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화는 태양과 생명의 융합이다. 그것은 光을 통하여본 생명이요 光에 의하여 약동하는 생명의 자태다...태양에의 환희의 표현이 곧 회화이다' <순수회화론>(1938,동아일보), 한국의 풍광과 민족정서를 바탕으로 한 자연주의 전통과 인상파화법을 융합시켜 특히 생명의 근원인 빛과 그 발현으로써 색을 중심으로 가장 남도적이자 한국적인 예술세계를 정립시킨 오지호(吳之湖, 1905∼82) 예술론의 핵심구절이다.
실로 서구화법의 유입이후 그 추종이나 동경 아니면 개인적 자족취미로 그치는 경우들이 허다하던 우리 근대미술기에 민족자존의 주체문화 정립에 대한 신념과 소망을 실천적 삶과 회화를 통하여 설파 고취하였던 그는 분명 한국미술사의 커다란 봉우리임에 틀림없다.
오지호는 화순 동복의 토호 집안에서 막내로 태어났다. 부친 오재영은 한일합방 직전 잠시 맡게 된 보성 군수를 사직한 뒤 망국의 통분을 삭이고 있던 차에 3.1운동 바로 한달 뒤의 고종인산(高宗因山)을 보고 내려와 자결해버리고 말았다.
이런 꼿꼿한 선비의 지조와 민족정신은 또한 오지호에게도 이어져 [鮮展] 참여기피, 창씨개명과 성전미술찬양 거부, 해방 후 '민족미술건설' 활동과 민족회화론 제창, 우리말의 뿌리 찾기로서 한자교육운동 등 그의 전 생애와 예술을 통해 일관되고 있다.
그는 1921년 편입한 휘문고보 시절, 동경미술학교 첫 졸업생이자 한국 첫 서양화가였던 미술교사 고희동의 지도아래 서양화법을 익히고, `23년부터는 [고려미술회]에서 서양식 목탄소묘를 배우기도 하였다.
그러나 본격적인 미술입문은 의학을 공부하기 위해 1925년 도일하여 가와바다화학교(川端畵學校) 1년을 거쳐 이듬해 동경미술학교 양화과에 입학하면서부터이다. 이 양화과에서 구로다 세이키(黑田淸輝)의 제자로 자연대상을 훨씬 주관적인 감정과 표현형식으로 함축시키면서 일본화된 외광파 화풍을 이어나가던 후지시마 다케지(藤島武二)의 수업을 받기도 하였다.
이 동경미술학교에서 만난 김주경과 1928년 귀국직후 국내 첫 양화단체 [녹향회](綠鄕會, 1928∼32)를 창립하였고 그의 주선으로 1935년부터 송도고보에서 교편을 잡으면서 함께 한국근대화단에 인상파 화풍을 보급하는 주역이 되었다.
두 사람이 1938년 공동으로 펴낸 [吳之湖 金周經 二人畵集]은 국내 첫 대형원색화보로서 민족정서와 남도적 감성을 바탕으로 동양 자연주의와 서구 인상주의를 접목시킨 예술론을 담고 있다.
'光의 약동, 色의 환희, 自然에 대한 감격'으로 압축되는 그의 회화관은 초기 서양화단의 미학적 바탕을 다져주면서 이후 한국 자연주의 인상화풍의 고전이 되었다.
이 화집에 실린 <사과밭>이나 <도원풍경>, <녹음> 등 풍경화들은 <처의 상>을 비롯한 몇 점의 인물화와 달리 생명활동이 왕성한 봄·여름 풍경을 점묘에 가까운 짧은 필선들로 간결하면서도 밀도 있게 겹쳐 표현하였다.
퇴색의 영향도 있겠지만 밝은 화면을 의도한 탓인지 대체로 흰색조가 많이 섞인 초기화풍은 고향에 내려 온 뒤 `48년 '광주미술연구회' 결성과 조선대 교수로 초빙되는 해방 후 `40년대 말까지 이어진다.
조선대학교 교수시절(1949∼60)을 중심으로 광주화단의 터를 닦기 시작하는 1950년대는 그 동안의 객지생활과 한국전쟁 말미의 입산전력에 따른 심적 고통을 겪은 다음 새롭게 다가온 남도정취와 자연풍광에 대한 애정이 훨씬 두드러지면서 주관적 단순변형의 '개변된 자연'이 확대되고 있다.
`60년대 전반까지 이어지는 이 시기에 <추경>(1953), <추광>(1960) 등 평온한 가을 풍경들과 화병·석류·열대어 등 정물소재들이 많고, 선명한 원색과 거의 색면에 가까운 넓은 붓질 처리가 특징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마치 모더니즘 양식처럼 `50년대에 뒤늦게 받아들여져 확산되고 있던 기하학적 추상미술, 특히 `57년 이후 국내화단을 휩쓸기 시작한 '앵포르멜'(비정형) 추상운동에 대하여 '20세기 기계문명시대가 만들어낸 장식미술인 추상미술이 최종 도달처에 이른 것'이라는 요지의 글들을 발표(<구상회화선언>, [자유문학], 1959. 8월호, 전남일보, 1960.1.7∼1.21)하여 비구상회화논쟁을 불러일으키기도 하였다.
모름지기 '회화는 자연에 대한 감격의 표현'이라며 생명성·정신성·형식성을 미의 세 가지 요소로 들었던 그의 자연주의 예술론은 `60년대 후반부터 `70년대 작품들에서 절정을 이루게 된다.
주로 항구풍경과 설경이 많기도 한 이 시기 작품들은 청보라를 주조색으로 자연대상과의 교감과 감정이입에 의한 내적 감흥의 표출이 속사에 가까운 달필들로 극대화되어 녹아 흐르는 듯한 필치들로 더욱 완숙미를 더해준다.
말하자면 그 동안 토착정서와 자연환경에 바탕을 두고 줄곧 추구하여온 서구 감각위주 인상파나 일본의 감상적 외광파와 다른 생명이 약동하는 유현미의 한국적 자연주의 회화양식을 정립시킨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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