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남진의 위로, 슬픔을 조각내기 페이지 정보 작성자 박현화 작성일24-02-23 11:01 조회1,778회 댓글0건 관련링크 이전글 다음글 목록 본문 임남진 <still life_연서>, 2022, 한지에 채색, 50×50cm 임남진의 위로, 슬픔을 조각내기 강진아트홀 초대전 ‘Still Life 연서’ / 2024.2.24-3.14 임남진의 세계를 이해하려면 2007년에 열린 첫 개인전, 《영혼의 여정》에서 보여주었던 불화형식의 해원화(解冤畵)와 2018년 《스틸라이프-블루 Still Life-BLUE》에서 처음으로 선보이기 시작한 색채가 주조를 이루는 추상화 사이에 존재하는 커다란 변화의 흐름을 읽어야 한다. 구상과 추상, 서사와 상징, 선묘와 색채로 대비되는 두 요소가 한 작가의 작품 세계에서 크게 변화를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현실적인 삶과 죽음에 대한 서사를 망라하고 있는 그녀의 감로탱화나 나한도의 장엄한 도상과 이 모든 것들을 조각난 작은 풍경이나 접은 종이 속에 감추고 이제 흔적만 남아 시처럼 노래하는 색조 사이에 우리는 어떤 통로를 놓을 수 있을까? 만일 임남진의 변화된 두 형식의 회화 사이에 다리를 놓을 수 있다면 그것은 결국 어떤 ‘새로운 관계’를 말하는 것이 될 것이다. (중략) 감로탱화 편주(片舟) 그동안 불화의 장엄형식을 빌어 인간의 삶의 고통과 죽음 그리고 구원의 문제를 다루었던 임남진은 풍속도 시리즈 <취생몽사-풍속도 Ⅳ>를 마지막으로 부감법의 전지적 관찰자 시점에서 자아 내면의 세계로 돌아온다. 다시 말하면 신의 관점에서 훌쩍 지상으로 내려온 작가는 이제 자신의 모습을 투사할 대상을 찾게 된 것이다. (중략) 불화의 부분적 요소나 민화를 통해 자신의 자화상이나 자아의 내면을 드러내는 작품들이 많이 등장하는 이 시기는 2018년 임남진이 《Still Life-BLUE》전에서 처음으로 선보이기 시작한 색채 중심의 추상화로 변화되기 전 단계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심심한 날》에서처럼 불화 도상이 홀로 위태롭게 표류하고 있는 작가의 편주(조각배)가 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감로탱화에서 고통 속의 중음신들이나 낙태된 아이, 광주항쟁에서 희생된 영혼, 그리고 세월호 사건에서 수장된 어린 영혼을 보는 작가의 시선이 자아 내면으로 향했을 때 그녀가 본 것은 슬픔의 덩어리, 비애가 아니었을까? 세상을 굽어보는 부처도 삶의 본질이 고통이라고 이야기하지 않았는가? 이제 지상으로 내려온 작가는 불화의 전체적인 도상을 ‘조각내기’로 그 슬픔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으며, 결국 그것은 슬픔의 조각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스틸-라이프(Still Life) (중략) 2018년 가을, 광주 양림미술관에서 《Still Life-BLUE》 개인전으로 처음 선보인 추상화 전시는 그녀에게 많은 용기가 필요했을 것이다. 그동안 치밀한 관찰을 바탕으로 움직이는 듯 생생하게 천태만상의 인물을 표현해내는 밑그림을 위한 선과의 싸움이었다면 추상화에서는 반대로 그 많은 인간의 형상들을 모두 지우고 비우는 작업이었기 때문이었다. 이 전시에서 그녀의 시선은 불화에서의 부감법과 대조되게 줄 곧 하늘을 향해 있다. 이제 지상으로 내려온 작가는 신의 관점에서 하늘을 올려다보는 인간의 관점으로 되돌아온 것이다. 달빛이 은은하게 번지고 있는 하늘, 구름이 바람처럼 휩쓸고 지나간 하늘, 전봇대 끄트머리에 얽힌 전선에 거미처럼 걸려든 하늘, 집과 집 사이 혹은 지붕의 선들이 걸친 하늘이 모두 분할되어 작가의 그림에 들어와 있다. 2022년 신세계 갤러리에서 열린 《Still Life》에서 보여주고 있는 〈적요(寂寥)〉시리즈는 하늘을 분할하고 있는 지붕이나 벽채, 기둥과 같은 건축적인 요소들이 더욱 추상화되고 면들의 색도 다양해지면서 색면의 조화를 이루고 있다. 특히 이 전시에서 보여주고 있는 ‘Still Life_연서(戀書)’ 시리즈는 그녀가 감로탱화에서 보여준 삶의 끝없는 이야기를 접은 쪽지 안에 감춘 채 상징적인 색면기법으로 대체하고 있어 그녀가 시도하고 있는 추상화의 정수로 보여진다. 쪽지 색면의 가장자리와 바탕색의 경계가 마치 마크 로스코 작품처럼 서로 번지면서 쪽지가 감추고 있는 내용과 서로 소통하는 듯하다. 그녀의 ‘시어’같은 색채의 비밀은 아마도 20년 이상 지속되었던 불화적 그림으로부터 연유되었을 것이다. 겹겹으로 층층을 이루며 분할되는 관음과 지장보살의 옷주름 그리고 비단 바탕에 은은하게 스며드는 분채나 주, 녹청, 군청의 깊이를 가진 채색은 고스란히 임남진의 조각난 풍경이나 ‘연서(戀書)’ 시리즈의 추상적 색면으로 스며들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제 임남진의 두 세계의 다리를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세상의 모든 일을 감추고 있는 ‘연서(戀書)’ 시리즈의 쪽지 형태의 색면은 부처의 여성성으로부터 받았던 위로, 즉 고통을 감싸며 달래는 살갗, 스크린을 상징한다는 것이다. ‘Still Life’(정물)라는 단어 자체는 ‘정지된, 죽은’이라는 의미와 ‘생물, 자연’이라는 대조적 의미가 결합되어 있다. 그녀가 활인극, 혹은 생생한 인생극장으로 그려냈던 풍속화의 많은 요소들을 정지시키고 지우거나 비워내는 작업, 혹은 많은 이야기들을 상징하는 시어(혹은 노래)로의 대체를 의미하는 단어이기도 할 것이다. 그런데 가장 주목되는 의미는 마지막 뒤에 붙은 ‘BLUE’라는 부제이다. 다 비워내고 남은 본질적인 색채 ‘BLUE’가 우울과 슬픔을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슬픔을 바라보는 것, 그것은 작가가 불화를 그리기 시작했을 때, 연잎 편주를 타고 있는 선재동자나 술잔을 바치고 있는 아귀의 모습으로 자화상을 그릴 때, 그리고 <Still Life>라는 색채 중심의 추상화로 마침내 내면의 세계에 도달했을 때도 일관되게 관통하고 있는 주변인들과 타자, 그리고 자기 자신을 향한 그녀의 시선일 것이다. 슬픔이 다른 슬픔에게 억울하게 죽은 넋에 대한 애도와 구원, 동시대 사회의 현실을 기록하는 풍속화, 조각난 풍경과 정물, 그리고 불화의 깊은 색조를 풀어낸 색면 추상을 그리고 있는 임남진의 회화세계를 관통하고 있는 것은 타인이 겪고 있는 상실의 고통과 이를 지켜보는 자아 내면의 깊은 슬픔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임남진의 회화의 시선은 바로 슬픔이 슬픔을 향해 통로를 만들면서 형성되는 새로운 관계에 존재한다. 다시 말해 임남진의 불화세계와 추상적인 색조 사이를 잇는 다리는 세상의 모든 상실의 고통과 슬픔에 대한 위로이다. (중략) ‘모든 삶은 고(苦)이며, 괴로움을 벗어나는 길은 그 덧없음을 받아들이는 것이다.’라는 부처의 말은 허무함을 받아들이면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는 의미가 아니다. 우리가 삶의 고통을 견디어내도록, 상황에 휩쓸리지 않고 붕괴된 지점을 계속해서 주시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 고통을 지우지 않고 직면함으로써 괴로움을 완화시키는 것, 자신의 고통이든 타자의 고통이든 이승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고 바라보는 법을 깨우치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슬픔을 조각내는 임남진의 위로가 시대를 넘어 타자를 위로하고 고통을 견디게 만들어 생멸을 반복하는 우주가 그리고 우리가 몸담고 있는 세상이 유지될 수 있는 항상성(homeostasis)의 비밀을 제시하게 되기를 바란다. - 박현화 무안군오승우미술관 관장의 전시 평문에서 발췌 요약 임남진 <떠도는 어린 넋들을 위하여>, 1998, 잇꽃염색 비단에 채색, 183×115cm 임남진 <상사_파랑새>, 2009, 쪽물염색 비단에 채색, 30×30cm 임남진 <장막도>, 2014, 한지에 채색, 560×206cm 임남진 <가을을 슬퍼하는 이유>, 2018, 한지에 채색, 110×190cm 임남진 <still life_연서>, 2023, 한지에 채색, 90x60cm / <still life_적요>, 2021, 한지에 채색, 140×204.5cm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이전글 다음글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