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지호와 인상주의: 빛의 약동에서 색채로 페이지 정보 작성자 전남도립미술관 작성일24-12-05 20:20 조회197회 댓글0건 관련링크 이전글 다음글 목록 본문 전남도립미술관과 국립현대미술관이 공동주최한 '오지호와 인상주의' 전시실 입구 오지호와 인상주의: 빛의 약동에서 색채로 2024.11.15-2025.03.02 / 전남도립미술관 전남도립미술관은 2025년 오지호 탄생 120주년을 맞이하여, 국립현대미술관과 공동으로 《오지호와 인상주의, 빛의 약동에서 색채로》 전시를 개최하고 있다. 이 전시는 1874년 제1회 인상파 전시로부터 150주년을 기념하는 의미도 갖는다. 전시는 오지호의 전 생애를 아우르는 회화 작품 100여 점과 아카이브 자료 100여 점을 선보인다. 또한, 한국 서양화 1세대 작가들의 일본 동경예술대학 졸업 작품들과 프랑스 인상주의 대표 작가인 클로드 모네와 빈센트 반 고흐의 예술 세계를 VR로 체험할 수 있는 특별한 기회도 제공된다. 모후산인 오지호(吳之湖, 1905~1982)는 한국의 자연과 풍토를 주제로 “光에 의하여 약동하는 생명”을 담아 인상주의 화풍을 독자적으로 구현한 한국 서양화단의 거목이다. 서구 근대미술 사조의 유입이라는 경로의 선상에서 발현된 한국 인상주의란 무엇일까. ‘빛을 그린 화가’로 불리는 오지호는 「순수회화론」(1938)에서 ‘회화는 光의 예술’이라고 천명함으로써 ‘光의 약동’, ‘色의 환희’를 탐구했다. 이 전시는 크게 시기별 활동 범위와 특성에 따라 ‘인상주의를 탐색하다’(1920~1945), ‘남도 서양화단을 이끌다(1946~1970)’, ‘한국 인상주의를 구현하다’(1971~1982)로 구성된다. 1부, ‘인상주의를 탐색하다’는 1920년대 동경예술대학 유학 시절 제작한 작품과 한국 최초 서양화 미술 단체인 ‘녹향회’활동, 1930년대 개성 송도 시절에 출간한 한국 최초의 원색화집 『오지호·김주경 二人畫集』(1938)에 수록된 <처의 상>, <임금원>과 국가등록 문화재로 지정된 <남향집> 등 인상주의 천착기에 제작한 대표적인 작품들이 전시된다. 2부, ‘남도 서양화단을 이끌다’는 해방 이후 산 풍경과 항구·배를 그린 바다 풍경, 꽃과 식물, 열대어 등 남도 서양화단을 주도했던 시기로서 오지호의 화업을 이어나간 아들 오승우(1930~1923), 오승윤(1939~2006), 그리고 장손 오병욱(1958~)의 작품들을 만난다. 3부, ‘한국 인상주의를 구현하다’는 1970년대 이후 빛과 색채로 구축한 남도의 풍경뿐만 아니라 1974년, 1980년 두 차례의 여행을 통해 담아낸 유럽풍경들과 그가 유작으로 남긴 미완의 작품 <쎄네갈의 소년들>(1982)을 만날 수 있다. 특히 문헌, 사진, 실물자료 등을 토대로 구성한 아카이브는 《오지호화백작품전》(1948), <아미타후불탱화>(1954)와 미술론·미술비평, 국·한문 혼용운동, 문화재 보전운동 등 다양한 활동 기록을 살펴볼 수 있다. 오지호의 회화 세계는 자연과 대상이 지닌 생명력이야말로 예술의 본질이며, 동시에 빛의 약동에서 색채로 발현된 그의 ‘감각감정’은 미적 원리이자 예술 의지를 함의한다. 오지호의 인상주의는 ‘빛과 색채’로써, 태양에게 보내는 생명의 찬가인 것이다. 인상주의를 탐색하다(1920-1945) 1926년 일본 동경예술대학에 입학한 오지호는 유학 시절부터 일본과 한국의 자연, 풍토성에 관한 차이를 인식하고 명랑·투명하고 오색·찬연한 조선 자연의 색채를 회화의 기조로 삼는다. 일본과는 다른 조선의 자연과 빛을 탐구해 나간 오지호는 귀국 후 서양화단체 ‘녹향회’ 제2회전을 통해 민족 고유의 미감이 담긴 향토적 소재와 색채를 묘사한다. 오지호는 점차 인상파 기법을 ‘자기화’, ‘체화’하는 과정으로써 조선인의 생리적 감각과 감정적 요구에 상응하는 ‘인상주의’를 천착해 나간다. 김주경의 권유로 개성 송도고보(1935~44)에 부임한 오지호는 ‘사실’을 토대로 자연의 본질적인 생명력을 강조하는 독자적인 회화론을 펼쳐나간다. 회화의 본질인 ‘생명’ 즉, ‘광에 의해서 약동하는 생명’을 탐색해 나갔고 그 결과물을 담아 한국 최초의 원색화집인 『오지호·김주경 二人畫集』(1938)을 발간한다. 『이인화집』은 ‘화집출판의 효시’이자 당대 ‘조선 초유의 성사’로 주목받았던 역사적 도록이다. 1920년대 중반에 제작한 <풍경>, <조춘소경>은 암갈색의 주조를 보이지만, 1930년대 중·후반의 <처의 상>, <임금원>, <남향집>은 밝고, 명랑한 색채로 인해 인상주의 화법의 정점을 이룬다. 남도 서양화단을 이끌다 (1946~1970) 오지호는 1948년 광주에 내려와 ‘광주미술연구회’를 재결성하고, 광주화단에 첫발을 내딛는 《오지호화백작품전》을 열어 35점의 인상주의 화풍을 대중에게 선보인다. 1949년 조선대학교 교수로 초빙된 이듬해, 6·25전쟁이 발발하자 고향 동복에 피신했다가 인민군에 끌려가 좌·우익의 소용돌이 속에서 생사의 고비를 넘긴다. 1953년 광주 지산동 초가에 정착한 오지호는 3년의 공백을 뒤로하고 한국전쟁으로 불타버린 원효사의 중창 불사를 위해 <아미타후불탱화>(1954) 제작을 맡아 다시 붓을 들게 되었고, 이후 자신의 초가 맞은편에 7평의 목조화실을 짓고 창작활동의 산실로 삼는다. 그는 구상미술과 추상미술이 양립함에 따라 지역 단위로는 최초로 《전라남도미술전람회》(1965)을 창설하여 미술계의 흐름을 결속시키고, 문화진흥을 위해 남도예술회관(1978) 건립 운동에 앞장서는 등 광주·전남 서양화단 구축의 견인역할을 한다. 이 시기의 작품들을 보면, 1950년대 후반 우장춘 박사(1958, 1959)와 만남으로 온실의 식물과 정물을 그리며 형과 색의 변화를 시도하나 1960년대 후반까지 데포르메Deformer에 기반한 대상의 본질 탐구, 감정이입의 태도를 견지함으로써 산과 바다·항구 풍경을 비롯하여 목련, 모란, 열대어 등 자연의 생명력을 지속해서 탐색한다 한국 인상주의를 구현하다 (1971~1982) 오지호는 1970년대에 들어서면 빛과 색채로 구축한 남도의 풍경뿐만 아니라 이국의 실경을 소재로 색채의 대비, 붓질의 속도감, 부드러운 빛의 변화를 포착하여 강렬하면서도 서정적인 정취를 구사한다. 그는 자연과의 교감을 통해 체득했던 독자적인 방식으로 사생하거나 직접 찍은 사진들에 근거하여 대상과 빛의 인상을 주정적인 색채로 묘사한다. 또한, 후기로 갈수록 화면에 보라색을 과감하게 사용함으로써 춘경·하경·추경·설경·해경, 설원, 녹음 등 그리는 모든 풍경에 청정한 대기와 생명감을 불어넣는다. 특히 1974년, 1980년 총 14개월에 걸친 두 차례의 유럽·아프리카 북부여행을 통해 그려낸 풍경들은 오지호 특유의 화면을 주조하는 주정적인 색채가 돋보인다. 오지호의 마지막 유작인 <쎄네갈의 소년들> (1982)은 미완성임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의 모습에서 발산되는 생명력, 그 원초적 힘에 대한 애정을 담고 있다. 말년에 제작된 작품들은 마티에르 효과와 색채의 대비로 인해 표현주의 기법과 추상적인 경향을 보이나 이는 도리어 오지호가 걸어왔던 한국 인상주의 미학을 더욱 공고히 한다. 오지호는 화가로서 팔레트 위의 철학을 말한다. “빛의 약동!, 생의 환희! 자연에 대한 감격-여기서 나오는 것이 회화다”라고. - 전남도립미술관 오지호 <습작(나부)>, 1928, 캔버스에 유채, 77x51cm,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오지호 <남향집(사양)>, 1939, 캔버스에 유채, 80x65cm,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오지호 <임금원 林檎園>, 1937, 캔버스에 유채, 71.3x89.3cm, 개인소장, 오지호 <무등산록이 보이는 구월 풍경>, 1949, 캔버스에 유채, 24.5x32.5cm,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오지호 <무등산>, 1968, 캔버스에 유채, 60x72cm,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이전글 다음글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