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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회현실과 미술사 비판적 문제제기 - 서기문 회화미술독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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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광주미연 작성일09-06-05 18:27 조회9,05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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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회현실과 현대미술사에 대한 비판적 문제제기


    ‘우리시대에 예술이라는 게 도대체 뭔가’를 새삼 생각하게 하는 작품전이 열렸다. 그림으로 서술된 작가의 이야기들을 찬찬히 읽어내고, 그 속에 깔린 메시지 뿐 아니라 정형화된 미술사의 상식들에 대해서도 마치 한편의 논문을 읽듯 뭔가를 생각하도록 유도하는 그림들인데, 전시장도 그래서인지 도서관 로비를 이용했다.


    전남대학교 도서관이 문화행사 첫 기획전으로 마련한 서기문의 ‘회화미술독서전’이다. 5월 21일부터 6월 5일까지 열린 이 전시는 대부분 100호 이상의 대작들로 시대현실을 묘사한 사회학적 관점의 작품들과, 교과서처럼 상식화된 현대미술사에 반론과 의구심을 제기하는 인문사회학적 화제의 사실주의 작품들로 크게 나뉜다. 즉, 전체적으로 세밀한 필법의 사실주의 회화를 기조로 삼으면서, 대체로 2004년 5년의 작품들은 경제현실과 사회현상에 대한 비판적 시선을 기록해낸 것이고, 2009년도 작품들은 서양 현대미술사의 몇몇 거장들에 대한 기존의 관점이나 평가들에 대해 그 정당성을 되묻는 논문의 서두 같은 그림들이다.


    가령, 전시된 2004~5년의 작품 가운데 <정체구간>은 비오는 도시의 교차로 앞 정체되어 있는 차량 사이를 오가며 샌드위치를 파는 가두판매원의 V자 손짓에서 2천원짜리 현실과 성공 소망을 중첩시키고, <도시의 명암>에서는 지하도 계단에 술병과 함께 널부러져 잠든 노숙자들 옆으로 양손가득 명품 핸드백과 몇 개씩의 쇼핑백을 나눠 들고 계단을 오르는 중산층 부인의 뒷모습을 교차 대비시키고 있으며, <교환가치>는 똑같이 500원 가격표가 붙은 라면과 펜과 양말을 진열하듯 나란히 묘사하면서 사용가치와 교환가치의 기준은 무엇인가를 묻고 있다. 같은 선상에서 작가 스스로 ‘미술로 말하는 자본론 강의’라고 말하는 <무엇이 가치를 결정 하는가>의 경우에는 부피는 같지만 천지차이로 값이 다른 진열장 속의 쌀 한 되와 명품 핸드백, 양주 한 병을 나란히 묘사하면서 상품화와 가격책정의 정당성을 따지는가 하면, <물신숭배> 같은 경우는 휘황한 도시야경을 배경으로 서낭처럼 금줄을 두르고 쌓아올려진 돈뭉치 탑과 정안수를 묘사하여 현대사회의 물질ㆍ황금 만능주의와 인간욕망을 직설적으로 풍자하기도 한다.


    사회주의적 리얼리즘의 시각을 보여주는 이들 작품들에 대해 “사실정신을 고수하되 현대미술 수준으로 끌어 올린다”는 숙제와 함께 그러면서도 “미술계몽가나 미술운동가를 넘어선 회화미술의 힘에 집중하고 싶었다”는 그는 온갖 소용돌이를 일으키며 흘러가는 현대 자본주의의 나날들 속에서 몇 컷의 단편들을 잡아내어 그에 담긴 사회적 메시지를 환기시키려는 의도를 보여주고 있다. 말하자면, 거대 자본증식과 물질만능에 따른 사회적 양극화 그늘들에 대해 비판적인 시선을 그림으로 드러내는 것인데, 그러나 이러한 시각이 얼마 전 ’80~90년대 사회적 격변기를 뜨겁게 달궜던 현실주의 참여미술이나 인문사회학적 시대의식의 열기가 사그라진 뒤의 연장선이랄 수도 있겠지만, 각각의 회화작품 그 자체만이 아닌 이들을 주제삼아 비평적 논의를 열어가고 싶은 인문학적 연결 시도가 크게 작용한 것이라 여겨진다.


    이런 인문학적 그림그리기는 현대미술사의 몇 지점에 대한 문제제기 작품들에서 훨씬 선명해진다. 이를테면, 전위적 도전들로 현대미술에 반전을 일으켜 이후 전설처럼 추앙받고 있는 거장들을 그림 속에서 불러내 그런 평가나 대우가 정당한지를 따지고 드는 몇 작품을 선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이 가운데, <뒤샹의 재판>은 소변기를 전시품으로 내놓은 이후 ‘기성품의 작품화로 만드는 과정을 생략하면서 현실을 비판하고 견제할 수 있는 유일한 예술적 기제 또한 매장해 버린’데 대하여 ‘전통미술을 와해시키고 ‘표현과 구성을 폐기시킨 죄’로 뒤샹을 법정에 세운 가상재판 그림이다. 아도르노의 [미학이론]이 법전처럼 펼쳐있고 푸른 죄수복에 포승줄로 묶인 뒤샹이 무표정한 얼굴로 재판을 받고 있는데, 방청석에 렘브란트, 일리아드 레핀, 피카소, 백남준 등이 보인다. 고전과 현대미술사의 단원별 대표작가라 할 그들 역시 현대미술사의 평가를 뒤집어보려는 이 불경스러운(?) 재판에서 단지 방청객일 수 있는지를 함께 생각하게 한다.


    그런가 하면 <워홀의 체포>에서는 ‘미술의 상업화’를 비롯한 여러 죄를 묻기 위해 미국 팝아트의 대표작가인 앤디 워홀을 쇠사슬을 채워 체포하고 있다. 워홀을 소환한 검사는 아도르노이고, 그를 압송하는 경찰관은 아도르노 제자 하버마스이며, 변호인단으로 워홀의 가치를 적극 부각시켰던 보드리야르와 단토를, 길을 가로막고 마이크를 들이밀며 미술사의 의문을 던지는 기자로는 검은 한복 두루마기를 걸친 작가 자신을 묘사해 넣었다. 마치 극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듯 스토리가 얽혀있는 이 작품은 결국 예술작품의 상품화 또는 문화산업화에 대한 작가본인의 거부감과 그런 단초를 제공했던 자에 대한 단죄를 가상으로나마 실행시켜보고 싶었던 듯하다. 


    실제로 이런 시각은 작가의 박사학위 논문 <현대미술과 문화산업에 관한 연구>과 같은 맥락에서 짐작할 수 있는데, 전시회 팸플릿에서도 “19세기 미술이 ‘재현과 표현’의 문제를 두고서 고민했고, 모더니즘 기간에는 ‘예술과 사회’의 문제를 두고서 갈등했다면, 우리시대 미술이 씨름하거나 혹은 싸워야 할 대상은… 당연히 미술의 상업주의”라 말하고 있다. 뒤샹이나 워홀로부터 “예술이라는 숭고한 관념과 환상”, 또는 “미술본연의 사회적 기능인 ‘치유와 비판’이 철저히 외면” 당하거나 “경탄스러운 낙찰가를 기록”하는 작금의 현상에 이르렀음을 개탄하며 그들의 원죄를 따지는 것이다.


    그러나, 각 시대와 문화권과 활동배경에 따라 각기 특성과 형식과 가치가 다른 미술 또는 예술적 활동과 새로운 시도들에 대해 특정 이론을 근거로 시대나 문화 자체가 전혀 다른 제3삼자의 시각에서, 그것이 아무리 비판적 논의를 위한 문제제기의 방법이고 가상법정이라 할지라도 지난 시대의 특정작가들을 범죄인처럼 결박된 상태로 공공장소에 세워놓는 것이 과연 예술의 이름으로 적절한지부터 따져 볼 문제인 것 같다. 그들의 시대 속에서 새로운 돌파구가 필요했거나, 당대의 시대문화를 대변하면서도 사회나 대중과 소통하는 방편으로 기존 관념과는 다른 소재나 형식을 내놓았던 것이라면, 더구나 그들의 작업을 미학적으로 또는 상업적으로 확대 재생산해내고 활용한 것은 오히려 비평가나 자본의 생리적 활동들이었다면 그들에게 묻는 죄목이나 방법이 합당한지 짚어볼 필요가 있다. 고대로부터 현대에 이르는 예술의 목적이나 가치라는 게 현세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초월적 힘을 갈구하는 제의의식의 부산물이든, 권력이나 종교 또는 당대 삶의 기록이든, 인간내면의 위무와 치유 아니면 심미안적 정신활동의 확장이든, 예술의 사회적 관계 속에서 비판적 논의나 담론화를 위한 수단과 매개역할이든, 어느 한 가지 잣대로 그 성격과 의미, 가치, 폐해를 판단하고 단죄할 수는 없을 것이다.


    작가는 자신의 작업들을 통해 “관객을 독서시키고 그들을 사유로 유도하는 미술”을 하고 싶었고, 이번 전시는 그 시작이라 한다. 미술작품을 통해 인문학적 길트기나 비판적으로 미술사 다시 읽기는 새삼스러울 것도 없지만 그것이 예술활동과 결과들을 대상으로 할 때는 일반적 사회통념이나 학문의 관점, 논의의 방식과는 다른 여지들이 충분히 감안되어야 하고, 보다 다층적 시각과 해석의 여지들이 바탕에 두어져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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