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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지호 회화에서 생명성과 남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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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조인호 작성일25-01-06 19:32 조회31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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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지호 <내장산 설경>, 1972, 캔버스에 유채, 52x71.5cm,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오지호 회화에서 생명성과 남도성

    오지호와 인상주의 / 2024.11.15-2025.03.02 / 전남도립미술관

     

    오지호 회화의 생명성

    (앞글 생략) 오지호는 회화예술은 생명성, 정신성, 형식성의 완전한 조화로 전인적인 미를 구현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면서 ()의 발현에 의하여 생명성미를 자각한 인상파에 이르러서 비로소 미의 3요소가 통일되고 조화된 회화가 창조되기 시작하였다.”예술은 생명 본성의 실현이고, 생명은 생의 긍정을 그 본성으로 한다. 예술은 생명의 실재한 모양이다. 생명이 그 본연한 상태에서 활동할 때-생명이 그 본성의 요구대로 살 때 그것은 절대한 환희다. 즉 생의 환희에서 사는 것이 예술이다.”순수회화론(동아일보. 1938.8.23)에서 언급한 바 있다.

    그러면서 광과 생명체는 밀접 불가분의 일체를 이루고 있다. 색이라는 것은 태양광의 복사선 중 일부의 가시적 현현(顯現)이다. 그것은 광선과 생체의 상호작용에 의하여 생()한 일종의 새로운 광선이다. 어떤 광파가 육체 생리에 적합한 것일 때 쾌를 느끼고 부적합한 것일 때 불쾌를 느낀다. 미의 궁극은 실로 생명체의 육체 생리에 근원하는 것이것을 생명성 쾌감이라고 부르려고 한다.”(미의원리, 예술논문집16, 대한민국예술원, 1977)

    오지호는 이 같은 회화의 원리로서 광()과 색()을 새롭게 발견한 것은 19세기 유럽 인상파였고, 그것은 실로 회화의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변혁이었다고 보았다. 다만 그들은 광학적 원리로서 감각적 빛과 색을 탐닉하였다고 한계를 지적하면서, 그보다는 자연과 화가 사이의 생명성의 작용으로서 태양광으로부터 비롯된 빛과 색채에 대해 화가가 느끼는 감성적 교감을 회화의 근본으로 여겼다.

    (중략)

    오지호의 회화의 남도성

    오지호는 한국 근·현대미술에서 주체적인 작품과 회화론으로 독자세계를 구축한 구상회화의 대부이면서 또한 호남화단의 거목이다. 일본 유학과 송도(개성) 교직 시절을 제외하고는 40대 이후 1982년 타계하기까지 35년을 광주에 터를 잡고 살았다. 10여 년 조선대학교 교수로 재직하는 동안 제자들을 길러내고, [전라남도미술전람회]를 창설해서 지역미술의 성장과 많은 인적 자원들을 육성하는데 힘썼다. 거주기간이나 작품활동에서 남도와 밀접히 연결되는 것은 물론, 남도의 자연이 화제나 회화적 특징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지역의 어른으로서 존경받는 여러 활동을 펼쳤지만, 회화론이나 다른 집필, 작품 소재에서도 딱히 남도를 내세우지는 않았다.

    오지호는 회화에서 자연에 대한 생리적 반응을 순수 심적 작용으로 보았다. “감성이란 인간의 육체생리에 뿌리박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감성이란 생명의 상태를 감각하는 능력이다.”(앞의 예술논문집)며 인성의 발현인 예술은 지성이나 의식의 작용이 아닌 생명체 간의 순수한 본성 작용으로서 자연에 대한 감격의 표현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런 면에서 40대 이후 그의 회화도 삶의 주 거처인 광주 주변, 남도의 자연과 밀접히 연결되고 있다. 활동은 민족적이고 나라의 사회 문화를 바르게 가꿔가는데 폭이 넓혀져 있었지만, 그림은 화제를 찾아 일부러 다른 지역을 찾아다니기보다 특별한 여행 때가 아니면 생활 가까이에서 자연풍경을 화폭에 담곤 하였다.

    오지호 회화작품들은 담겨진 풍경과 정취가 남도의 온화하고 밝은 자연 풍토를 느끼게 한다. 중년 이후를 무등산자락 아래 지산동 초가에서 지냈는데, 화순의 모후산 아래 동복 고향마을과 비슷한 환경이어서 더 편안해 하였다. 의식은 시간과 장소를 떠나 자유로웠지만 도회지 변두리 당산나무 옆 소박한 초가삼간과 볕이 잘 드는 아담한 작업실에서 그림 그리고 글 쓰며 마음의 평온을 찾았었다. “내가 기온이 따뜻한 것을 좋아하는 것은 어렸을 적부터 일이니까 아마 하나의 체질일 것이다. 나는 기후대 중의 온대라는 말만 들어도 정다움을 느낀다. 내가 세계에서도 우리나라에, 우리나라에서도 남쪽에 태어난 것을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계간미술, No.8, 1978)고 밝힌 바 있다.

    오지호는 광주의 상징이자 지산동 집 가까이에 있던 무등산을 좋아했는데, “무등은 그 이름처럼 크고 포용하고 그냥 어머니 같은 산이다. 슬픔과 기쁨, 비통과 울분을 산화시켜주는 것 같아 항상 산을 바라보며 살았다. 크다는 말은 그 안에 덕과 진리, 정의가 있다는 말로 통한다.”(동아일보, 1982.5.22)고 했다. 1937<임금원> 때와는 다른 느낌의 남도 과수원 풍경화들이 지역 화단에 하나의 전형이 되기도 했는데, “여기는 나주, 낮은 구릉과 들 군데군데 산재해 있는 잡목림 사이에 분홍빛 복숭아 꽃밭을 배경으로 하연 꽃이 송이송이 달려 있는 배나무, 그 청초한 정취, 이는 하나의 꿈이리라.”(신동아19714월호 표지말 중)고 적기도 했다.

    오지호의 풍경화는 너른 전경을 멀리 바라보기보다는 자연의 일부를 가까이에서 마주하는 화면 포치가 많다. 자연을 관망이 아닌 교감의 대상으로 대하는 관점이다. 남도인의 삶은 자연을 관망하기보다 그 자연에 묻혀 생을 일구고 생멸순환하는 자연의 이치 속에서 인생을 체득해 왔다. 자연은 삶 바깥의 객체가 아닌 비비고 기대고 더불어 사는 생의 터전이었다. 오지호의 인상주의적 회화가 남도인들에게 친밀감을 주고 주류화풍으로 폭넓게 확산된 것은 이 같은 자연을 담아내는 관점과 감성이 정서적 유대감을 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온화하고 밝고 명랑한 햇살 가득한 남도의 기후와 풍토, 평온하면서 생기 가득한 주변 산야, 또 다른 삶의 터전으로 생을 부대끼며 살아가는 바다의 활력, 그런 자연에서 느끼는 정서 이상의 감흥이 오지호의 회화와 지역민들의 감성에 이심전심으로 교감되었던 것이다. (이하 생략)

    - 조인호 (광주미술문화연구소 대표), 아트 인 컬처, 20251월호에서 발췌

    오지호,잔설,1978,캔버스에유채,38.3x53.5cm,전남도립소장.jpg
    오지호 <잔설>, 1978, 캔버스에 유채, 38.3x53.5cm, 전남도립미술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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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지호 <무등산록이 보이는 구월 풍경>, 1949, 캔버스에 유채, 24.5x32.5cm,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오지호,추광,1960,캔버스에유채,53.5x60.5cm,국현소장.jpg
    오지호 <추광>, 1960, 캔버스에 유채, 53.5x60.5cm,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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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남도립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오지호와 인상주의'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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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남도립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오지호와 인상주의' 아카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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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남도립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오지호와 인상주의' 유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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