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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숲에 부는 바람 - 국립광주박물관 '풍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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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광주미연 작성일14-01-15 13:36 조회10,49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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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중기 조익(1579-1655)의 그림이라 전해지는 <청죽도>와 그 세부


    ▲ 매죽초충문청화백자(조선 18세기), 칠각죽문청화백자연적(조선 19세기), 매죽송문철화백자(조선16세기)


    대숲에 부는 바람
     


    국립광주박물관 특별기획전
    그림으로 듣는 대숲 소리
    역사 넘나드는 대나무그림


    큰 바람 부는 곳에 모든 것이 그 바람을 맞는다.

    그런데 어찌하여 다 같은 대로서
    흔들리는 것과 흔들리지 않는 것이 있단 말인가.

    한 그루는 바람에 시달려 그칠 사이 없이 흔들리고
    한 그루는 제대로 곧게 서 있구나.


    마음이 돌아와서 진리의 본체를 듣게 될 때는
    흔들림도 고요함도 다 사라지리라. 

      고려 중기의 명문장가이자 시선(詩仙)이었던 백운거사 이규보가 남긴 ‘풍죽’ 시의 일부다. 세파가 심한 세상에서 이러저런 바람에 가벼이 흔들리기보다 마음자리 바로잡고 자기본체를 잘 다스리라는 성찰의 일깨움일 것이다.

      늘 푸른 대숲은 세상살이 가까이에 함께 있으면서도 정신을 맑게 씻어주는 청정한 기운으로 별천지 같은 세계를 만들어 준다. 푸르고 단단한 대나무들은 차근차근 마디를 이루며 꼿꼿하게 뻗어 오르는 기상과 더불어 엷은 미풍에도 화답하여 소삭여주는 섬세한 감성도 지니고 있다. 게다가 사시사철 푸르면서도 계절과 날씨에 따라 운치를 달리하니 예로부터 수많은 문인 묵객, 작가들의 벗이 되어 명작 명품으로 재탄생하기도 하였다.

      그렇게 대나무의 정신과 미감을 담은 빼어난 걸작들을 모은 전시가 진행 중이다. 국립광주박물관이 특별기획한 ‘대숲에 부는 바람-풍죽’ 전시인데, ‘전통미술의 대나무’ ‘현대미술의 대나무’ ‘대숲에 부는 바람’ 등 3부로 엮어져 오는 2월 2일까지 계속된다. 수백년을 오르내리는 미술사의 관점과 더불어, 단지 화제로서 ‘대나무’만이 아닌 마음속에 비춰진 대나무, 정신적 여기(餘氣)나 문화적 품격을 더하는 세상살이 공간 속의 대나무, 비형상의 바람이 만들어내는 대나무나 대숲의 운치, 옛 도자문화에 담겨진 대나무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다루고 있다. 조선 중기 대표적 묵죽화가들의 묵향 그윽한 옛 그림부터, 청자ㆍ백자에 담겨진 대나무, 채묵ㆍ혼합재ㆍ사진ㆍ판화ㆍ영상미디어들을 이용한 현대작가들의 작품까지 귀하고 다채로운 150여점에 이른다.

      이 가운데 군자의 상징으로 여겨 문인들이 즐겨 다뤘던 묵죽화로 조선시대 묵죽의 대가인 이정, 신위 등과 더불어 특히 조익(1579-1655)의 그림이라 전하는 <청죽>이 눈길을 끈다. 조선 중기 문인화가로는 드물게 채색을 적극 사용하면서, 안개 그윽한 대숲에 낮게 깔린 여린 대순무리들 위로 푸르고 늘씬한 청죽과 굵고 색이 바랜 노죽을 앞뒤로 배치한 구성이다. 기운차게 뻗어 오르는 푸른 대는 마디사이 청색농담이 뚜렷하면서 싱싱한 대잎들도 정교하게 세필묘사하였고, 뒤에 선 노죽은 윤곽과 마디들을 따라 검버섯 같은 점묘들로 음영을 주어 입체감을 주다가 위로 가면서 안개에 묻히듯 희미하게 생략시켰다. 인조반정, 병자호란, 소현세자를 통한 서학ㆍ천주학ㆍ신문물 유입 등 혼미한 정세와 문화변동기에 새로운 신진세력의 성장과 신ㆍ구 세대교체를 의미하는 것인지, 서양식 명암법의 이른 흔적도 주목할 만하다.

      또, 호남 남화의 종주라 할 소치 허련(1809-1892)의 댓가지가 크게 휘어져 휘청거릴 정도로 세찬 바람을 맞고 있는 <풍죽도>와, 그가 당대 지식인사회와 인맥을 넓히고 문자향을 높이는데 큰 힘이 되어 준 권돈인(1793-1859)의 <세한도>도 눈에 띄는 작품이다. 추사 문하에서 서화를 익히던 소치가 스승의 소개로 권돈인 집에 유숙하며 그 집을 드나드는 문인이나 좋은 서화들을 접할 수 있었던 사이다. 권돈인의 <세한도>는 추사의 물기 하나 없이 찬 기운 가득한 <세한도>에 비하면 훨씬 넉넉하고 농담이 풍부한 필선과 물맛이나 부드러운 감성에서 확실히 달라 보인다. 추사가 이 그림에 붙여 “화의(畵意)가 이쯤돼야 형사(形似)에서 벗어났다고 할 수 있고… 이런 의취(意趣)는 옛 명망가도 터득한 자가 드물다”고 할 정도다.    



      이밖에도 매죽문이 새겨진 상감청자, 대나무 그림이 그려진 청화ㆍ철화백자, 문인들에게 귀물이었을 백자연적 대나무 그림 등의 도자기와, 몰골 담채를 이용한 이응노의 드물게 보는 <묵죽> 대작과 붉은 담채의 대나무화첩, 대숲 사이로 청색덩이들이 파열하듯 터져 흐르는 강익중의 <봄여름가을겨울>, 대숲 사이로 구름처럼 거니는 노파들을 묘사한 임남진의 <마음을 비운 그림자>, 아득한 파도소리 같은 일렁임이 가득한 하성흡의 <바람부는 대숲>, 마른 한지 스치는 듯한 몇 겹의 소리들을 담아낸 라규채ㆍ이한구의 대숲 풍경사진, 엷은 눈발이 소복이 쌓여가는 이이남의 영상작품 <묵죽도>도 전시의 볼거리를 더해준다.

      곧 설이다. 혹한 속 찬바람 맞으며 눈 속에서도 푸른 기운 창창한 대나무처럼 늘 싱그럽고 청정하게, 그러면서도 꼿꼿하지만 세파를 탄력 있게 받아넘길 줄도 아는 멋스러운 한해를 만들어 갔으면 한다.


    - ‘조인호의 미술이야기’(전남일보. 2014.1.15) 게재



    ◀ 임남진 <마음을 비운 그림자>, ▲▲ 라규채 <BAMBOO#019>, 강익중 <대나무-봄여름가을겨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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