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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준영 초대전 ‘밤을 딛고, 켜켜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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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고윤정 작성일25-11-27 15:49 조회11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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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술공간 집 기획초대전- 윤준영의 '밤을 딛고, 켜켜이'

     

    윤준영 초대전 밤을 딛고, 켜켜이

    2025.11.25-12.14 / 예술공간 집

     

    태도믿음될 때..

    윤준영의 밤을 딛고, 켜켜이는 집과 같은 구조물과 달, , 나무 등 자연물을 결합한 일종의 풍경화 같은 작품들에서 돌의 형상에 좀더 집중한 모습을 보인다. 돌은 사실 종교와 시대를 넘어 누구에게나 건강과 안녕을 기원하는 믿음의 대상이기도 하다. 여러 신화에 따르면 신성한 탄생, 생존의 염원을 상징하기도 하고, 마을마다 성황당에 돌을 쌓아 소원을 비는 것이 대표적인 믿음의 표시이다. 또한 불교에서는 불상을 새기거나 연못을 만드는 등 돌이 갖고 있는 믿음의 상징성은 우리 삶 곳곳에 스며들어 있다.

    쌓는 돌

    윤준영은 산을 거닐며 방문객들이 서로 말하지 않아도 돌을 만나면 하나 둘씩 탑을 쌓는 모습을 포착하면서 돌에 대한 경외심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우선 하나의 돌이 각기 다른 현재의 모습을 갖추는 데에는 빛과 바람, 비 등 자연적인 요소의 영향이 크다. 그러나 그 시간성은 천년, 이천 년, 수만 년에 달하니 인간의 생애와 비교가 될 수 없다. 자연스럽게 깎이고, 닳으며 둥글게 모양이 잡혀 가는 과정에는 우리가 감히 상상할 수 없는 사연과 굴곡, 다시 일어섬의 반복되는 과정이 있기에 돌을 보며 나의 염원, 우리의 안녕을 투영한다.

    윤준영의 돌은 위태롭게 보이지는 않지만, 이리저리 쌓이면서 균형 감각을 필요로 한다. <Belief>(2025)처럼 화면 가득 크기별로 쌓인 돌도 있지만, <불확실한 믿음과 그럼에도 불구하고>(2025)처럼 작은 돌 하나로 간신히 연결되며 균형을 잡아가는 돌도 있다. 이는 선형적인 시간성이 반영된 것을 넘어 상대적으로 발생되는 소용돌이의 시간, 눈에 보이지 않는 과정들이 연결되면서 지금의 형태를 갖게 되는 것으로 여러 속성들은 끈적거리며’, 때로는 들러붙으며조금씩 더 단단함을 보이는 결과가 된다. 각기 다른 객체가 다른 속성의 관계성으로 연계되고, 인간, 벌레, 나무, , 낙엽, 나무의 뿌리 등 사물들은 초연결의 상태에 이른다.

    돌의 시간성은 사실상 인간이 살고 있는 도시에서는 너무나 먼 세계의 끝의 이야기이다. 티모시 모턴(Timothy Morton)하이퍼객체에 의하면 이같은 끝에 있는 이야기들은 결국 인간의 사회적 공간에 영향을 끼치며, ‘취약함으로 시작된 비대칭성의 속성에서 각 개체의 서사가 시작된다. 윤준영은 이를 불안이라는 단어로 드러내고 있다. 윤준영이 뜻하는 불안은 예술가라는 어딘가에 속하지 않고 스스로 모든 것을 헤쳐 나가야 하는 직업적 특성에서 오는 것이기도 하다. ‘취약함’, ‘약한 연결고리가 드러남으로서 윤준영의 이야기와 서사가 그 지점에서 시작한다.

    이는 심각한 관계의 상처, 사회에서의 외면보다는 근본적으로 창작자에게 주어진 임무의 연속성에 대한 물음이다. ‘다음의 창작을 이어갈 수 있을까?’, ‘예술가로서 자리잡을 수 있을까?’와 같은 예술가의 삶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표는 오히려 작가를 작은 불안감에서 다시 일으켜 세우는 동력이 된다. 작가가 느끼는 불안감은 곧 믿음이 되며, 이는 일종의 예술가이기 위한 신념으로 변모한다. 윤준영은 현상과 사물 사이의 간격에서 시작한 약함의 지점으로 그 불안함을 드러내며 지금의 현상이 명료해지는 과정속에 스스로를 던진다.

    그 안의 작은 나

    돌과 함께 등장하는 소재는 작은 집이다. 한 눈에 보아도 작은 집은 작가 자신을 뜻하는 것처럼 보인다. 돌이라는 영겁의 시간을 보낸 자연물 앞에서 라는 존재는 한없이 작아지기 때문이다. 작가는 때로는 몇 개의 자아, 때로는 하나의 자아가 돌과 마주하며 하루하루 불안감을 믿음으로 바꾸어 가고 있다. 각각의 개체가 만들어내는 초연결적 현상은 단순한 시스템, 객체의 집합이 아니다. 각 개체가 경험하는 과정이 중요한 시점에서 이들은 하나의 생태계를 이루며, 각기 존재하고 또다시 연결된다. 이때의 생태계는 실제로 눈에 보이는 생물학적인 생태이기도 하지만, 결국 생물학적 세계를 연결하기 위해서 서로에 대한 신념과 신뢰, 존재에 대한 인지가 있어야 하기에 물리적 실재와 마음 속의 생각들은 계속해서 변주하며 직접적으로 연관된다.

    <같은 믿음 위에>(2025), <연약하고 무른, 때때로 무거운>(2025)에서처럼 작은 집’, ‘작은 나는 돌과 관계하기도, 관계하지 않기도 하면서 서로의 세계에 젖어 든다. ‘작은 집은 거대한 돌을 지탱하기도, 돌 안에 숨어 있기도 하면서 돌이 마모되고, 둥글게 되는 과정을 조용히 지켜본다. 작은 집이 여기저기 나타나면서 돌 옆에 꼭 붙어 있는 모습은 오랜 시간 예술계에 머무르고 싶은 작가의 염원이 그대로 전달된다.

    돌은 또 다른 돌과의 관계성에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낸다. 돌은 혼자가 아니며, 하나씩 쌓여 있거나, 옆에 있음으로 인하여 그들 간의 밀고 당김의 감각을 보인다. 실제 돌을 갖다 놓거나, 설치 작업과 회화 작업이 하나로 어우러지면서 그림 내부의 텐션은 외부의 관계성으로도 발전한다. 윤준영의 작업에서 리듬이 느껴지는 것은 작은 집-거대한 돌- 작은 돌- 두 개의 돌- 4, 5, 8개의 돌로 이어지는 변환의 지점일 때문일 것이다. 이같은 관계성과 리듬은 각기 하나하나 돌에 새겨진 특유의 무늬에도 적용이 된다. 길게 가로지른 무늬에서부터 포근한 담요처럼 돌을 덮은 무늬까지 화면을 가로지르는 돌의 형태는 그 자체로 하나의 어우러짐을 드러낸다.

    윤준영의 불안은 예술가로서의 하루하루에 대한 태도를 낳고, 그 태도는 다시 작가의 예술가적 신념으로 변환되며, 관객은 그렇게 쌓인 돌을 보며 다시 자신의 안녕과 기원을 그림에 담게 된다. 하나의 정갈한 톤으로 단단하게 쌓여가는 윤준영의 감각이 관객에게 긍정의 톤으로 닿기를 기대해 본다.

    - 고윤정 (플로우앤비트 디렉터)

    불확실한 믿음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2024 장지에 혼합재료110×100 .jpg
    윤준영 <불확실한 믿음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2024 장지에 혼합재료, 110×100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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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준영 <디딜 곳>, 2025, 장지에 혼합재, 110x100cm
    Belief, 2025, 장지에 먹, 채색, 오일파스텔, 90.9×72.7cm_.jpg
    윤준영 <Belief,>, 2025, 장지에 먹, 채색, 오일파스텔, 90.9×72.7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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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준영 <믿음>, 2024, 장지에 혼합, 72.7x60.6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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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준영 <기도하는돌>, 2025, 가변설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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