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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터' - 박철우 개인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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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광주미연 작성일10-11-02 10:00 조회9,08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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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초들의 삶과 이 땅의 역사, 지금 우리 사는 세상사들에 대한 솔직담백 현실주의 회화세계를 펼쳐오고 있는 박철우의 다섯 번째 개인전이 11월 4일부터 10일까지 광주 유스퀘어문화관 금호갤러리에서 열린다. 이번 전시를 앞두고 작가의 예술과 세상에 대한 생각과 작품세계를 찬찬이 살펴 본 미술사가 배종민의 전시평문을 통해 박철우의 근래 몇 년 동안의 작업들을 만나본다.  




    존재와 존재, 그 사이의 그림



    1. 부터와 붓 터


    처음 전시 서문을 부탁받을 때 일이다. 화가의 블로그 이름이 ‘부터’이다. 그는 이곳에서 작품을 살펴보라고 했다. 처음에 나는 ‘부터’를 ‘붓 터’로 잘못 알아들었다. 그러면서 필시 ‘붓 터’란 붓의 흔적 혹은 붓의 터전일 것이니, 그림을 업으로 삼은 화가의 블로그 이름으로 제격이라고 무릎을 쳤다. 그런데 막상 찾아가 보니 ‘부터’가 바른 명칭이었다. ‘부터’와 ‘붓 터’, 이 동음이어(同音異語) 사이를 헤매면서, 원고를 쓰기 쉽지 않겠다는 예감이 들었다.



    2. 역지사지(易地思之)


    작업실을 방문해서 물어보았다. 왜 ‘부터’인지. 곧장 ‘역지사지’라 답변했다. 서로 처지를 바꿔서 생각하면 이해 못 할 일이 없다는 역지사지. 나와 남의 전도(顚倒)를 통해 상통(相通)의 길을 모색하자는, 누구나 수긍하지만 행하기는 어려운 말이 아니던가. 보통 ‘부터’에선 'from-to'의 의미가 감지된다. 역지사지란 나를 떠나 너를 향할 때 비로소 촉발되는 사건이다. 그렇다면 박철우에게 ‘부터’란 어디를 향한 여정일까?


    작품을 둘러보고, 목록을 살펴보았다. <흙으로부터>연작(2005-2010, 25점), <나로부터>(2006), <몽골의 아침으로부터>(2007), <바이칼로부터>(2007), <당산나무로부터>(2008), <꽃으로부터> 연작(2008-2010, 3점), <위성으로부터-SAD KOREA>(2008), <도청으로부터>(2009), <강으로부터> 연작(2009-2010, 2점), <화가의 오디오>(2010). ‘부터’가 화가의 세계에 꽉 차 있음을 알 수 있다. 2005년부터 벌써 5년째, 박철우는 ‘부터’ 연작을 이어오고 있다. 무엇이 지난 30여 년 동안 우리 현대사의 현장과 민중의 삶터를 그리던 화가로 하여금, ‘부터’와 ‘역지사지’를 화두(話頭)로 작품에 천착하게 하는 것일까? 그러하여 지난 5년 동안 화두-부터에서 연원하여 작품에 스민 세상은 어떠한 모습인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3. 추체험의 겹눈


    전체 ‘부터’ 연작 37점 중에서 25점이 <흙으로부터>이다. 따라서 <흙으로부터>는 다양한 조바꿈을 하며 울리는 전체 작업의 ‘기본화음’에 해당한다. 성글게 말하면, 흙의 눈에 비친 세상을 화가가 추체험 방식으로 재구성한 것이다. 왜 화가는 흙이 바라본 세상을 그리고자 했을까? 이와 관련한 작가의 이야기는 감동적이다.


     맞아, 시선을 바꾸어 보는 거야. 내가 자연을 보는 것이 아니고...자연이 나를 바라보는 거야...내가 돌고래를 바라보고 있지만, 돌고래 또한 나를 바라보고 있어...내가 꽃을 바라보지만, 꽃 또한 그가 나를 바라 보는 거야... 흠,,,,재미있겠는데. 거꾸로 한번 생각해볼까? 모든 사물엔 눈이 있다고 가정하자. 꽃으로부터...나무로부터...잠자리의 눈으로부터...물잔으로부터...땅으로부터... 흙으로부터...맞아, 농부가 땅을 보는 게 아니고 땅이 농부를 보는 거야.... 흙으로부터 하늘을 보고, 나무를 보고, 구름을 보고, 인간을 보고....인간들이란 그저 자기 존재밖엔 몰라. 세상은 그저 인간 중심 투성이...그러면서 지들 끼리 잘난 척...만물의 영장인 척...고귀한 척...사랑하는 척...흙으로 부터...하늘을 바라보자. 일단 매화꽃 작품을 모두 지워 없애는 거야....그리고 바탕에 가득 흙을 그리자...자,,,,나는 흙이다...인간이 아닌 흙이다....음,,,,내 몸뚱이 사이로 하늘이 보인다. 그리고 풀숲도 보이고...작은 나무들도 보인다. 내가 있는 이곳은 버들강아지들이 가득해...민들레도 가득해...민들레 홀씨가 가득 피었군,,,,어?....바람에 날려가네....하늘 가득히....


    <2006.12.27. 작가일기>



    박철우는 조간신문에서 해변에 밀려온 돌고래 떼의 사진을 보고 눈이 번쩍 뜨이는 경험을 한다. 돌고래와 사람이 뒤엉킨 장면에서, 돌고래의 눈에 인간이 어떻게 보일까 생각한 것이다. 바로 역지사지이다. 이후 습관처럼 ‘내가 흙이라면, 꽃이라면, 나무라면, 잠자리라면’ 하는 방식으로 세상을 보게 되었다. 개안(開眼)을 한 것이다. 그러면서 제작된 첫 작품이 <흙으로부터 2005-1>(60 P, 2005년)이다.



    4. 흙으로부터


    흙-땅-대지는 모든 생명의 자궁이자 무덤이다. 존재하는 그 모든 것이 대지에서 태어나고 죽기 때문이다. 역지사지에서 ‘역지(易地)’, 즉 ‘처지를 바꿈’이란 상호 간에 공통의 지반이 없다면 본디 성립할 수 없는 개념이다. 다시 말해서, 역지란 각 존재의 온갖 차이에도 결국은 공동의 지반이 있음을 서로 확인하는 행위일 뿐이다. ‘흙에서 나서 흙으로 돌아간다.’라는 옛말처럼, 대지는 뭇 생명의 탄생과 사멸의 공동의 처소이다. 따라서 역지사지의 겹눈을 발견한 화가의 첫 작업이 <흙으로부터>라는 점은 자연스러운 귀결이었다.


    이후 박철우의 시선이 낮아졌다. 허리를 숙이고 무릎을 꿇고 대지처럼 낮게 눕는다. 노란 민들레보다 작고, 소나무뿌리보다 깊고, 농부의 발바닥 밑에 엎드리면서, 이 세계가 그에겐 모심[侍]의 존재로 다가왔다. 마치 호기심 많은 어린애가 우물 속을 들여다보듯, 길가의 흔하디흔한 들풀과 들꽃이 흔들리며 그를 내려다본다. 치어다본 하늘은 명경(明鏡) 같다. 한가로운 구름, 이따금 오가는 철새들. 박철우의 우물 같은 땅으로부터, 땅을 에워싼 산하가 메아리처럼 퍼져 나간다. 지금 그의 그림이 이처럼 편안해도 좋은가 싶을 정도다.


    흙으로부터 연작은 세 가지 양상을 보인다. 첫째, 세상의 잡음과 격리된 고요한 동굴과 같은 그림이다. 땅의 시선에서 바라본 세상을 형상화하려다 보니 정작 흙의 물질성은 최소화되고, 그 열린 공간으로 흙과 관계를 맺는 대상이 드러난다. 마치 사람이 남의 모습은 봐도 정작 제 얼굴은 보지 못하는 이치와 같다. 흙으로부터 연작 대부분이 여기에 해당한다. 둘째, 흙의 물질성이 드러난 채 세계와 관계를 맺는 방식이다. <흙으로부터>(2006-2, 10F)를 비롯한 몇 점이 그러하다. 이 방식에 대해 작가는 신통치 않아 했지만, 나는 오히려 부터라는 화두에 더 어울려 보였다. 셋째, 나뭇잎 사이로 언뜻언뜻 비치는 하늘처럼 화면을 구성한 방식이다. 2009년에 처음 등장했고, 최근작의 상당수가 여기에 해당한다. 여백이 없이 흙과 그 틈새로 비추는 세상의 경물들이 화면 가득 배치되었는데, 화음이 잘 어울린 합창곡을 듣는 느낌이다.



    5. 몽골의 아침


    <몽골의 아침으로부터>(2007, 360×160cm), <바이칼로부터>(2007, 30F)는 작가의 몽골기행 일기에 해당한다. 2007년 광주민예총에서 '아시아의 가치를 찾아서'라는 프로젝트를 주관한 바 있다. 이 사업은 중앙아시아의 예술가와 교류를 통해 아시아의 문화원천과 미학적 가치의 발견을 목적으로 했는데, 여기에 박철우도 참여한 것이다. <몽골의 아침으로부터>는 그가 몽골 여행 때 만났던 몽골사람 55명의 얼굴과 몽골의 암각화를 병치하여 화면을 구성한 약 500호에 이르는 대작이다. <바이칼로부터>는 바이칼 호수의 시각에서 바라본 부르한 바위와 주변 풍경을 그린 것이다. 몽골체험이 화가에게 경이와 감동의 시간이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몽골의 역사와 현실을 선사시대와 현대로 구분하여 보여주는 대조적 2분법을 생각했습니다. 여행 중...비행기 좌석에 비치된 잡지에서 보았던, 선사시대의 암각화가 저의 시선을 강하게 잡아 두었습니다. 인터넷 교보문고에서 검색을 해보니 '몽골의 암각화' 책이 한 권 검색되더군요. 구세주를 만난 느낌이었습니다. 이 책에는 몽골 지역의 수많은 암각화들이 자세히 소개되어 있습니다. 바탕엔 몽골에서 맞이한 일출 때 보았던 신비스러운 하늘 풍경을 배경으로...몽골에서 만났던 사람들의 얼굴을 단색 소묘 기법으로 표현할 계획입니다. 그리고 그 위에 몽골 암각화를 질감을 살려 표현 할 계획입니다.


    <작가일기 2007.5.7>


    박철우는 <몽골의 아침으로부터>에서 몽골의 역사와 현실을 선사시대와 현대의 병치를 통해서 보여주고자 했다. <바이칼로부터>도 일맥상통할 것이다. <몽골의 아침으로부터>에 새겨진 선사시대 암각화를 보면서, 나는 몽골 반점의 현현과 소멸을 강하게 느꼈다. 우리 민족이면 누구나 유년 시절 -유전적 지문처럼- 엉덩이에 얼룩졌던 몽골 반점. 스스로는 결코 볼 수 없고, 오직 타인과의 관계를 통해서만 확인되는 내 몸의 흔적. 그러다가 시나브로 흔적은 사라지고, 기억도 가물가물해지는 몽골 반점. 몽골반점이 세상을 향한 나의 존재와 시원에 대한 첫 증거인 것처럼, <몽골의 아침으로부터>에서 암각화는 하늘과 함께 살았던 몽골인의 존재-시간에 대한 화가의 기억일 것이다.


    <바이칼로부터>에서도 같은 느낌에 휩싸였다. 바이칼 호는 시베리아 남쪽에 있는 호수이다. 유네스코의 세계유산이며, 타타르어로 ‘풍요로운 호수’라는 의미이다. 약 2천5백만-3천만 년 전에 형성된 지구에서 가장 오래된 호수로서 우리 민족의 근원지라고 알려진 곳이다. 이처럼 박철우의 그림은 우리세계에 퇴적된 존재-공간-시간의 층리(層理)라고 할 수 있다. 그의 방식대로 말하자면, 몽골의 아침과 바이칼 호수의 시원(始原), 몽골의 하늘과 어린아이는 모두 상통하는 존재들이다. 아크릴 물감과 캔버스는 존재의 물질성이고, ‘부터 연작’은 시, 공간의 유구함과 무상함에 대한 변주곡이 되는 셈이다. 바야흐로 우리는 그림을 통해 역사의 층리가 되고자 하는 한 화가 앞에서 서성이고 있다.



    6. 꽃으로부터 - 강으로부터


    문법적으로 ‘부터’는 완결사가 아닌 보조사이다. 보통 뒤에 끝을 나타내는 ‘까지’가 와서 짝을 이룬다 한다. 영어의 ‘from-to’ 용법과 비슷하다. 따라서 체언에 해당하는 앞말에 따라 ‘부터’는 구름 같은 천변만화의 확장성을 가진다. 그런 의미에서, 박철우의 작업이 흙으로부터, 꽃, 당산나무, 몽골, 바이칼, 인공위성, 도청, 강물, 검, 나에 이르기까지 무수한 가지를 뻗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렇지만 이현령비현령(耳懸鈴鼻懸鈴)이 될 우려도 상존한다. 지금 박철우는 이 양변의 경계를 부단히 걷고 있는 셈이다. 나는 <꽃으로부터>, <나로부터>, <강으로부터> 등에서 다소 아슬아슬한 느낌이다.


    <꽃으로부터>는 2008년에 2점, 올해에 1점이 제작되었다. 꽃의 시각에서 바라본 주변을 추체험한 작품이다. 하지만 처음에 난, 작가의 설명을 듣고서야 아하! 했다. 그래 놓고도 얼마 지나지 않아 또 까먹고 무슨 그림이지 했다. <강으로부터>를 볼 때도 그러했다. 지난해 《생명의 강-江강水원래展》(5,18기념문화관 전시실)에서 <강으로부터-눈물 2009, 120F>를 처음 보았다. 역시 작품의도가 쉽게 읽히지 않았다. 이후 작가일기를 통해, <강으로부터> 연작이 현 정부의 4대강 사업에 대한 비판적 표현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강으로부터-눈물>(2010, 30F)도 지난 5월, 4대강 사업 반대유서를 남기고 소신공양(燒身供養)한 경북 군위 지보사의 문수스님에 대한 화가의 조사(弔辭)이다.


    하지만, 작품의도와 상관없이 <꽃으로부터>는 화면이 예쁘다. 색감도 개인적으론 맘에 든다. <강으로부터> 역시 유속이 느껴지는 빠른 필치가 정말 좋다. 오히려 작품 속 의미를 읽고 해석하려니까 왠지 불편해진다. 무슨 까닭일까?



    동백꽃잎과 노란 수술을 통해 바깥세상이 보입니다. 도대체 꽃은 어떤 정체성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볼까? 물론 제가 꽃이 아니기 때문에 알 수 없습니다.


    <작업일기 2008.4. 7>


    생각해보니 강바닥에서 바라보면 밝은 하늘이 보이겠더라고요. 강의 저 깊은 바닥에서 위로 올려다보는 풍경입니다. 위 아래 강둑이 있고 영산강물이 유유히 흐릅니다. 강둑엔 잡초들이 무성하고 하늘이 드문드문 보입니다. 물고기와 강조개 그리고 자갈도 있겠지요. 지워진 물고기도 다시 그려 넣었습니다. 물고기는 하늘에 비해 어둡게 보이겠지요. ^^ 여기서 부터는 옴싹 제 상상력만이 길입니다. 눈물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강의 눈물? 과연 이렇게 그려도 되나? ^^ 눈물의 모양은 미술실 싱크대에 물을 끼얹고 관찰했습니다.

    <작업일기 2009. 9. 16>


    화가는 작품을 그리는 내내 생각한다. 내가 흙이라면, 꽃이라면, 나무라면 어떻게 보일까. 사람들은 대개 그러다 만다. 시선의 교차에 대하여, 자기 한계를 극복하려는 발상의 전환 정도의 방편으로 생각한다. 적절한 예인지는 모르겠으나, 전통회화에서 ‘와유(臥遊)’가 그러했다. 관람자가 그림 속 주인공이 되어 자연을 거닐어 보는 것이다. 여기에 상호 교차(공감적 이해)에 따른 물리적 경계(境界)까지 느낄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박철우는 물리적 한계까지 추체험하고자 한다. <꽃으로부터>의 벌의 형상은 꽃잎에 바짝 붙어 있음을 표현한 것이다. <강으로부터>에서 물고기가 등이 아닌 하얀 배가 드러낸 것도 강 밑바닥에서 올려다보기 때문이다. 심지어 작가의 사유행위가 분명한 ‘강의 눈물’ 형상까지 싱크대에 물을 끼얹어 형성된 물방울을 관찰한 결과이다. 참으로 엄정하기만 한 역지사지가 아닐 수 없다. 예술작품의 감상이란, 보고, 읽고, 공감하는 선 순환적 과정일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가급적 모든 것을 ‘부터’라는 화두에 맞게 객관화하려는 박철우의 시도는 관객과의 회화적 소통에서 어려움을 감수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이점을 작가가 모르지 않을 것이다. 결자해지(結者解之)라 했던가? 회화적 소통의 과제를 그가 잘 극복하리라 믿는다.



    7. 나무로부터


    작가와 달리 나는 <나무로부터> 작품이 참 좋다. 물론 자기 작품을 아끼지 않을 작가가 어디 있겠는가? 별로 맘에 들지 않는다는 그의 말은 겸양이라고 생각한다. 작고 흔한 민들레도 캐보면 제법 뿌리가 깊다. 나무는 더 그럴 것이다. 거목일수록 대지에 제 뿌리를 깊숙이 내리고 있는 법이다. 환경이 열악한 곳일수록 뿌리는 특히 더 깊어진다. 예컨대 사막식물인 포아란은 키는 5cm에 불과한데, 땅 밑으로 뻗은 뿌리가 600킬로미터가 넘는다고 한다. 우리가 보는 세상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할지도 모fms다.


    <흙으로부터 2006-4>(100F), <당산나무로부터>(2008, 60F), <흙으로부터 2010-7>(50F)는 모두 나무가 작품주제이다. 첫 번째 그림의 구성방식은 <흙으로부터>와 흡사하다. 중앙 원형공간의 테두리에 여섯 그루의 나무가 빙 둘러 서있고, 각자 하늘을 향해 뻗친 줄기들이 중앙에 합류하여 방전플라스마처럼 대지의 생명력을 분출하는 것 같은 역동적인 그림이다. 다른 두 작품에서는 거대한 나무뿌리가 화면을 가득 채우고 있다. 나는 그 거대한 뿌리를 보면서 그 존재가 견뎠을 지난 시간을 생각했다. 포아란은 지상에 5cm를 틔우기 위해, 불모의 사막 밑을 600km를 뻗어 갔다. 마찬가지로 이 나무뿌리는 존재-시간의 거대한 상징으로 읽혀졌다. 우린 그 누구도 시간 앞에 자유롭지 못하지만, 결코 시간은 제 모습을 우리 앞에 드러내지 않는다.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다. 그런데 박철우의 나무로부터 존재-시간의 깊고 거대한 뿌리를 본 것이다. 그래서 화가에게 참 고맙다.


    8. 존재, 존재-사이


    왜 ‘부터’냐는 질문에 ‘역지사지’라 답했다. 조간신문에 실린, 해안에 밀려든 돌고래 떼와 그들을 살리려는 인간의 모습을 보면서, 돌고래의 눈에 인간이 어떻게 보일까 생각하게 되었다고 했다. 여기서 비롯된 지난 5년간의 작가의 성찰과 고투가 오롯이 이번 전시회에 담겨 있다. 따라서 작가뿐만 아니라 모두에게 소중한 기회가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이 짧고 서툰 나의 글은, 떫은 감 맛을 모면할 길이 없다. 끝으로 그림을 보고 난 소회를 몇 마디 덧붙이는 것으로 소임을 마치고자 한다.


    왜 우리는 서로의 처지를 바꾸어볼 생각을 하곤 하는가? 왜 남의 시선에 비친 세상이 궁금할까? 그것을 알았다고 달라지는 것은 무엇일까? 나는 ‘결핍’에 대한 자각에서 이 문제가 비롯된다고 생각한다. 결핍이란 넉넉하게 갖지 못함이 아니다. 있으면 좋고 없어도 무방한 일이 아니다. 꼭 있어야 하는 데 없거나 모자란 것이 결핍이다. 지금 우리에게 무엇이 결핍된 것일까? 서로 바라보는 맑은 눈이다. 존재와 존재를 맺는 관계가 빠져 있거나 모자란 것이다. 다시 말해서, 수많은 시선이 어긋나 있는 것이다. 어긋난 시선은 겉으론 마주하는 것 같아도 결국 일방통행과 다름없다. 자신과 함께 있지 못하고, 자기로부터 소외되어 갇혀 있기 때문이다. 엘리베이터 안에 내가 서 있다. 닫힌 공간, 마주 보는 벽면 양쪽에 거울이 붙어 있다. 정면의 거울을 보니, 반대편 거울에 거울을 바라보는 내가 있고, 또 그 모습을 보는 내가 보인다. 무수한 내 존재(being)가 반복된다. 하지만, 단 한 순간도 나는 생성(becoming)되지 않는다.


    박철우는 세상을 달리보고자 했다. 그러하여 ‘나로부터’ ‘너에게로’ 향하는 ‘역지사지’를 화두로 삼았다. 내가 아닌 너의 시선에 비친 세상을 추체험하고 작품에 담고자 땀을 쏟았다. 그렇다면 시선의 전도에서 생성되는 세계는 무엇인가? 문득 <죽은 시인의 사회 Dead Poets Society>(1989)란 영화가 떠오른다. 명문 웰튼 고등학교의 영어교사로 부임한 키팅 선생은 첫 수업시간에 학생들에게 책상위에 올라서게 한다. 책상위에 선 학생들이 본 교실은 더 이상 예전의 공간이 아니었다. 새로운 관계가 생성된 것이다. 그렇다고 존재가 달라진 것은 아니다. 이처럼 관점의 변화는 우리를 환기시키고 경이롭게 한다. 존재-사이를 보는 관점을 달리했을 뿐인데 인식의 지평이 확장된 것이다.


    관점의 변화가 주는 경이로움은 산문(散文)보다 시문(詩文)의 속성에 가깝다. 예컨대 시인 안도현의 <너에게 묻는다>의 “연탄재 함부로 차지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라는 대목 앞에서 우리는 큰 감동을 받는다. 시인 고은의 “미안하다 나 같은 게 살아서 오일장 장터에서 국밥을 다 먹는다”, “내려갈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못 본 그 꽃” 같은 구절을 대하면 그 새처럼 자유로운 발상에 “아! 이렇게 세상을 볼 수도 있구나!”라며 감탄하며, 절로 무릎을 칠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물론 이러한 비유가 박철우의 작업방식에 대한 흠결을 지적함이 절대 아니라는 사실은 작가도 충분히 알 것이다.


    사물은 저마다의 본성이 있다고 한다. 사물은 본성을 드러내면서 또 감춘다. 본성은 존재 속에 숨겨져 있다. 선입견을 걷어낸 맑은 정신만이 자신의 본성을 드러내고 볼 수 있다. 본성은 존재의 고유함이라 말할 수 있다. 하지만, 고유함은 홀로 생성되거나 머물 수 없다. 혼자뿐인 고유함이 어찌 성립될 수 있겠는가? 설혹 있다고 한들 무의미한 것이다. 즉, 고유함은 존재와 존재 사이, 즉 혼자가 아닌 여럿과의 관계 사이에서 생성되는 미지(未知)의 무엇이다. 관계가 단절되면 그 빛을 상실하는 어떤 것이다. 존재는 관계 속에서 비로소 생성되고 빛나는 것이다.


    박철우에게 ‘부터’와 ‘역지사지’는 상통한다. 당연히 완전한 역지사지란 불가능할 것이다. 역지사지란 회귀적 성찰의 다른 표현이다. 또한, 관점이란 존재의 그림자와 같아서, 다른 존재의 그늘에다 자신을 내려놓아야 아집(我執)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 따라서 박철우의 ‘부터’ 작업은 세상을 낯설게 봄으로써, 새로운 관계를 만들고자 하는 치열한 고투(苦鬪)인 것이다.


    지금 박철우의 작업은 산문에 가까워 보인다. 작가일기를 보면서 그의 작업방식이 구축(構築)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림을 보고나니, 좋은 소설을 읽고 난 후의 느낌이다. 그럼에도 그의 작품에서 시집(詩集)을 덮은 후의 느낌을 기대하고 싶다. 작가의 지난 삶을 돌이켜보면 과욕은 아닐 듯싶다. <강으로부터-눈물>(2010, 30F)의 문수보살의 눈물을 보면서 든 생각이다. 부디 박철우 화가의 건승을 기원한다. 


    - 배종민 (미술사), 2010년 박철우 개인전 전시카달로그 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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