계가 분열되지 않게 준비운동을 시작한 그는 2016년 북경에서의 작업시기를 통해 전환점을 맞는다. 우리와 유구한 역사의 궤를 함께 해온 중국에서 조정태가 느낀 것은 체득하기 힘든 정신문화와 그곳의 현실이었다. “결국에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내가 속한 주변의 삶과 사회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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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정태 <일상적 풍경-인간세상>, 2006~2014, 혼합재, 162.1x390.9cm

    그래도 사람 ; 잊지 말아야 할 사람들

     

    지난 4월 그의 작업실은 에스키스 작품들로 분주한 인상을 풍겼다. 을씨년스러운 건물 위로 칠흑 같은 밤하늘이 자리하고, 그 안에 총총히 떠 있는 별은 유난히도 빛난다. 건물은 서북청년단 본부로 사용했던 곳으로 역사적 상흔이 서린 장소이다. 더불어, 밤하늘과 낮 풍경이 혼재하는 파노라마 구도의 습작들도 눈에 띈다. 이 모두가 <별이 된 사람들> 연작을 위한 준비과정이다. 각각 1000, 300호 크기의 대작으로 완성될 이 연작의 시원은 98년에 그려진 <별이 된 사람들에게>이다. 추상적으로 표현된 원경의 구 도청과 밤하늘의 별, 그리고 목판화의 칼맛처럼 새겨진 뒤엉키는 인물들이 이채로운 본 작품은, 역사적 사건이 아닌 그 안에서 산화해 간 사람들에 집중하기 위한 결과물이다. 2012년 오월시화전에 본격적으로 등장한 <별이 된 사람들>은 밤하늘의 별로 치환된 초월의 세계와 실존하는 자연풍경이 더욱 극적으로 어우러지는 작품이다. “야만의 역사에서 이름 없이 죽어간 이들도 있지만, 죽을 줄 알면서 남아있었던 사람들에 대한 존경의 마음을 담았습니다. 자기희생은 그 자체로 순수이고, 당시의 그 순수한 빛들은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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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정태 <별이 된 사람들-波浪島>, 에스키스

    현실이라는 긴 세월의 풍파에서 퇴색되고 왜곡되어진 마음이 아닌 초심을 이야기하고자 하는 그는, 지금의 나, 지금의 삶, 그리고 지금의 사람들을 그리기 위해 변하지 않는 현재성의 가치를 다시 끌어올리려 한다. 현재도 각자의 현장에서 그 무수한 별들이 생겨난다고 말하는 조정태는 여전히 사람에 대한 애정을 내비친다. 꾸준히 놓지 못하고 있는 인물화 또한 작가의 표현대로 실제를 마주하기 위한 노력이자 사람에 대한 관심에서 연유한다. 한 사람의 얼굴에 담긴 한 사람의 삶, 어떤 이의 일상이 묻어나는 일상의 장소, 시적 심상으로 점철된 침잠하는 풍경까지, 아직은 형식과 내용면에서 자유로움을 추구하는 조정태는 분명 과정 중의 작가이다

    앞으로의 계획을 물었는데 그는 이내 사람을 이야기한다. “모든 것은 자기로 투영되니까 결국은 나의 이야기입니다. 나로부터 출발한 사람에 관한 이야기를 풀고 싶어요.” 항시 돌아오는 광주의 오월을 앞두고 무엇이 중요한가를 생각해봤지만, 그것이 그저 고여 있는 역사가 아닌 진행형의 시간이 되기 위해선 무엇보다 지금을 살아가는 사람들, 그리고 지금의 삶을 정확히 마주할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시대를 함께 했고 현재를 함께 하는 이들로부터 길어 올린 조정태의 서사가 공감의 영역에서 더욱 무르익어가기를 바란다.

    - 고영재 (광주 롯데갤러리 큐레이터. [전라도닷컴] 2020.05월호)

    조정태.달맞이-꽃에게-II_유화_90.7x72.7cm_1993.jpg
    조정태 <달맞이-꽃에게-II>, 1993,_유화,_90.7x72.7cm
    조정태.광야도_혼합재료_120x240cm_1994.jpg
    조정태 <광야도>, 1994,_혼합재료,_120x240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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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정태 <탄핵의 뿌리>, 2004,_혼합재료,_120x240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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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정태 <별이된 사람들-I>, 2012,_유화,_65.1x99.9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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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정태 <무슨 생각하십니까 형님> <반가사유이공>, 2018, 유화, 각 38cm x 45.5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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