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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도조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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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도조각의 기본 바탕, 남도 현대조각의 터 닦기


    남도조각의 씨앗- 김영중

    불모지나 다름없는 남도조각의 초기 상황은 1926년 장성출신인 김영중(金泳仲)의 조소입문과정에서 나타난다. 가족은 물론 주위의 반대가 극심하였는데, 제작과정 자체가 막노동에 가까운 천업인데다 인물초상을 빚으면 그 사람의 혼을 빼앗긴다는 미신 때문에 조각자체를 마땅찮게 여기는 보수적 인식이 현대조각의 출발을 더디게 한 요인이었던 것이다.

    그가 조각에 손을 대기 시작한 것은 광주농업고등학교 재학(1943~47) 시절 특별활동으로 조각부에 들어가면서부터다. 전교생 가운데 진흙을 이용한 손 만들기와 토기 빚기 등 시험을 치러 선발된 5명이 전부였다. 미술교사도 없었지만 그가 조각가의 길로 들어서는데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1948년 서울대 예술대학 미술학부에 진학하면서 동경미술학교 조각과 출신으로 초대 서울대 교수이던 김종영(金鍾瑛, 1915~82)으로부터 본격적인 조각수업을 받게 되었다. 한국전쟁 때는 피난을 겸해 1952년 소전 손재형(素? 孫在馨, 1903~1981)이 설립한 진도중학교에서 미술지도를 맞게 되었다. 비록 일년이라는 짧은 기간이었지만 미술부와 목공예부, 도자부를 만들어 학생들을 지도하였는데 실생활에 유용하게 쓰일 수 있는 미술지도에 중점을 두었다. 이 무렵 교내 축구대회 우승패로 제작한 <월계관을 쓴 청년두상>이 남아 있는데 측면모습으로 사실감을 살려 제작한 석고부조에 구리빛을 칠하여 나무틀에 끼워 넣은 것이다.

    전쟁이 끝난 뒤 1954년에 홍익대학교 미술학부 조각과로 편입하면서 만나게 된 윤효중(尹孝重, 1917~67)에게서 `56년 3월 서른살에 졸업하기까지 제자 겸 조수로 현대조각을 익혔다. 동경미술학교 출신으로 [선전] 말기부터 [국전]까지 조각계에서 두드러진 활동을 펼치면서 당시 기념조각상을 많이 맡던 윤효중의 일을 도우면서 그 역시 뒤에 기념조각상 제작으로 작품활동의 대부분을 채우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홍대 편입 직후 제3회 [국전]에 출품한 <복선(伏線)>부터 연속 입선이 시작되어 1958년 제7회 때는 <장갑낀 여인>으로 문교부장관상을 수상하였고, 학창시절부터 [대한미협전]에 참여하면서 조각계에서 점차 입지를 다져갔다.

    김영중에게 `60년대 전반은 인체의 단순화 작업과 함께 추상조각의 새로운 묘미를 탐구해 과도기였다. 1963년 12월에는 김영학ㆍ김찬식ㆍ전상범ㆍ최기원ㆍ이운식 등과 더불어 ‘새로운 조형행동에서 전위조각의 새 지층을 형성한다’는 선언문을 내걸고 국내 첫 실험적 추상조각모임인 「원형조각회(原形彫刻會)」를 결성하고 신문회관 전시실에서 창립전을 가졌다. 이 전시에 출품한 <해바라기>는 이후 작품의 주된 양식을 이루게 되는데 자연형상을 단순 변형한 추상작품이다. 물론 그에 앞서 인체를 여러 각도에서 관찰 분석하여 골격과 면을 털어내고 종합하며 이루어낸 <평화행진곡>(1961)이 ‘해바라기 연작’의 동기가 된 작품인데, 말라붙은 해바라기에서 발견한 생명존재의 경외감을 조형화한 것이다.

    이후 더욱 구조적 조형성으로 간결 압축시켜가면서 현대문명과 자연생명, 인간존재의 관계를 함축시킨 작업들을 계속한다. 특히 `60년대 중반은 철조작업들이 주류를 이루는데, 오래된 가마솥을 붙여 용접하고 안팎에 색을 칠한 뒤 야외조형물로 바람에 움직이게 한 <규(圭)-I>(`64), 기계와 톱니바퀴 틀 속에 서식하는 넝쿨들로 상징적 의미를 강조한 <인도주의와 기계주의>(`65), 철판을 잘라 붙여 나무 같은 형상으로 구성해낸 <자연>(`66) 등이 그 예이다. 더하여 동료3인과 함께 자동차를 부숴 가며 행위예술형식으로 선보인 <파괴의 형상성>(`66)도 이러한 ‘반(反) 기계주의, 생명본성 회복’을 주제로 한 작업들이다. 아무튼 그가 1965년부터 시작되는 [전라남도 미술전람회](약칭 道展) 심사차 광주를 오르내리기 이전까지 진도중학교 근무 일년을 제외하고는 남도 조각의 초기 작가로서 직접적인 연관은 맺지 못하였지만 고향에서 조각에 대한 관심을 일으키고 후배들의 입문과 등단을 유도하는데 간접적인 영향을 미치기에 충분하였다.



    동상제작으로 남도조각의 터를 다진 탁연하

    `50년대 초기 광주 현대조각에 터를 닦은 이들 가운데 탁연하(卓鍊河)가 있다. 그는 1932년 목포 죽동 태생(본적은 영광)으로 비교적 부유한 가세 덕분에 산정보통학교 4학년 때 서울로 전학하였다. 그리고 도상봉이 미술교사로 있던 경신중학교에서 미술부 활동을 하던 중 5학년 졸업반 때 6,25를 만나게 되었다. 그리고 종군작가단에 지원하여 대구 헌병학교를 거쳐 상무대 102헌병대 정훈실 문관으로 광주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1952년 진해 해군부대에서 이순신동상을 세운다는 「정훈화보」를 보고 사령관에게 건의하여 광주 상무대에 <을지문덕상> 건립을 추진하게 되었다. 당시 그는 평양미술학교 조각과 출신으로 홀로 월남해 있던 박제소와 중앙국민학교 앞 적산가옥에 함께 기거하며 그에게서 틈틈이 조소를 배우고 있던 중이었다. 또 광주시내에 있던 정훈실 분소로 이승만박사 두상부조를 팔러온 차근호(車根鎬)를 만나 그의 평양미술학교 후배인 박제소를 소개하였고 세 사람이 함께 지내고 있던 터였다.

    공모에 세 사람이 각자 밑그림을 제출하였는데 회화과 출신으로 묘사력이 뛰어난 차근호 안이 채택되어 나머지 두 사람은 조수역할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부산에 피난 중이던 김찬식(金燦植)과 김순득(金順得)을 불러 함께 작업에 참여시켰다. 금동 최부자집 창고(구 남도극장자리)를 작업실로 빌려 작업을 진행하고, 진해 해군공창에서 포탄탄피를 녹여 주물을 떠오는 등 우여곡절 끝에 세운 24척(약 7m) 높이의 이 동상(銅像)은 비록 군부대 안에 세워진 서구식 기념동상이지만 광주에서는 첫 대형 옥외조각상 건립이면서 제작방법이나 거대한 규모 때문에도 당시 큰 관심을 불러모았고 신식 조각에 대한 일반인들의 인식을 새롭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 작업을 계기로 광주와 인연을 맺게된 김찬식은 평양미술학교 2학년 때 전쟁을 만나 홀로 월남한 평양출신 실향민이었다. 그는 동상제작을 마치고 탁연하 박제소 등이 서울로 올라간 뒤에도 차근호와 광주에 남아 중앙국민학교 창고를 빌려 작업을 계속하여 1954년 6월 광주 미국공보원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물동이 인 여인>을 비롯한 20여 점의 석고 사실작품들을 선보인 이 전시는 광주는 물론이고 국내 첫 조각 개인전이기도 하였다. 이후 그 역시 상경하여 홍익대학교 조각과로 편입, 재학시절인 `55년 제4회 [국전]부터 입선을 시작 `61년에는 추천작가가 되는 등 중앙무대에서 자리를 굳혀가지만 이 지역과의 연계는 더 이상 이루어지지 않았다.

    어쨌든 탁연하는 상경 후 홍익대학교 조각과 2학년으로 편입하여 `57년도 졸업까지 윤효중 교수의 기념조각제작을 도우며 학업을 마쳤다. 재학시절부터 [교내미전] [대한미협전] 등을 통하여 작품을 발표하기 시작하였는데, 1956년 [제2회 홍대미전] 때는 4인의 인체를 서로 다른 방향으로 엇갈리게 구성하여 전란의 정신적 상처와 고뇌를 형상화시킨 백시멘트의 <피난가족>을 출품하였다. `57년 [대한미협전]에서 회장상을 수상한 <무제> 또한 웅크린 여인좌상을 마치 원통처럼 단순 변형시킨 작품으로, 후에 기념동상을 제외한 순수조각상 대부분이 추상 아니면 약간의 형상만 남긴 반추상의 작품세계로 펼쳐지게 되는 방향을 가늠할 수 있는 초기작품들이다.

    앞서 을지문덕상 제작경험과 정훈실 근무경력 등 군대와의 인연 덕분에 재학시절부터 육군사관학교의 <화랑기마상>(`56)을 비롯한 `50년대 후반 각 기별 졸업기념 조형물을 도맡다시피 하던 그가 `59년 광주공원 <어린이 헌장탑> 현상공모에 당선되어 제작을 맡으면서 고향에 다시 내려오게 되었다. 그리고 그 해 설계사무소를 열고 제일극장 건축(`59~60)을 비롯해 시내 다방들의 실내장식들을 맡기도 하던 중 마침 조선대학교 건축과 의장학 강의를 맡게 되어 이를 계기로 `60년부터 `71년까지 공대와 여대 그리고 미술과 강의를 계속하였다.

    광주에 머무르는 기간동안 <현신덕(玄德信)선생동상>(`59, 광주 신생보육학교), <4.19학생의거 기념탑>과 <충혼탑>(`61, 광주공원), <어린이 헌장탑>(`66,목포 유달공원), <충무공 이순신 장군동상>(`67, 여수 수정공원), <문열공 김천일(文烈公 金千鎰) 장군동상>(`68, 나주공원), <충혼탑>(`69, 여수 수정공원. `70, 나주공원), <충무공 이순신 장군동상> <강감찬 장군동상> <충장공 김덕령장군동상> <송희립 장군동상> <정웅장군 동상>(`72, 이상 광주 상무공원), <충무공 이순신 장군동상>(`74, 목포 유달공원) 등 기념동상제작을 거의 도맡다시피 하였다. 이 가운데 전체 높이 39척(약 12m, 기마상 높이 5.5m)과 동상무게 7.5톤의 엄청난 규모 때문에 작업과정의 어려움은 물론 중앙에서까지 화제가 되었던 <충장공 김덕령장군 기마상>(`72), 엄격한 복식 고증을 거쳐 제작하여 문교부 공인을 받음으로써 충무공상의 모델이 된 목포 유달공원의 <충무공 이순신 장군동상>(`74) 등이 있다.

    그는 조형적 생동감을 최대한 살려내기 위해 순발력을 강조하는 편이다. 그러나 기념비적인 동상제작의 특성상 순수조형작품과는 조건에 한계가 있기 마련이고 선무정신을 강조해야 하는 무인 조각상들의 일정 틀을 벗어날 수는 없었다. `70년대 초까지의 광주생활을 마치고 상경한 뒤 주로 건축과 조경분야에서 활동하느라 작품에 전력을 쏟지 못함으로써 중앙 조각계에 확실한 입지를 다지지는 못했지만 틈틈이 작품활동을 함께 하였다. 특히 `80년대 후반 이후의 <트위스트(TWIST)> 연작처럼 자유로운 감성에 구조적 조형성을 결합한 생명력 표출을 주제로 한 작품들을 주로 하였다. 아무튼 그가 생활터전을 서울로 옮기기까지 `50년대 초부터 70년대 초까지 광주ㆍ전남지역 조각계의 바탕을 다지는 초기 작가로서 역할은 결코 적지 않은 것이었다.



    초기 조각가들의 개별활동

    `60년대 지역 조각계는 젊은 작가들의 입문으로 그 토대를 다져가고 있었다. 이 가운데 조제현(曺濟炫)은 개인 창작활동은 물론 교육현장에서 후배들을 양성해 냄으로써 남도조각의 본격적인 개화를 이끌어낸 실질적인 산파역이었다. 담양출신인 그는 탁연하의 후배로 홍익대학교 조각과를 마친 뒤 `61년부터 광주에 머물게 되는데, 그 동안 만들어 놓은 석고상 30여 점으로 그해 12월 광주 미국공보원에서 첫 개인전을 가졌다. 이 지역 출신으로는 첫 조각개인전이었는데 이후 한 때는 월산동 도자기회사에서 모형 뜨는 일을 하며 현실적 어려움을 해결해 나가던 중 `63년부터 조선대학교 미술학과에서 조각지도를 맡게 되었다. 광주ㆍ전남에서는 첫 조각 전문교수였던 셈인데, 정확한 관찰묘사를 위주로 주관적 변형을 삼가 하는 사실적인 인체작업으로 후진양성과 창작활동을 함께 펼치면서 `60년대 중반 이후의 차세대 조각가들을 배출해 내었다.

    그리고 어려서 광주와 인연을 맺게 된 엄태정(嚴泰丁)은 1938년 경북 문경출신이다. 일제시대인 네 살 때 부모를 따라 일본에 건너갔다가 국민학교 2학년 때 해방을 맞아 귀국하였다. 모친의 고향이기도 하고 부친이 패망 후 환국하는 일본인으로부터 경영권을 불하받은 농기구생산공장 경영권 때문에 가족 모두가 광주로 생활터전을 옮겨오게 되었다. 광주에서 국민학교 과정을 다시 시작한 그는 별도로 미술부가 없었던 탓도 있지만 고교시절까지 조각의 기초조차 직접 배울 수 있는 기회를 갖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숭일중학교 1학년 무렵인 1952년 당시 장안의 화제 거리였던 차근호 탁연하 박제소 일행의 상무대 <을지문덕장군동상> 제작현장을 찾아갔다가 그 거대하고도 실물 같은 조소의 제작과정에 큰 흥미를 느꼈고 뒤에 조각가의 길을 택하게된 계기가 되었다. 1958년 서울대학교 조각과로 진학하면서 서울로 올라가게 되었는데 재학시절인 `62년의 첫 [국전]입선작 <사색자>처럼 인체를 위주로 대상을 충실하게 관찰 묘사하는 구상작품이었다가 차츰 주관적 해석과 조형상의 변화를 탐구하는 학습과정을 따랐다. `64년 졸업후 대학원 과정부터 국내 미술계를 휩쓸고 있던 전위적 추상미술운동, 즉 일정 대상이나 형상에서 벗어나 파격적이고 자유로운 형식의 비정형(Informel) 추상과 재료의 과감한 도입, 특히 이후 그의 작품세계의 큰 흐름을 이루는 철조조각을 주로 하면서 중앙 조각계에서 입지를 다져 갔다.

    한편, 1937년 함경북도 원산 출신으로 어려서부터 중국 상해에서 생활하다가 해방 후 귀국하여 서울에 머물고 있던 박양선(朴陽善)도 결혼을 계기로 광주에 내려오면서 지역 대학강단에 서기 시작하였다. 숙명여고시절 국내 초기 조각가 중의 한 사람으로 인체를 단순화시킨 반추상작품을 제작하고 있던 김정숙(金貞淑)과 윤영자(尹英子) 교수로부터 조각 기초를 배웠던 것을 계기로 홍익대학교 조각과에 진학하였으나 결혼과 함께 부군의 고향인 광주로 내려오면서 중퇴하고 조선대학교 미술과에서 학업을 마쳤다. 그리고 1963년부터 신설된 조선대학교 병설 여자초급대학 공예과 교수로 근무를 시작하면서 미술학과에 출강하기도 하였다. 특히 1963년도 1학기부터 신설된 가정공예과는 여러 과목들과 함께 목각 등 조각실기와 이론지도를 학습과정에 포함하고 있었다. 교단생활과 함께 주로 반추상 또는 추상작품으로 남도조각계에서 독자적인 세계를 펼쳐가게 되는데 주요 작품활동은 주로 `70년대 이후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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