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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치호 초대전 '붉은 몸, 붉은 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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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허 경 작성일25-04-04 12:09 조회5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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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술공간 집 기획초대전 박치호의 '붉은 몸, 붉은 바다' 전시 일부

     

    박치호 초대전 '붉은 몸, 붉은 바다'

    2025.04.01-04.27 / 예술공간 집

     

    붉은 몸, 붉은 바다 : 박치호의 눈길, 붓질, 몸짓 

    박치호의 몸은 바다와 분리될 수 없다. 박치호의 몸이 관념이 아니듯, 박치호의 바다 역시 관념이 아니다. 박치호의 바다는 관광객의 눈길이 스쳐 지나가는 바다, 바깥에서 바라본 바다가 아니라, 내가 그 안에 있는 바다, 나의 몸이 놓인 바다, 현실의 바다, 삶의 바다이다. 그리고 이 바다는 내가 거기서 태어나 늘 살아온 바다, 그러므로 내가 잘 아는 바다, 하지만 결코 알 수 없는 바다, 영원히 이해할 수도 붙잡을 수도 없는 바다이다. 이 바다는 박치호에게 삶의 터전이자, 고통의 근원이며, 연민의 상징이며, 또 정확히 그만큼, 유년의 바다, 즐거움의 바다, 돈의 바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넘어서는 무심함의 바다, 내가 영원히 이해할 수 없는 무심한 바다이다. 이 무심(無心)함은 결코 냉혹한 무관심이 아니라, 그저 무심한 바다, 그저 인자하지 않은(不仁) 바다, 하여, 때로 다정한 무관심의 바다, 나를 살게 해주는 바다, 내가 사랑하는 바다, 그러나 언제든 돌변할 수 있는 바다, 무서운 바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죽이는 바다, 밧줄에 걸려 손가락이 잘리는 바다, 그러고도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돌아앉아 잔잔히 물결치는 바다, 늘 거기, 그 자리에 있는 바다이다. 이 바다는 모든 것이자 아무것도 아닌 것이고, 나를 살리는 것이자 나를 죽이는 것이며, 바로 나이자 나와는 전혀 상관없는 것이며, 내가 잘 알고 있는 것이자 내가 전혀 알지 못하는 것, 바로 삶이라는 신비의 상징이다. 이 바다는, 인간 없이는 세계도 없듯, 인간이 고단히 몸을 움직여 먹고 살아야 하는 존재가 아닌 적이 태초 이래 한 번도 없듯, 우리가 그 안에서 태어나고 살고 죽는 바다, 그러니까 이 세계 자체의 상징이다. 그리하여, 이 바다는 나를 죽이는 것인 줄 알았더니, 나를 살리는, ‘나의 모든 것이자, 나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내가 가장 잘 아는 것이자 결코 알 수 없는, 알 수 없을, 곧 타자성의 상징이다. (중략)

    박치호는 이 잘 배어듦, 닳음, 찌듦, 겪음, 숙성의 미학이라 불러야 할 바닷사람들의 다양한 모습을 그려낸다. 그리고 이 몸의 미학, 붉은 바다 아래 붉은 몸의 미학, 그것이 박치호의 미학이다. 이것은 분명 하나의 사회적 미학이자, 노동과 삶의 미학이며, 무엇보다 휴머니즘의 미학이다. 이 미학에서 아름다움과 삶을 () 살아옴 또는 견뎌옴은 겹친다. 그것은 이미 미()이자, 미덕(美德)이다. 그것은 붉음의 미학이다. 이때의 붉음은 삶이다. 삶을 잘 견뎌온, 살아온 인간을 그릴 뿐이다. 박치호가 바다나 의자 또는 어떤 사물을 그릴 지라도 그것은 늘 인간의 세계이다. 이것은 인간이 있고 인간 아닌 것을 인간화하는인격화의 방법론이 아니라, 처음부터 삶의 세계와 아름다움의 세계가 분리되지 않은, 분리된 적이 없는, 세계의 미학이다. 박치호의 미학은 생활세계의 미학, 예술사회학의 미학이다. 왜냐하면, 박치호의 세계에는 생활세계의 바깥이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박치호 작업의 역력한 한계가 아니라, 박치호가 자신만의 작업을 할 수 있는 가능 조건이다. 박치호에게서 포퍼의 물리적 세계(세계1)와 심리적 세계(세계2), 그리고 수학ㆍ예술 같은 독립적 세계(세계3)는 모두 겹친다. 따라서, 박치호의 아름다움은 인간의 아름다움, 정확히는 삶을 살아온 이들, 살아가는 이들의 아름다움이다.

    나는 삶의 풍파와 세월을 겪은 나이 든 몸이 조형적으로 더 아름답다고 느낀다. 사람들이 말하는 섹시함 같은 것은 내게 그렇게 매력적이지가 않다. 모든 화가처럼, 나는 내가 보는 아름다움, 내가 느끼는 아름다움을 그릴 뿐이다.”

    (중략) 박치호의 몸과 바다는 모두 이미 사회적 자연, 사회적 존재 들이다. 그리고 이렇게 자연과 인간이 얽혀서만 존재하는 사회적 존재론 안에서는, 글자 그대로 모든 것이 사회적이다. 이 경우, 사회란 문화에 다름 아닌데, 문화란 곧 무엇인가를 보게 만드는 동시에 보지 못하게 만드는 것, 달리 말해 인식을 ()가능하게 만드는 사회적 필터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박치호는 단순히 여수 사람 또는 여수의 화가가 아니라, 여수의 사회학자ㆍ문화인류학자이다(여하튼 그의 작업은 그러한 기능을 수행한다). 박치호의 지각과 인식의 체계는 처음부터 인간과 관련된 자연만 있다. 박치호의 바다와 개펄 그리고 땅과 뭍은 기억 나는 가장 어린 시절 이래 늘 놀이의 장소이자, 자본과 유통의 장소, 상업과 산업의 장소이다. 온갖 상징과 기호 들이 교차하는 이 바다와 뭍 그리고 그 사이는 모두 예외없이 관심과 이익 그리고 이해타산(이 단어들은 모두 interest의 번역이고, 어원적으로 interestinter-esse, 곧 사이-존재를 의미한다. 의미는 사이 곧 관계에서만 생기는 것이다)의 장소이다. 이 모든 것은 코드화라는 형태로 그 안에 사는 사람들의 몸에 새겨져 있으며, 박치호 또는 누군가에 의해 의식적ㆍ무의식적으로 묘사되면서 스스로 변화한다. 가령 박치호의 세계에서는, 가령, 문화인류학적 이유이든 무엇이든, 배를 탈 수 없었던 옛 시대에, 여성의 영토가 땅, 뭍이라면, 바다는 늘 아버지의 영토임을 의미한다. 박치호에게 땅은 어머니 대지이며, 바다는, 성모가 아닌, 성부(聖父)일 뿐이다. 바다가 양()이고, 땅이 음()이다. 하늘과 땅의 천지 음양이 아니라, 바다와 땅의 해지(海地) 음양이다. 천원지방(天圓地方)이 아니라, 해원지방(海圓地方)이다. 바다가 보편이며, 뭍이 특수이다. 마찬가지로, 박치호의 우주에서, 박치호는 자신을 포함한 모든 인간을 바다와 뭍 사이에 놓인 자들로 생각한다. 박치호는, 자신을 그리고 모든 사람을 바다와 뭍, 아버지와 어머니, 남성적인 것과 여성적인 것 사이의 만남, 그 묘합(妙合)이 낳은 존재, 그 사이, 경계에 놓인 존재, 그 사이와 경계를 사는 존재로서 바라본다. 이 모든 것은 아마도 박치호가 속한 사회적 존재론, 곧 문화인류학적 한계/조건을 이룰 것이다.

    - 허 경 (철학학교 혜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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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술공간 집 기획초대전 박치호의 '붉은 몸, 붉은 바다' 전시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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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치호 <붉은 몸>, 2025, 천에 아크릴칼라, 259.1x387.8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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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치호 <붉은 몸>, 2025, 259.1x193.9cm / <붉은 손>, 2025, 65.5x96cm, 천에 아크릴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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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치호 <Torso>, 2024, 종이에 아크릴릭, 67x97cm / <침묵>, 2025, 천에 아크릴칼라, 91x72.5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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