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영기 기획초대전 ‘발췌된 풍경, 덧입혀지는 이야기’ 페이지 정보 작성자 윤규홍 작성일25-02-26 11:55 조회184회 댓글0건 관련링크 이전글 다음글 목록 본문 서영기 <창에 그린 마음>, 2025, 캔버스에 유채, 45.5x37.9cm 서영기 기획초대전 ‘발췌된 풍경, 덧입혀지는 이야기’ 2025.02.26-03.20 / 예술공간 집 예술공간 집이 기획초대한 서영기의 ‘발췌된 풍경, 덧입혀지는 이야기’는 작가의 최근작 회화 30여 점이 전시된다. 서영기는 2024년 광주시립미술관 레지던시 프로그램으로 뮌헨의 레지던시에 참여하는 등 최근 국내외 활동을 넓혀가며 활발하게 작품활동을 전개해 오고 있다. 이번 전시는 예술공간 집과 작가의 협력으로 이루어졌다. 서영기는 예술공간 집이 최근 지속해 온 [넛지프로젝트] 첫 해(2022) 참여작가이기도 하다. - 편집자 주 어둠과 고요로 이끄는 그 무엇 화가 서영기는 이번 개인전에서 일종의 숨바꼭질을 벌인다. 화가에게는 익숙한 지점을 아무도 모르게끔 그리는 것도 기술이다. 여기서 그게 가능한 건 배회의 동선 안에 낚인 풍경이 그 안에 담겨있었을지도 모르는 사건을 덮었기 때문이다. 웬만한 경우가 아니면 건물 반 간판 반의 도시 경관을 소재로 채택하지 않는 부분 또한 크다. 관객은 술래가 되어 작품 속 기시감 어린 장소가 어디인지 하나씩 찾아야 한다. 물론 그림을 재미있게 보는 데는 이 방법만 있는 게 아니다. 작가의 완성작을 통틀어 보면, 같은 세대 화가들이 공유하는 틀을 확인할 수 있다. 그 형식을 문학 연구에 빗대면 블라디미르 프로프가 했던 민담 형태 분석처럼 이끌 수도 있다. 즉 시공간을 초월한 형식적 공통점이 존재한다는 가정은 이런 개인의 자취도 객관화할 여지를 만든다. 다름 아니라 미술사 방법론이 그렇다. 양식의 경향은 미술가, 남자, 더 성숙한 단계로 접어드는 청년기 같은 인구통계적 변수로 절편을 썰어서 볼 성질이 아니다. 이처럼 한국 동시대 회화 경향 속에서 작가의 지점을 확인하고 전후좌우에 있는 딴 화가들 작업과 대조한 다음 서영기 유니버스를 염탐하는 일은 필요하다. 그렇긴 한데 내게는 그런 능력이 딸리는 데다, 한 서양미술사 연구자가 균형 잡힌 비평으로 서영기 작가의 회화를 관통한 일이 오래되지 않았다. 나는 이 작업에 관한 학술적 접근을 양초롱 선생의 비평으로 마주했으며, 나는 나대로의 제안을 한다. 전시장의 평균 온도를 재는 데 관심을 둔 나는 작품을 둘러싸고 작가와 관람자가 벌이는 게임을 기다린다. 그러면 필자는 양쪽을 지켜보는 입장인가? 그럴 리가. 당연히 관람자 처지다. 숨바꼭질에 심판이 어디 있나? 이번 개인전 ‘발췌된 풍경, 덧입혀지는 이야기’는 작가에게 언제부터 언제까지 있었던 상황을 뽑아 비춘 거울과 같다. 이 거울에는 미지의 장소만 있을 뿐, 주인공도, 딴 사람도, 그가 겪은 일도 빠졌다. 거울 없는 거울은 오직 그의 내면을 내밀하게 비추는 반영체다. 거기에는 고요와 어둠이 내려앉았다. 그림 속에는 사람이 없으니까 목소리 역시 없다. 타인한테서 들을 말이 없으며, 본인이 무수하게 내뱉었던 독백도 없다. 어둠은 소극성과 두려움의 조건이며, 적막함은 고립이나 결핍의 배경이다. 허나 그것은 한편으로 자기 충족의 표명이기도 하다. 더는 생짜배기 예술가가 아닌 그는 평론가 같은 다른 이들의 말과 글을 통해 자기 생각을 전할 단계에 올라섰다. 작가는 그저 감각의 날을 벼리고, 행여나 채우지 못한 숙련 상 맹점을 메우는 데만 힘 쏟으면 된다. 그는 한 지역을 기반으로 삼은 무대에서 청년 작가로 이룰 수 있는 영예를 하나씩 누리고 있다. 예술공간 집에서 갖는 초대 전시도 그중 하나다. 하지만 새로운 기회나 보상은 그것들과 맞먹는 무게를 지니는 법. 전시를 앞두고 작가는 기대 못지않은 부담감을 혼자 감당해야 했을 것이다. 생활 규칙을 통해 단순함을 이어가려는 작가도 다가오는 큰일 앞에서는 평정한 삶의 흐름이 망가진다. 이게 꼭 나쁜 것만은 아닌 게, 불안정성의 문턱에서 겪는 심한 떨림이 창발성의 연료다. 이때 산출물이 참되거나 허튼 예술을 갈라 평가한다. 이 전시를 앞두고 디렉터는 조금은 매몰차게 작가를 요동치도록 이끌었다. 그 결과는 모두가 보고 있는 이것이다. 실은 거의 처음부터 완성형에 가까웠던 서영기 회화가 미술관이 아닌 갤러리에서 본격적으로 공개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작가에게 이 과업은 창작 개념을 다시 정돈하는 계기일지 모른다. 개인전에 새로 등장한 연작은 경이롭지만 그렇다고 크게 당혹스럽지 않은 작품 목록의 합이다. 음악의 푸가 기법처럼 중첩되고 반복되는 줄기의 첫 소절은 21세기식 르네 마그리트 화풍이라고 이름 붙이고 싶은 도상이다. 박하게 따지면 시대적 경향에 올라탄 절충주의 같던 이미지는 자기 폄하와 초월 사이를 왔다 갔다 하는 역설을 발판 삼아 재현성과 환영성 사이 어디쯤에 고유한 스타일을 새긴다. 작업이 도달한 오리지널리티는 작가 자신을 옭아맨 습속도 한몫했다. 이 특징은 작가에게 친숙한 화폭이 세로 규격이라는 점이다. 취향의 좋고 덜 좋고는 사람마다 다르지만, 문화유물론자들은 원인과 결과를 늘 따진다. 그들 식으로 생각할 때, 책은 기본적으로 세로 형식으로 소통한다. 반대로 스크린이나 TV는 가로 형태다. 광각 폭을 담으려는 풍경화는 가로를, 한 사람에게 집중하는 초상화는 세로 그림이 화면 구성에 더 수월하다. 그런데 서영기의 풍경 그림은 세로가 주종을 이뤘다. 스마트폰으로 소재를 담기 때문이란 건 어렵지 않은 추론이다. 촬영 방향을 반대로 돌리면 셀카가 되고, 그것은 거울의 대체 기능이다. 거울도 대개 세로 모양이고, 앞서 내가 말한 ‘서영기 그림은 또 하나의 거울’이란 명제도 어쨌든 설득력을 갖추는 셈이다. 예술 체계와 기술 체계를 묶은 문화 양상은 끊임없이 변화하기 마련이고, 새로운 시각 매체의 등장으로 이 그림과 해석이 더는 신선하지 않을 때가 올 거다. 그건 그때 가서 고민할 일이다. 앞으로 길게 펼쳐진 생애 동안 한 미술가의 작품이 한결같으리라는 생각은 순진하다. 예술가는 그 시대에 맞게 진화한 촉수로 자신이 가장 희열을 느끼는 작품을 펼치면 그걸로 충분하다. 특별히, 서영기 작가의 작품에는 그 밑바닥에 허무가 깔린 만큼 큰 변화 폭은 없을 것 같기도 하다. 작가가 작업에 관해 내게 했던 첫 마디가 이렇다. ‘나는 그림으로 메시지를 보내기 싫다.” 내 생각엔 그것도 메시지다. 작가가 자기 작업을 객관화하기 위해 끄집어냈던 여러 단어가 있다. 이를테면 외로움, 후회 같은 낱말은 당사자만 독차지한 감정이 아니다. 하지만 일기와 같은 일정 기간 반복해 돌아봄에서 그런 고백이 전형이란 점은 분명하다. 작가가 솔직하고 싶은 만큼 그림은 뭔가를 더 짙게 가린다. 그가 누리고 또 누렸던 행복만큼 짓눌렸던 불행, 혼자 있음을 즐김에도 예술로 소통을 바라는 욕구, 무엇보다도 메시지가 없음을 선언하는 메시지. 이와 같은 미학과 윤리의 논리적 이율배반성은 진선미의 합일을 거스르지만, 예술은 그러한 어긋남도 매혹으로 끌어안는다. 자기모순을 드러내는 데 이 그림들은 편법이나 궤변이 아닌, 작가에게 있어 가장 투명한 술회일지도 모르겠다. - 윤규홍(미술평론/예술사회학) 서영기 <잃어버린 방향(Lost Direction)>, 2024, 캔버스에 아크릴릭, 210×106cm 서영기 <숨바꼭질(Hide and Seek)>, 2024, 캔버스에 유채, 90.9x72.7cm 서영기 <흔적>, 2025, 캔버스에 유채, 65x53cm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이전글 다음글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