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화 쪽 보다는 조금 늦지만 남도 서양화단의 형성은 첫 양화가라 할 김홍식의 동경미술학교 유학(1924∼28)에 이어 `30년대 오지호·김환기 등이 일본에 건너가 양화수업을 받는 것에서 그 씨앗이 뿌려졌다 하겠다. 그리고 일제말 태평양전쟁 시기를 전후하여 해외 유학파들이 부쩍 늘어나는데, 실제로 남도 서양화단의 기초를 다지는 활동은 해방 후 50∼60년대 들어선다. 이 가운데 여수의 김홍식(金鴻植, 1897∼1966)은 일제시대 당시 미술학도들에게 최고 선망의 대상이었던 동경미술학교 서양화과에 유학(1924∼28)하여 서구식 정규미술수업을 받은 호남 첫 서양화가인 셈이다. 부유한 가세 덕에 일찍이 상경하여 경성제일고보를 다니면서 개화문물에 눈을 뜰 수 있었으나 3학년 때 3.1운동에 가담한 뒤 수배를 받게 되면서 부친이 학적부에서 빼버렸다. 법조인을 바라는 부친의 권유로 1922년 일본으로 건너갔으나 곧 화가의 길로 진로를 바꿔버렸는데 이 때문에 극구 반대하던 부친이 작고한 뒤인 40대 중반에야 비로소 여수 미평에 화실을 짓고 그림에 전념할 수 있었다. 그는 한 때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여수지국장을 지냈고 일본 유학시절 교분을 맺은 송진우 김성수 등과도 친분이 두터웠으며, 해방공간 무렵에는 그의 화실에 좌익계 진보적 지식인들이 자주 드나들었다 한다. 하지만 생업이나 사회·화단활동에는 소극적이었던 탓에 특별한 자취를 남겨 놓지는 못하였다. 그가 수학한 동경미술학교는 명치 초기의 지나친 서구화에 반대하여 1889년 일본 전통미술의 전승 계발에 교육방침을 두고 출발하였다. 뒤늦게 1896년에야 서양화과를 설치하였는데, 프랑스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초대교수 구로다 세이키(黑田淸輝)중심의 외광파 형식을 대표로 하는 일본 관학파 미술의 산실이다. 국내 첫 양화가인 고희동의 1915년 졸업부터 해방직전 `44년까지 서양화과 46명을 포함한 총 63명의 한국인이 졸업하였는데, 광주전남에서는 서양화과에만 김홍식을 비롯 오지호 박근호 김두제 등 4명이 이 학교 출신이다. 생전에 전람회를 가진 적이 없기 때문에 대부분 주변인들이나 친인척들 사이에 일부 그림이 소장되어 왔는데, 1940년부터 `66년 70세로 타계하기까지 미평화실 은거시기 작품들이 대부분이다. 다만 대학졸업작품으로 현재 동경예대 자료관에 보존되어 있는 <자화상>(1928)은 초기 작풍을 어렴풋이나마 살필 수 있는 귀한 예이다. 실제로 그의 일본유학시절은 대정(大正, 1912∼25)년간 일본 근대미술에서 가장 자유롭고 활발했던 문예중흥 풍조가 소화(昭和) 초기로 이어지고 있던 시기로 후기 인상주의는 물론이고 서구 현지에서 진행되고 있던 신흥 모더니즘운동의 기하학적 추상미술까지 이미 소개 수용되고 있던 때이다. 아울러 1930년을 전후로 야수파화풍이 확산되고 있던 시기이기도 한데, 김홍식의 인물묘법은 그 과도한 주관적 감정위주 야수파나 지나치게 냉철한 모더니즘 어느 한쪽에 기울어지기 보다 전통 고전화풍에 바탕을 두면서도 대상에 대한 분석적 해석태도를 부분적으로 담고 있는 절충양식의 외광파 형식을 취하고 있다 하겠다. 캔바스 뒷면에 만성리 시절의 설초(雪焦)라는 아호와 서명을 남긴 <잔몽>(殘夢, 1958)도 언뜻 평범한 관학파(아카데미즘) 화풍처럼 보이지만 침대에 비스듬히 엎드린 여체의 단순 절제된 표현과 구조적 대상파악이 두드러진다. 이러한 태도는 <목욕하는 여인>을 비롯한 다른 작품들에서도 공통되는 성향으로 역시 뒷모습들이면서 관능미보다는 주로 각 포즈에 따른 인체의 단순 구조성이 두드러진다. 색채나 필법을 통한 주관적 감정몰입과 내적 의미의 함축을 억제하는 이 같은 객관적 실체성 우선의 제작태도는 풍경화에서는 달라 보인다. 뜰에서 내려다보이는 만성리 바다풍경이나 해변가 바윗돌, 벚꽃이 만개한 봄녘이나 싱그럽게 우거진 녹음, 아니면 한설이 뒤덮인 숲과 같은 대부분 미평의 화실주변 풍광들을 담아낸 이들 사계풍경화들은 누드그림들에 비하면 훨씬 현장 분위기를 우선하여 주관적 감흥을 담아내고 있다. 객관적 묘사 중심의 외광파로부터 점차 남도의 풍광과 정서에 녹아든 듯 인상화법으로 변화되어 간 예라 할 수 있다. 이들 풍경화들은 백색을 즐겨 혼합한 푸른 색조와 짜임새를 중시하는 화면구도, 바윗돌 등의 입체적 파악들에서 역시 감각보다는 이지적 조형태도의 밑바탕을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각각의 특성에 맞게 아주 엷거나 또는 두텁게 쌓은 질감으로 그려낸 화병 꽃그림들이 정물화의 주류를 이루고 있기도 하다.
'회화는 태양과 생명의 융합이다. 그것은 光을 통하여본 생명이요 光에 의하여 약동하는 생명의 자태다...태양에의 환희의 표현이 곧 회화이다' <순수회화론>(1938,동아일보), 한국의 풍광과 민족정서를 바탕으로 한 자연주의 전통과 인상파화법을 융합시켜 특히 생명의 근원인 빛과 그 발현으로써 색을 중심으로 가장 남도적이자 한국적인 예술세계를 정립시킨 오지호(吳之湖, 1905∼82) 예술론의 핵심구절이다. 실로 서구화법의 유입이후 그 추종이나 동경 아니면 개인적 자족취미로 그치는 경우들이 허다하던 우리 근대미술기에 민족자존의 주체문화 정립에 대한 신념과 소망을 실천적 삶과 회화를 통하여 설파 고취하였던 그는 분명 한국미술사의 커다란 봉우리임에 틀림없다. 오지호는 화순 동복의 토호 집안에서 막내로 태어났다. 부친 오재영은 한일합방 직전 잠시 맡게 된 보성 군수를 사직한 뒤 망국의 통분을 삭이고 있던 차에 3.1운동 바로 한달 뒤의 고종인산(高宗因山)을 보고 내려와 자결해버리고 말았다. 이런 꼿꼿한 선비의 지조와 민족정신은 또한 오지호에게도 이어져 [鮮展] 참여기피, 창씨개명과 성전미술찬양 거부, 해방 후 '민족미술건설' 활동과 민족회화론 제창, 우리말의 뿌리 찾기로서 한자교육운동 등 그의 전 생애와 예술을 통해 일관되고 있다. 그는 1921년 편입한 휘문고보 시절, 동경미술학교 첫 졸업생이자 한국 첫 서양화가였던 미술교사 고희동의 지도아래 서양화법을 익히고, `23년부터는 [고려미술회]에서 서양식 목탄소묘를 배우기도 하였다. 그러나 본격적인 미술입문은 의학을 공부하기 위해 1925년 도일하여 가와바다화학교(川端畵學校) 1년을 거쳐 이듬해 동경미술학교 양화과에 입학하면서부터이다. 이 양화과에서 구로다 세이키(黑田淸輝)의 제자로 자연대상을 훨씬 주관적인 감정과 표현형식으로 함축시키면서 일본화된 외광파 화풍을 이어나가던 후지시마 다케지(藤島武二)의 수업을 받기도 하였다. 이 동경미술학교에서 만난 김주경과 1928년 귀국직후 국내 첫 양화단체 [녹향회](綠鄕會, 1928∼32)를 창립하였고 그의 주선으로 1935년부터 송도고보에서 교편을 잡으면서 함께 한국근대화단에 인상파 화풍을 보급하는 주역이 되었다. 두 사람이 1938년 공동으로 펴낸 [吳之湖 金周經 二人畵集]은 국내 첫 대형원색화보로서 민족정서와 남도적 감성을 바탕으로 동양 자연주의와 서구 인상주의를 접목시킨 예술론을 담고 있다. '光의 약동, 色의 환희, 自然에 대한 감격'으로 압축되는 그의 회화관은 초기 서양화단의 미학적 바탕을 다져주면서 이후 한국 자연주의 인상화풍의 고전이 되었다. 이 화집에 실린 <사과밭>이나 <도원풍경>, <녹음> 등 풍경화들은 <처의 상>을 비롯한 몇 점의 인물화와 달리 생명활동이 왕성한 봄·여름 풍경을 점묘에 가까운 짧은 필선들로 간결하면서도 밀도 있게 겹쳐 표현하였다. 퇴색의 영향도 있겠지만 밝은 화면을 의도한 탓인지 대체로 흰색조가 많이 섞인 초기화풍은 고향에 내려 온 뒤 `48년 '광주미술연구회' 결성과 조선대 교수로 초빙되는 해방 후 `40년대 말까지 이어진다. 조선대학교 교수시절(1949∼60)을 중심으로 광주화단의 터를 닦기 시작하는 1950년대는 그 동안의 객지생활과 한국전쟁 말미의 입산전력에 따른 심적 고통을 겪은 다음 새롭게 다가온 남도정취와 자연풍광에 대한 애정이 훨씬 두드러지면서 주관적 단순변형의 '개변된 자연'이 확대되고 있다. `60년대 전반까지 이어지는 이 시기에 <추경>(1953), <추광>(1960) 등 평온한 가을 풍경들과 화병·석류·열대어 등 정물소재들이 많고, 선명한 원색과 거의 색면에 가까운 넓은 붓질 처리가 특징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마치 모더니즘 양식처럼 `50년대에 뒤늦게 받아들여져 확산되고 있던 기하학적 추상미술, 특히 `57년 이후 국내화단을 휩쓸기 시작한 '앵포르멜'(비정형) 추상운동에 대하여 '20세기 기계문명시대가 만들어낸 장식미술인 추상미술이 최종 도달처에 이른 것'이라는 요지의 글들을 발표(<구상회화선언>, [자유문학], 1959. 8월호, 전남일보, 1960.1.7∼1.21)하여 비구상회화논쟁을 불러일으키기도 하였다. 모름지기 '회화는 자연에 대한 감격의 표현'이라며 생명성·정신성·형식성을 미의 세 가지 요소로 들었던 그의 자연주의 예술론은 `60년대 후반부터 `70년대 작품들에서 절정을 이루게 된다. 주로 항구풍경과 설경이 많기도 한 이 시기 작품들은 청보라를 주조색으로 자연대상과의 교감과 감정이입에 의한 내적 감흥의 표출이 속사에 가까운 달필들로 극대화되어 녹아 흐르는 듯한 필치들로 더욱 완숙미를 더해준다. 말하자면 그 동안 토착정서와 자연환경에 바탕을 두고 줄곧 추구하여온 서구 감각위주 인상파나 일본의 감상적 외광파와 다른 생명이 약동하는 유현미의 한국적 자연주의 회화양식을 정립시킨 셈이다.
역시 남도 서양화단 1세대에 속하면서 한국 근·현대 추상미술의 선구자로서 동양의 자연관과 남도출신다운 풍부한 감성을 바탕으로 독보적인 회화세계를 펼쳤던 김환기(金煥基, 1913∼74)의 경우는 오지호와 더불어 한국 초기 서양화단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확보하고 있다. 본래 신안 기좌도 출신으로 안좌국민학교 졸업 후 상경하여 서울 중동중학을 중퇴하고 1927년 일본에 건너갔으니 실제로 고향에서의 생활은 13년여에 불과하다. 이 소년기 이외에는 줄곧 타지에 머물렀고 그의 활동 가운데서도 고향에 대한 별다른 연계가 보이지 않은데다 추상미술이라는 형식이 쉽게 어우러지지 못하는 지역 미술풍토 등으로 남도화단에서는 그의 대외적 위상에 걸맞는 자리매김을 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어린 시절 감수성에 깊숙이 자리한 남도정서와 토속적 정취는 이후 작업의 근간을 이루며 그만의 독특한 문학적서정성으로 추상회화의 밑바탕을 이루게 된다. 그가 동경의 일본대학 미술학부와 연구과에서 본격적인 화업을 닦던 1932∼37년 당시는 일본 근대미술에서 청년세대의 전위미술운동이 일기 시작하는 전환기였다. 그 동안 관동대지진과 잇따른 금융공황기 속에 한동안 위축되어 있던 기하학적 추상형식들이 되살아나면서 더욱 확대된 소재(오브제)도입과 구성으로 실험적 형식들이 번져가고 있었다. 김환기 역시 `34년부터 일본의 젊은 화우들과 [아카데미 아방가르드]를 조직하고 이미 다이쇼오(大正)시기부터 니카카이(二科會)를 중심으로 모더니즘운동을 주도하고 있던 후지다 쓰쿠지(藤田嗣治) 도오고 세이지(東鄕靑兒) 등을 초빙하여 교습을 받기도 하였다. 실제 그가 `35년 [二科會]에 출품하였던 100호 대작 <종달새 울 때>만 해도 추상으로 변화과정인 듯 머리에 물동이를 인 한복여인의 단순조형방식에서 도오고의 입체파식 추상영향과 함께 문학적 향수를 살필 수 있다. 1936년 동경에서 첫 개인전을 갖고 이듬해 귀국한 뒤 서울화실에서 작업에만 전념하면서도 같은 해 창립된 [자유미술협회전] 등에 참여하여 일본 신미술운동 대열에 계속 참여한다. 당시 국내 화단은 이전의 외광파를 전형으로 인상파화풍을 더 확실히 하거나 야수파 같은 주관적 표현성이 강조되고는 있어도 추상이 전혀 받아들여질 수 있는 여건이 못되었다. 이 `30년대 후반의 <항공표지> <론도> <鄕> <창> <섬의 이야기> 등 일련의 작품들은 구상적 자연형상을 털어 버린 단순형태의 색면구성 위주로 당시 일본화단에서 모더니즘 형식으로 재해석되고 있던 1910년대 유럽의 기하학적 추상 또는 몬드리안의 신조형주의 계열에 간접적인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렇다고 감정과 내용 주관적 표현성의 개입을 완전 배제시킨 서구현지의 모더니즘 방식이나 일본작가들처럼 형식실험 자체에만 몰두하지는 않은 듯 여전히 자연 이미지가 단순화된 형태나 명제들 속에서 은근히 드러나기도 한다. 그런 김환기의 회화는 광복 이후 특히 1948년 국내 첫 추상미술단체인 [신사실파] 결성 이후부터 큰 변화를 보여 다시 자연형상을 회복하기 시작하는데, 특히 `50년대는 그의 회화세계에서 중요한 전기를 이룬다. 일제시기 모더니즘에 심취하였던 그가 뒤늦게 조선백자에 매료되면서부터 비롯된 문화유산과 민속 등 민족전통에 대한 관심은 그들을 주된 소재로 삼아 표현형식의 새로운 모색을 거듭하게 만들었다. 조선백자 석굴암 소슬대문 같은 소재들을 단순변형시켜 재구성하거나, 산수화 문인화 등 전통회화의 필선효과와 공간여백의 멋을 서구식 화구로 각색시켜 보기도 하고, 다리밟기 같은 민속 소재를 특유의 단순 조형방식으로 옮겨 내기도 한다. 그리고 `56년 프랑스로 떠나 3년 동안 2차대전 이후의 격변기에 휩싸여 있던 서구미술 현장의 움직임을 직접 접하게 된 뒤로 민족적이면서 현대적인 회화세계에 더욱 집중하게 된다. 형상은 훨씬 단순해지면서 두터운 화면질감에 푸른색조를 주조색으로 달과 산 학 구름 같은 동양 자연주의의 초탈한 사유세계 쪽으로 옮겨가는 작업들이 계속되었던 것이다. `60년대, 브라질을 거쳐 미국에 정착하게 되는 `63년 이후 김환기의 작품은 재료와 형식은 서양화이되 그 정신세계와 감성만큼은 현대 동양화라 할만한 회화세계로 자리를 잡아간다. 그의 자연에 대한 심상의 세계와 천성적인 시적 정취를 곁들여 서구 기하학적 추상이나 비정형 추상형식 또는 과도한 행위성 물질성과 다른 동양적 추상회화를 정립시켜내기에 이르른 것이다. 주로 <메아리>나 자연의 <소리>를 테마로 반점 같은 작은 붓자욱들을 연속시켜 이전의 단순색면 작업과는 또 다른 깊고도 투명한 공간성을 보여주기에 이르렀다. 이들 후기작품들은 '세계적이기에는 가장 민족적이어야 하지 않을까. 예술이란 강렬한 민족의 노래인 것 같다'는 그의 말처럼 20세기 후반 들어 전혀 낯선 형식들로 급변을 거듭하고 있던 서구미술계와 부유하고 있는 당대의 문화현실 속에서 상대적으로 근원으로의 회귀, 이를테면 자기존재와 예술의 문화적 뿌리에 대한 탐구로 화제의 변화를 보여주는 예들이다. 파격의 표현형식과 매체, 개념들이 속속 등장하는 격변기 서구미술 현장에서 이전부터 천착해 온 동양적 사유의 세계로 눈을 돌리게 되면서 마치 문인화의 정신세계와도 같은 회화적 함축에 관심을 모아낸 것들이다. 궁극적으로는 동양회화 본래의 추상정신 체득과 그 현대적 변용의 가능성을 구체화시켜 가는 작업들로서 자연주의 시정이 짙게 묻어 나오던 이전 작품들과도 심성적 바탕이 자연스럽게 맞닿아 있는 회화세계의 탐닉이라 하겠다.
이 밖에 1902년 여수 출생으로 1932년에 동경미술학교 양화과를 졸업한 박근호(朴根鎬)와, 그 이듬해 졸업한 1908년 해남 출신 김두제(김두濟)가 있는데, 자료가 발굴되지 못하여 졸업작품으로 제출된 자화상들을 통하여 초기화풍을 짐작해 볼 수 있을 뿐이다. 이들은 같은 학교 선배인 김홍식 오지호와는 또 다르면서 서로가 전혀 상반된 성향을 보인다. 이들 가운데 오지호의 일년 후배인 박근호는 흰 두루마기 부분은 부드럽게 처리하면서도 얼굴만큼은 서양 고전화법의 전형대로 골상의 해부학적 파악에 기초한 명암위주로 정확하게 묘사하였는데 그 치밀한 사실화법은 다른 졸업작품들과 비교해서도 단연 돋보인다. 그에 비하면 검정 교복차림의 김두제 자화상은 전체적으로 명암위주 묘사이면서도 흐릿한 색조와 밀착되지 않은 붓질들로 박근호와는 대조적이다. 단지 개인의 기질에 따른 묘사력의 차이인지 아니면 외광파에 바탕은 두었으되 대정년간부터 당시 일본 서양화단의 일부에서 나타나고 있던 낭만적 화풍을 따랐었는지 단정지을 수는 없다. 아무튼 일제시대 중반부터 시작된 이들 1세대들의 활동은 호남 서양화단의 형성에 직간접적인 기초가 되었을 뿐 아니라 당대의 미술현장에서 활발히 진행되던 현대미술보다는 전통문화와 토착정서에 깊이 연관을 맺고 있어 이후 지역화단의 흐름을 어느 정도 방향 짓고 있다는 점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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