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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땅의 기억을 채집하며; 최근희의 작품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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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고영재 작성일25-12-27 11:53 조회6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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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질경이(Asian plantain), 2025, Digital inkjet print, 127x101.6cm, ed.10.jpg
    최근희 <질경이>, 2025, Digital inkjet print. 127x101.6cm

     

    땅의 기억을 채집하며; 최근희의 작품세계

    2025.11.26-12.14 / 해동문화예술촌

     

    디지털이 이미지를 즉각 생성한다면, 아날로그는 시간, , 행위, 물질이 서로의 흔적을 교환하며 더딘 공조의 과정을 거친다. 이 과정에서 발생하는 우연과 불완전성, 뉘앙스 등은 디지털이 대체할 수 없는 밀도를 구축한다. 작품세계에 아날로그의 과정과 디지털의 방법론을 모두 함의하는 최근희의 작품은 전통적 개념의 사진에서 탈피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사진이 시작될 때 품었던 질문을 상기한다. 사진은 빛이 물질의 표면에 남긴 화학적 흔적에서 비롯된 매체다. , 사진에서 이미지란 단순히 세계의 복제가 아니라, 세계가 남긴 흔적(trace)이자 지층(layer)이며 시간의 침전물이다. 최근희가 특정 장소의 잡초와 흙을 채집하고, 그 흙으로 배경이 되는 물질을 염색하며, 잡초의 생명력과 회복성을 이미지로 전환하는 과정은 바로 이 사진의 원리, 빛과 물질이 만나는 현상을 확장하는 행위와 닮았다. 향수자는 작업의 결과물에서 종종 그 기저에 깔린 사진을 인지하지 못하지만, 장소와 시간의 역사적·생태적 층위를 담보하는 잡초, 그리고 그것의 재현 방식에서 외부세계와 조우하는 사진 특유의 습성을 제고해 볼 수 있다.

    지속된 자기 투영

    3년째에 접어들고 있는 잡초(The weed) 시리즈는 흔히 예술을 업으로 하는 이들의 창작 습관인 자기 투영에서 시작됐다. 식물도감 등에 분명 이름이 있을 테지만, 이름 없이 살아가는 밟히고 치이는 들풀들을 보며, 소위 잡초와 작가로서의 자아를 동일시 하게 된다. 달리 보면, 들풀 하나하나의 이름을 찾아주고 미적 형식으로 생존의 의미를 되새기는 행위는 철저히 창작의 의도에서 단행된 작업이라기보다는, 그 스스로 투영과 치유의 과정에서 길어 올린 태도적 산물일 것이다. 작업의 과정은 크게 다섯 단계를 거친다. 먼저 보통의 길거리, 혹은 특정 장소에서 풀을 채집하고 다음으로 채집된 풀을 압착한다. 압착된 풀은 촬영과스캔을 거친다. 여기까지가 기본 레이어이다. 종이나 천을 염색하여 작품의 배경으로 삼는데, 커피 찌꺼기나 최근 들어선 채집된 곳의 흙으로 배경이 되는 물질을 물들인다. 이 네 번째 단계가 또 하나의 레이어이다. 결국에는 언급한 두 레이어를 디지털의 방법으로 합성한다. 그 과정에서 이미지, 배경, 대상물의 윤곽선 등은 반전되며 청사진(Cyanotype)의 미감과 유사한 짙은 푸른색, 솔라이제이션(solarization)에서의 광학적 반전 효과와 비슷한 질감들이 도출된다.

    아날로그 이미지를 디지털로 치환했지만, 디지털 매체의 정교함이 외려 아날로그의 감수성을 끌어내는 점은 최근희 작업의 독특한 성질이다. 작가 스스로의 표현대로사진 매체의 언어로 봐줬으면 좋겠다. 셔터를 누르는 행위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대상(objet) 선택에서 시작해 하나의 이미지가 나오기까지의 과정들을 알아줬으면 하는 바람은 몸을 통해 장소와 접촉하며 그 기억을 물질적으로 옮겨오는 과정 자체가 그저 풍경을 기록하는 종류의 시각 채집은 아니기 때문에 비롯된 소감이다.

    작가는 장소에 남아 있는 물질적·비물질적 흔적을 직접 손에 담아 옮겨오며, 그 과정 자체를 하나의 서사로 구축한다. 최근희가 채집한 도깨비가지, 민망초, 청비름, 애기나팔꽃, 털개구리미나리, 여우팥, 털까마중, 개맨드라미 등은 작명되기까지의 저간의 사정들을 내포한다. 그가 다룬 들풀 중에는 먹거리가 부족한 시절에 나물로 쓰였던 풀들도 있다. 종국에는 쓰임이 다해 잡초로 명명 되어졌지만, 필요와 불필요, 관심과 무관심에 의해 그 존재 의의가 뒤바뀌는 것은 비단 들풀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생존하는 모든 존재들은 반드시 소멸한다. 이 소멸 또한 살아감의 한 과정으로 인식해야 함을 작가는 끈질기게 뿌리 내리는 잡초를 통해 이야기한다.

    생의 기억이 응축된 장소

    타지역에서 나고 자란 작가가 담양에 정주하면서 천착한 지점은 무엇일까. 서술했다시피, 최근희는 들풀을 매개로 과거의 시간과 현재의 생태를 연결하는 독특한 감각을 보여준다. 작가가 채집한 잡초와 흙은 특정한 시간이 응축된 장소의 층위이며, 땅이 지난한 시간에 걸쳐 저장해온 기억의 조각들이다. 담양에서 이어진 잡초 연작은 흙을 일차적인 재료로 다루지 않고, 기억을 보존하는 하나의 매체, 혹은 역사의 흔적을 품은 증거로 간주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작가는 역사적 사건의 현장, 기억의 형상이 남아 있는 기념 공간과 장소들을 답사하며 흙과 그곳에서 자생하는 식물들을 채집했다. 만성리 관어공원 현충탑의 고사리, 담양역 기초석터에서 발견한 강아지풀과 민바랭이, 담양 중앙공원 내 소녀상 부근의 질경이, 여순사건 민간인 학살 유골 발굴지의 쇠무릎, 담양읍 외다마을 보호수의 닭의장풀 등 과정형의 시간 안에서 뿌리내린 잡초와 잡초가 살아온 흔적들에서 생명의 지속성 및 근원의 생명력을 길어 올린다.

    채집된 흙은 염료로 사용되었고, 천을 물들일 때 발생하는 색의 차이는 매우 미세하지만 결정적이었다. 주변 식생의 조건에 의해 구분되는 토양의 색감은 그 차이가 분명했지만, 염색 과정에서 불순물이 제거되면서 흙의 색들이 점차 비슷해졌다는 결과는 의미심장하다. 장소가 지닌 개별적 차이가 사라지고, 토양이라는 물질의 본질이 드러나는 이 과정은 기억의 표층과 심층, 사건의 흔적과 자연의 순환, 지역성과 보편성을 두루 함축한다. 또한 잡초의 분포는 각 장소의 생태적 조건을 정확히 반영하며, 그 생명력은 문명의 역사보다 오래 지속되는 자연의 질서를 환기한다. 이들은 인간의 기억이 역사적 기념물이나 문헌 속에서 고정적으로 재현되는 방식과 달리, 시간을 흡수하여 생태적 흔적으로 남는 기억의 다른 형식을 보여준다.

    이처럼 최근희의 작업은 기억을 사진적 이미지로 기록하는 방식에서 벗어나 있다. 생태 환경에 의해 구축된 들풀과 토양은 단지 자연적 요소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생과 사, 사건의 발생과 소멸, 환경 변화와 순환의 에너지를 증명하는 하나의 복합적 구조에 다름 아니다. 최근희는 이 구조를 자의적으로 해석하거나 혹은 장소와 결부된 정치·사회사적 메시지를 강요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상태를 시각적 전이를 통해 옮겨온다. 재현이나 복원이 아닌, 땅의 기억을 살아있는 이의 감각으로 다시 체감하도록 만드는 매개적 특질에서 최근희 사진 작업의 의의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작업 과정의 복잡성이 실재성과 기록에 기반한 사진 매체의 긴장감을 고스란히 유도하지는 않는다. 또한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결합은 완성도 면에서 풍부한 결과물을 만들어내지만, 둘의 관계성이 작가 스스로 충분히 논리적이거나 언어화되지 않을 경우, 형식적 병치로 보일 위험도 존재한다. 이는 작업이 발전하고 변화해 가는 과정에서 매체와 개념상의 과제이기도 하지만, 어떻게 작업세계의 특수성을 확장해 나갈지 고민해 봐야 할 지점이기도 하다.

    - 고 영 재 (광주시립미술관 학예연구사 / 미술비평)

     

    둥근가시가지(Red buffalo-bur), 2025, Digital inkjet print, 127x101.6cm, ed.10.jpg
    최근희 <둥근가시가지>, 2025, Digital inkjet print, 127x101.6cm

     

    그림2.jpg.png
    최근희 <고사리>, 2025, Digital inkjet print, 76.2x50.8cm / <동부>, 2025, Digital inkjet print, 127x101.6cm

     

    그림1.jpg.png
    최근희 <깨풀>, 2025, Digital inkjet print, 76.2x50.8cm / <털개구리 미나리>, 2025, Digital inkjet print, 76.2x50.8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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