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화 또는 남종화라 일컬어지는 호남회화의 역사는 현재 남아 전하는 자료를 따라 학포 양팽손(學圃 梁彭孫, 1488~1545)부터 시작할 수 있다. 본래 화순 능주사람으로 자는 대춘(大春)인데 23세 때 생원시를 통해 성균관유생으로 나아갔다가 문과급제 후 홍문관과 사간원 정언, 홍문관 교리 등을 지내며 뜻을 굽힘없이 펴 중종이 진신학사(眞愼學士)라 이르기도 했다. 학포는 원래 ‘면앙정시단’(勉仰亭詩壇)의 주인 송순(宋純, 1493~1583)과 한 때 호남사림의 거두 송흠(宋欽) 문하에서 학업을 닦았고, 소쇄옹 양산보(瀟灑翁 梁山甫, 1503~57)도 학포와는 집안친척간으로 정암의 제자였다. 그러나 정암 조광조 등과 더불어 신진사림으로 이름을 떨치다가 훈구세력과 소장학자간의 정치적 갈등에서 비롯된 기묘사화(己卯士禍, 1519)에 정암과 연루되어 벼슬을 뺏긴 채 낙향하게 되었다. 더구나 능주로 유배된 조광조가 그 해 사약을 받으니 세상에 대한 회한이 깊어져 34세부터 쌍봉사 아래에 학포당(學圃堂)을 짓고 은거에 들어갔다.
학포 양팽손의 회화는 바깥 세상살이와 일정 거리를 두면서 자연 속 호연지기와 내적 성정을 담아내고 있다. 낙향이후 작품이라 하는가 그 예인데, 조선전기에 유행하던 ‘안견파’ 화풍을 기본으로 따르고 있다. 물론 그림의 양식보다는 은일처사의 심경을 이해하는 게 중요하다. 구불거리며 아래부터 중심부까지 무게를 잡아주는 먼 산, 초당 선비들 옆 벼랑 끝에 꼿꼿하게 버티고 선 소나무들, 너른 강 위에 홀로 떠있는 고깃배 등이 어울려 정중동의 절제된 품격을 보여준다. 가슴속에서 펼쳐내는 자연과 그 속에서 내비치는 회한, 이를 적시는 촉촉한 물기의 부드러운 필선들이 내면을 담아내는 방편이 되고 있다. 오른쪽 윗 부분에 ‘강 넓어 세간에 이는 티끌 가로막아주고... 고깃배야 행여 오가지 마라 세상과 통할까 두렵다’는 오언시가 그림의 속내를 잘 말해 준다.
학포의 사의성(寫意性)이 뚜렷이 드러난 작품으로 <사계묵죽도(四季墨竹圖)>가 있다. 선비의 꼿꼿한 절개와 높은 문기(文氣)를 함축시켜내는 묵죽그림에 계절별 특징과 마음을 실어 표현한 작품이다. 물기를 머금은 죽순과 댓가지, 위를 향해 곧게 뻗어 오른 잎사귀들, 거친 바람에 잔뜩 구부러지면서도 팽팽하게 버티어선 긴장감, 차가운 눈 속에 꺾이고 찢겨버린 형상들은 신진 사대부의 입신과 정치적 이상의 좌절, 낙향이후의 심정을 상징적으로 담아내고 있다. 특히 일반 문인화들과는 달리 대나무 가지사이로 쌍쌍이 노니는 한 쌍의 새들은 가슴 속 응어리(胸中逸氣)를 의인화시킨 것으로 보여 더욱 애틋해 보이기도 한다.
학포의 회화세계는 분명 낙향 은둔한 선비의 심사를 달래기 위한 한풀이나 여기취미쯤이 아닌 작가의 내면 정신세계와 감성, 적절한 예술형식을 함께 어우러낸 전통회화의 참 멋을 보여준다. 따라서 단순히 이른 생존연대 때문만이 아닌 남도회화의 건실한 바탕을 다져주었던 선지자로써 의미가 중요한 것이다
한국회화사에서 중요한 위치로 자리매김 되고 있는 선도적 화가가 공재 윤두서(恭齋 尹斗緖, 1668~1715)이다. 조선 시조문학의 거두 윤선도의 증손인 그는 문필에 빼어난 자질을 지녔었지만 진사시험에 급제하고도 분파로 얼룩진 정치에 나가지 않고 학문과 시ㆍ서ㆍ화를 즐기며 생애를 보냈다. 원래가 현실정치에 소외되어 있으면서도 신학문과 새로운 사조에는 적극적이었던 남인계열 집안인데다, 실학과 서학의 선각자는 물론이고 신학문과 그림의 감식안에 뛰어난 인사라면 신분과 파당을 떠나 두터운 친분을 쌓았다. 이러한 문화적 배경이 실재 현실대상을 구체적으로 대하는 사실적 풍속화나 서구화법까지도 앞서 받아들일 수 있는 여건이 되었다고 보인다.
공재의 회화세계는 조선 초부터 정형으로 답습되고 있던 안견파 계열과, 17세기 초부터 일부 문인화가들 사이에서 나타나던 수묵과 시심 위주의 북송 미법산수(米法山水), 원나라 말기의 황공망 예찬 등 4대가와 명나라 초기의 오파로 이어지는 남종화계열 산수화, 주관적 감흥을 대범한 필묵으로 표출시키는 절파화법 등 여러 화풍이 고루 섞여 있다. 그러나 옛 자취에 머무르지 않고 구체적인 현실인식과 시대를 앞서가는 문화감각으로 18세기부터 새롭게 퍼지기 시작한 진경산수와 풍속화를 비롯, 조선의 사실주의를 이끌어 내는 가교 역할을 해냈던 것이다. 한국 근세문화의 격변기에 공재는 폭넓은 학식과 세상을 보는 눈, 타고난 예능적 소양이 어우러져 시대의 중심에 서 있는 것이다.
공재의 회화세계는 사의(寫意)와 사실(寫實)을 결합한 ‘화도론’(畵道論)으로 모아진다. 즉 ‘필법의 공교함과 묵법의 정묘함이 오묘하게 어우러져 신격(神格)에 이르고, 만물에 물상을 부여함이 그림의 도’라 하였다. 특히 그의 그림 가운데 호남남화 전통과 연관되는 남화계열을 주목할만한데, 남종화 교본인《고씨역대명인화보(顧氏歷代名人畵譜)》(1603)를 익혔고 자신의 저술 ≪기졸(記拙)≫ <화평(畵評)>에서도 ‘왕유는 형상 밖에서 그림의 뜻(畵意)를 얻었다’ ‘선비의 묵희(墨戱)’ ‘맑고 깨끗한 일격(逸格)은 예찬과 비슷하다’는 등 남종 문인화의 정신적 바탕을 기술하고 있다.
공재가 남긴 <평사낙안(平沙落雁)><석양희조(夕陽戱釣)> 같은 산수화들은 평온하고 넓은 여백, 간결한 필선과 엷은 먹색 등으로 남종화의 흐름을 살필 수 있는 자료가 된다. 아울러 <자화상>은 얼굴부분만을 대범하고 치밀하게 묘사한 사실화법의 극치로 서구식 음영법을 수용하여 얼굴근육 흐름을 따라 농담이 조절된 짧은 붓선들을 점묘법처럼 이어 가면서 골상과 표정을 잡아내었다. 특히 골기(骨氣)에 바탕을 둔 살붙임도 뛰어나지만 내적 정신과 품성의 깊이가 우러나오는 눈빛은 진정 ‘정신적 경지를 얻어낸(得其神)’ 독창적 화법이라 하겠다. 뿐만 아니라 절친한 지우 <심득경의 초상>과 선화같은 <노승도>, 섬세하면서도 기품 넘치는 <미인도> 등 여러 인물화들은 대상에 따라 다양한 선묘와 묵법을 구사하면서 탁월한 솜씨를 보여준다.
또한 따스한 봄날 비탈진 산등성이에서 치마춤을 걷어올린 채 나물 캐는 두 아낙을 묘사한 <나물캐기(採艾圖)>를 비롯하여 <짚신삼기> <목기깎기> <밭갈기> 그림들도 서민들의 생업과 일상사들을 주의 깊게 관찰하여 재치 있는 화면구성으로 엮어낸 풍속화의 걸작들이다. 아울러 문화의 신감각을 보여주는 <채과도> <석류매지도> 등의 화첩 그림은 마치 서양의 정물화처럼 과반에 담긴 참외 수박 석류의 묘사에서 소재선택의 다양함과 수묵농담의 기법에서 앞선 감각을 볼 수 있다.
공재가 가다듬은 남화는 큰아들 낙서 윤덕희(駱西 尹德熙, 1685~1766), 차손인 청고 윤용(靑皐 尹容, 1708~1740) 등 3대로 이어지면서 가계를 이루게 되었다. 또한 외증손이자 조선후기 대표적 실학자인 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 1762~1836) 등 18세기 회화 흐름에 절대적 영향을 미치기도 하였다. 특히 아들 낙서는 <기마부인도> <군선경수도(群仙慶壽圖)> <관폭도>들을 통해 부친의 화법과 전통양식을 주로 따르고 있고, 문장과 화재에 뛰어나 진사시에 급제하였으나 요절하고만 손자 청고는 <증산심청(蒸山深靑)> <심야명월도> <바구니낀 아낙(挾籠採春)>들로 남종화와 풍속화에서 가풍을 이으면서 조선후기 호남화단을 엮어 내었다. 그리고 실사구시를 대명제로 화가들의 사실정신 결여를 비판하던 다산은 <방원인필의산수도(倣元人筆意山水圖)> 같은 원말 문인화가들의 정갈한 남종화풍의 그림을 남기기도 하였다. 아무튼 남화의 본체는 양식에 있기 보다 정신과 감성에 있다. 물론 정신을 강조한다 하여 형상을 소홀히 하거나 전통을 중히 여겨 특정 양식에 얽매이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자연과의 생명교감으로 그윽한 시정을 펼쳐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하겠다.
이름난 유학자이자 문인화가였던 학포ㆍ공재와 달리 직업화가로서 조선말기 한국회화사에 크게 이름을 떨친 이가 소치 허련(小痴 許鍊, 1809~1892)이다. 그는 앞 시대부터 닦아진 예도(藝道)의 바탕에 문기(文氣)와 남도정서를 접목시켜 한국남화는 물론 호남화단의 실질적 전통을 다져준 중요한 역할을 남겼고, 그의 후손들까지 그림이 대물림되어 ‘허씨일가’라 부르기도 한다. 소치 회화는 지리적 자연환경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지만 그에 앞서 19세기라는 역사공간에 배경을 두고 있다. 즉, 조선중기 이후 관념론적인 성리학의 무성한 논의가 수그러들고 국문소설과 경세론ㆍ실학 등으로 꾸준히 진행되어온 현실주의와, 진경산수(眞景山水)ㆍ풍속화ㆍ 동국진체(東國眞體)ㆍ민화ㆍ민불 등의 민속 세간문화에 이르기까지 새로운 주체적 문화전통으로 자리한 현세적 실사주의(實事主義)가 시대가 달라지면서 정신적 고전주의에 밀려나고 있던 때였다. 물론 복고성이 강한 청 왕조의 영향이기도 하지만 현세ㆍ감각적으로 흐르는 시대문화 풍조를 비판하며 정신적 고전주의를 회복하고자 했던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 1786~1856) 등의 고증학 금석학자들에 의해 주도된 조선말기의 문화흐름과 관련되고 있다. 추사의 많은 제자 가운데 소치도 스승의 남종문인화 정신을 담아내려 열중했었고, 이를 통해 비록 직업화가지만 당시 헌종을 포함해 대원군과 상류사회 문인사회 안에서 화격을 인정받으며 그들과 어울릴 수 있었다. 소치가 남긴 그림들에 비해 그의 예술세계를 살펴 볼만한 기록이나 자료는 매우 드물다. 다만 그가 20대 중반에 해남 녹우당을 찾아 직접 그림을 익혔다는 공재 윤두서의 그림 상당수가 전통 관념산수화들이었고, 그 가운데는 중국 남종화 교본을 참조한 진경산수 이전의 남화형식들이 섞여 있었다는 것을 참조해 볼 수 있다. 그리고 그의 예술세계에 깊은 정신적 영향을 준 대둔사의 초의선사(草衣) 또한 남종선(南宗禪)에 바탕을 둔 ‘작대기 산수’를 강조하였고, 30대 초에 선사의 소개로 만나 평생의 스승으로 모신 추사의 문인취향 회화양식이나 정신적 고전주의도 그의 회화세계를 살펴볼 수 있는 예들이다. 추사를 통해 중국 대표적인 역대 문인화가들의 화격과 회화세계를 익히면서 소치 회화의 중요한 바탕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고전적 문인화론을 인격수양의 방편으로 삼아 정신적 이상미로 끌어올리고자 한 추사의 회화관은 그대로 소치회화의 지침이 되었다. 소치는 당나라 문인화가이자 남종화를 처음 열었다고 하는 마힐 왕유(麻詰 王維)에게서 ‘허유(許維)’라는 이름과 마힐(摩詰)이라는 자를, 정신적 스승으로 여겼던 원나라 말기 4대가 중 황공망(黃公望)의 호 ‘대치(大癡)’에서 ‘소치’(小癡)를, 예찬(倪瓚)의 호 ‘운림’에서는 진도 ‘운림산방(雲林山房)’의 당호를 빌어 왔을 뿐 아니라, 명나라의 심주나 문징명 동기창, 청나라 석도 등 대부분 남화전통으로 이어지는 문인화가들의 흐름을 주로 따르고 있었다. 그의 회화세계에서도 정신적 스승이었던 당나라 왕유와 원나라 대치 황공망, 운림 예찬의 속기를 벗어버린 간일한 화격을 따르고자 하였다. 또한 좋은 서화들을 두루 접하면서 대치?예찬은 물론 청초의 선승화가 석도(石濤) 등 남종문인화 계열의 산수화를 옮겨 그리기도 하면서 전통남화의 화제와 화법을 따라 수묵위주의 부드러운 피마준과 낮으막한 토산의 평원산수로 수면공간을 사이에 둔 이단구성의 화폭을 즐겨 그렸다. 스승 추사가 작고한 뒤 1857년, 지천명을 바라보는 나이에 고향 진도로 돌아온 소치는 그의 회화세계에 큰 변화를 맞이하게 된다. 첨찰산 아래 운림산방을 짓고 ‘솔가지를 모아 차 다려 마시고 주역, 시경, 도연명과 두보의 시, 소동파의 문장을 읽거나 오솔길을 거닐며 소나무와 대나무를 어루만지고 붓을 들어 글씨를 쓰면서…’ 마치 문인 묵객출신의 은일처사 같은 호연지기로 자연교감에 바탕을 둔 호남남화의 확실한 뿌리를 다지게 된 것이다. 무엇보다 넉넉한 시정과 남도적 감성을 바탕으로 자연의 운치를 담아내면서 두루 섭렵한 여러 화론과 화법들을 거르고 우려내어 호남남화, 나아가 한국 남화의 고전을 완숙시켜내기에 이르렀다. 낙향 이후 소치의 회화는 비로소 추사서체의 흔적이나 전통 중국남화의 그늘에서 벗어나 그 스스로의 화법을 세우게 된다. 그 동안의 폭넓은 문화접촉과 교우, 말년 들어 농익어 가는 자연과 세상에 대한 마음과 감성의 변화, 토착정서와 기질 속에서 가다듬어진 독특한 화법까지 어우러지면서 가법과 지역화풍의 근간을 완성하게 된 것이다. 세속적 감각을 뛰어넘은 정신적 이상미를 추구하는 가운데 세간살이와 일정한 거리를 두면서도 자기 세계를 즐기는 예도와, 마른 붓질로 성글게 엮거나 촉촉한 담먹으로 살을 채워가면서 필선과 준들이 모여 자연 회귀의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독특한 회화세계를 이루어 내었다. 아무튼 남화의 근본이 정신과 감성, 자연교감과 삶의 조화라 할 때 소치 회화세계는 하나의 고전이 되기에 충분하다. 물론 소치시대와 같은 농본문화의 후덕함과 여유로운 감성, 자연의 너른 품과는 환경자체가 퍽이나 달라졌다. 그리고 호남남화의 근본정신과 회화양식은 지금의 현실과는 너무 동떨어진 지난 시대의 전통 아니면 생기가 사라진 골동취미로 여겨질 수도 있다. 하지만 삶의 정서와 의식의 밑바탕에 뿌리를 두고 현재까지도 그 맥이 이어지고 있는 지역문화 전통의 한 축이라는 점만은 분명하다.
소치의 독특한 회화세계는 전통과 가법에 충실하였던 2대 미산과, 이를 바탕으로 삼되 새로운 시대변화 속에서 근대적 예술가상을 찾아 자신만의 독자적인 회화세계를 펼치고자 했던 3대 남농으로 이어지면서 가계 이상의 전환기 근대 한국화의 흐름을 보여주는 실 예가 되고 있다. 미산 허형(米山 許瀅, 1861~1937)은 소치의 넷째 아들로 맏형(큰 미산)에 대한 부친의 기대에 밀려 15세 이후에야 화업을 허락 받고 남화정신과 양식을 전수 받게 되었다. 하지만 당대 문화와 지식인 사회와 접촉에서 소치에 미치지 못하여 ‘문기(文氣)’와 ‘화도(畵道)’를 세우는데는 한계가 있었다. 몰락한 향반 처지로 그림을 생업으로 삼을 수밖에 없다보니 회화의 정신성을 맘껏 탐닉할 형편도 못되었고, 생활에 묻히다 보니 바깥 세상을 두루 접하면서 깊이 있는 화도를 펼칠 수도 없었다. 더구나 회갑을 맞던 해 맏아들을 잃고 운림산방을 떠나 정처 없이 떠돌다 강진 병영에서 4년여를 머문 뒤 말년에 목포로 옮겨 정착하기까지 계속 불안정한 상태였다. 그런 미산을 의재는 ‘소치를 닮아서 화재가 아주 뛰어났으나 견문이 좁은데다 화론이 깊지 못하였고 갈수록 가세가 빈한해진 탓으로 워낙 다작을 하여 후대에 좋은 그림을 남기지 못한 것이 애석하다’ 하였다. 결국 소치가 세운 호남남화는 2대에 이르러 동학농민혁명ㆍ갑오경장ㆍ외세침탈과 한일합방ㆍ신문물 신미술의 유입 등 전통의 관념과 틀을 깨는 잇따른 사건과 어수선한 시대상황 속에서 차츰 빛 바랜 전통회화 형식으로 움츠러들고 허씨가법과 지역화풍쯤으로 남게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아무튼 미산이 비록 정신적 바탕은 충분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그림에 대한 재능은 이미 부친이 인정한 터였고, 호남남화 전통을 잇는 다리 역할과 함께 실제 작품에서도 미산 만의 독특한 필묵의 맛을 느낄 수 있다. 가령 소치의 작품들에서 살붙임을 위한 엷은 먹빛과 더불어 그림의 뼈대를 잡아주는 필선들이 마르고 성근 필치들인 경우가 많은데 비해 미산에게서는 훨씬 촉촉하고 부드러운 붓놀림이 두드러지는 것도 그 한 예다. 더욱이 노년의 산수화에서는 문기를 함축시킨 소치의 간일한 필치와 달리 가느다란 선묘로 바윗골이나 산세를 채우면서 무수한 태점들을 곁들이고 있는 점도 서로 다른 점이다. 말하자면 미산의 회화는 훨씬 섬세하고 부드러운 느낌이 앞서면서 강건한 필력보다는 고아(高雅)한 면이 엿보이기도 한다. 특히 화훼류에서는 물기를 흠뻑 머금은 일필몰골(一筆沒骨)의 먹빛과 붓놀림들이 자유분방하게 베풀어지고 있다. 특히 묵모란을 중심으로 묵매(墨梅)ㆍ묵연(墨蓮)ㆍ묵죽(墨竹), 그밖에 노송ㆍ석죽란 같은 화훼도에서는 생기 넘치면서 각 화재들이 괴석과 어우러져 빠르고 느린, 또는 뉘거나 세우는 붓놀림에 따라 독특한 멋의 회화세계를 보여 준다.
남농 허건(南農 許楗, 1907~87)은 부친인 미산에게 한학과 남화의 기초를 닦으면서 가법을 물려받았다. 따라서 마 껍질을 가늘게 풀어 헤친 듯한 필선(披麻)이나 다소 묵직하게 덧쌓아 우려내는 먹색(積墨法), 또는 엷은 반점처럼 굵은 붓자욱을 잇대어 가는 미법산수(米法山水) 등 여러 전통화법을 기본으로 다지게 되었다. 그러면서도 일찍부터 그만의 독자적이고 강한 개성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이를테면 무게가 더해진 필묵, 채색을 곁들인 감각적인 요소들 도입, 소경산수인물처럼 인물과 노송을 강조하면서 산수를 훨씬 가깝게 둘러서게 하는 근경의 강조 등이 그 예다. 이같은 남농의 새로운 회화세계를 향한 창작의지는 변화하는 시대환경의 영향을 무시할 수 없다. 즉, 개항지 목포에서 근대식 상업전수학교를 다녔고, 초급학교 때 서구식 공모전 형태인 [서화작품전]에 입상했는가 하면, 일본에 유학한 동생 허림(許 林, 1917~42) 등으로부터 신문화를 직간접적으로 접하면서 새로운 세계에 눈을 뜨게 된 것이다. 소치ㆍ미산 세대와 달리 서구식의 근대 문물을 가까이서 접하게 되고, 문인취향에 맞춰 화도(畵道)를 닦거나 화공으로 봉사해야 했던 신분상의 얶매임에서 벗어나 근대적 ‘화단(畵壇)’과 ‘작가(作家)’ 입장의 미술계 활동들을 지켜보면서 많은 자극을 받았으리라 여겨진다. 남농은 그의 남화의 역사와 화론, 화법상의 특징들을 체계적으로 서술한 《남종회화사》(1994, 서문당)에서 ‘문인화는… 순수한 회화라고도 할 수 없다. …문묵(文墨)을 기호한 선비들의 그림이란 의미로… 예로부터 순수 남화작가를 천공(賤工) 속공(俗工) 그림쟁이 환쟁이로 천시 멸시하면서 문인과 사대부들은 회화를 시문과 독서에 여기(餘技) 삼아 희필(戱筆)하였다… 이 작가들을 순수 예술가로 볼 수 없는 것이다’라고 하여 문인취미의 아류에서 벗어나 옛 화공들과는 다른 근대적 작가정신을 지니고자 하였던 것 같다. 그런 만큼 남농은 화가 스스로의 자존과 남화의 줏대를 바로 세우는데 굳은 뜻을 세웠던 듯 하다. 무엇보다 ‘옛것만을 모범 삼는 태도(體帖固守)나 모화사상(慕華思想)의 봉건적 잔재를 일소할 각오가 요청되는 동시에 근로대중의 진실한 회화를 해야’ 한다면서 ‘우리들이 가진 현대인의 생활감정에 적응하는 남화의 세계’를 펼쳐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이는 관념산수에 젖어있던 전통화단은 물론이고 문인취향의 고전적 이상미를 따르던 남화의 대물림에서 크게 벗어나는 생각이 아닐 수 없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변화 속에서 중심을 유지하고자 했던 듯 지나치게 관념산수에 빠져 당대 현실을 도외시하는 부류들과 손재주만으로 화폭을 채워내는 신감각파 그림들에 대해서도 비판하였다. 남농회화의 새로운 면모는 1930년대 새로운 화법들의 도입을 지나 `40년대부터 뚜렷해지는 실경사생에서 찾을 수 있다. 서양화 구도와 세밀하면서 진한 채색, 일본 [문부성미술전람회](文展) 신화풍의 자극인 듯한 기존 남화전통과 크게 다른 변화를 보여준다. 가령 전통 채색화법과는 달리 거칠고 대담하게 진한 채색를 올린 <금강산 보덕굴>(1940)과, 그 보다는 훨씬 차분한 필치로 비 오는 산마을을 묘사한 <녹우(綠雨)>(1941), 산언저리 밭두렁과 촌가를 포착하여 마지막 [선전](1944년 제23회)에서 총독상을 수상한 <목포일우>(1944) 등은 이른 바 왜색화풍의 영향에도 불구하고 남농의 풍부한 회화적 감성과 현장감흥을 보여주는 좋은 예들이다. 그리고 이들 외에 1940년대 ‘남농외사’(南農外史)라 서명된 많은 수묵담채화들도 대부분 정형화된 틀을 깨트리면서 토속적 정취가 물씬 풍겨나는데, 이렇듯 전통양식을 벗어난 호방한 필법들은 이후 그의 회화세계에서 두드러진 특징으로 이어진다. 그러던 `50년대 중반이후 남농회화는 사람살이의 흔적과 현장감에서 점차 멀어지고 자연풍광을 넓게 보는 쪽으로 변하가면서 화면을 옆으로 길게 쓰는 수묵담채의 산수나 소나무그림들이 많아진다. 특히 남농회화의 상징이 되다시피 한 소나무들이 더 큰 비중으로 배치되거나 단독소재로 다루어지는 경우들이 두드러진다. 끝이 갈라진 붓질로 대담하게 뻗어나가면서 경쾌하게 조절되는 먹의 농담, 무엇보다 부채살 모양으로 퍼지던 솔잎을 옆으로만 잇대거나 마치 새집처럼 헝클어진 선들로 뭉쳐내면서 부러질 듯 거칠고 강하게 표현되는 수지법들은 남농만의 독자적인 회화세계라 하겠다. 이렇듯 옛법에 얽매이기를 거부하면서 실제대상의 명확한 관찰과 파악에 근거한 남농의 회화는 피상적 문기 보다는 작가자신의 주관적 감흥과 실재 대상과의 교감을 중요시한 것으로 이후 남화전통에서 개성 어린 화풍들의 터닦기가 된 셈이다.
소치(小痴)로부터 뚜렷한 맥을 형성하기 시작한 호남남화가 남도의 전형화풍으로 뚜렷하게 자리잡게 된 것은 앞의 남농과 함께 의재 허백련(毅齋 許百鍊, 1891~1977)에 이르러서다. 그 것은 남화가 본래 지향해 온 예도(藝道)로서 인격성과 고아한 화격, 자연본성과의 합치 등이 그의 작품 속에 가장 잘 담겨져 있기 때문일 것이다. 특히 예술적 창의성과 신감각ㆍ개성을 앞세웠던 남농에 비해 그림 자체보다는 덕성과 도의(道義)를 닦고자 했던 의재의 회화와 예술정신이 좋은 대조를 보인다. 의재의 회화세계는 남도지역 특유의 자연환경, 농경사회 전통 속에서 몸에 배인 자연철리와 생명교감, 후덕스럽고 낙천적인 삶의 풍토와 정서 등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그러나 큰 틀로 본 의재의 회화세계가 자연본성에 원천을 둔 예도와 정신적 유현미(幽玄美)에 중심이 두어져 있었다면 그의 인생사와 시대환경은 결코 그런 이상적 회화세계에 탐닉하고 있을 형편은 못되었다. 어린시절 성장기인 1890년대는 근대로의 급속한 이행기로 외세와 서구문물의 자극, 그에 따른 개화와 수구의 갈등, 변혁을 꿈꾸는 갑신정변과 동학혁명이 계속되고 결국 한일합병으로 치달아 가는 혼돈의 시기였다. 이런 전환기의 소용돌이 속에서 의재는 향반(鄕班)이던 부친에게서 한학을, 집안 어른인 미산 허형으로부터 사군자와 서법을 익히면서 신식 보통학교를 다니면서 문화흐름을 타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 의재에게 결정적 계기가 된 것은 정신적 스승 무정 정만조(茂亭 鄭萬朝)와의 만남이었다. 당시 무정은 조선왕조 말에 승지와 참의를 지내다가 반-민씨 일파로 몰려 진도로 유배를 와 있었다. 그러나 곧 합방 무렵의 정치변동 속에 귀양살이에서 풀려나 공직에 복귀하면서 고위 관리이자 학자로서 문화상류층 사이 폭넓은 인맥을 갖고, 신문화에 대한 적극적인 관심으로 일본현지를 다녀오는 등 식민지시대 출세한 지식인으로 자리를 굳혀가게 된다. 그런 무정의 도움으로 일본유학을 떠나 신문화를 직접 접촉할 수 있게 되었다. 그의 일본유학은 단지 법학도(立命館)에 적을 두고 있었을 뿐 여러 지역을 유람하고, 견문을 넓히면서 당시 일본 문화계에 넘쳐나고 있던 대정년간(大正, 1912~26)의 자유로운 분위기와 활기를 고루 섭취할 수 있었다. 더불어 이 시기 인촌 김성수와 고하 송진우 등 과 교분을 쌓고, 일본 남화의 대가 고무로 스이운(小室翠雲)으로부터 화업을 익히는 등 예술과 인생 모든 면에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고 있었다. 이런 바깥세상의 체험에도 불구하고 귀국 후 활동은 옛법과 뚜렷한 차별보다는 자신의 본래 기질과 감성대로 전통회화를 체질화시켜 가는 모습을 보인다. 의재의 회화는 소치가 보여주었던 중국 남종문인화의 고전적 성향, 아니면 남농에게서 한때 나타나던 일본 신감각 채색화풍 또는 거칠고 과감한 개성의 필묵구사들과 사뭇 다르다. 곧 낯익은 우리 산천의 뼈대와 살붙임, 흙내음이 배어있고 철 따라 모습을 달리하는 그 모습들 속에서 남도 삶의 정서와 따스한 바람결을 담아내고 있다. 그러면서 의재(毅齋, 초기~20년대까지), 의재산인(毅齋散人, 1930년대), 의도인(毅道人, 1950년대 이후) 의옹(毅翁, 1970년대) 등 호를 따라 약간씩의 변화를 보인다. 크게 보면 연진회(鍊鎭會)를 발족시킨 1938년 무렵과 칠순으로 접어드는 1960년대를 전후한 시기 작품들에서 변화의 폭이 크게 나타나기도 한다. 대체로 초기에는 소치 이래로 내려오던 중국 남종 문인화풍을 바탕으로 삼고 일본 남화 요소들을 일부 도입하기도 한다. 그런 의재가 근대화단에 등단한 것은 [조선미술전람회]를 통해서이다. 그 첫 해에 두 점을 출품했는데 짙은 먹빛으로 녹음을 드리운 <하경산수>가 동양화부 1등 없는 2등 수석상을 차지하였다. 이를 계기로 중앙화단과 관계를 맺게 되고 지인들과 교분을 나누며 6회까지 매회 출품하였지만 이후로는 참여를 중단하고 개인활동 중심으로 회화세계를 펼쳐가게 된다. 이런 등단기의 경험을 바탕으로 `30년대, 특히 `38년 무렵부터는 간일한 필법과 깊어진 먹빛들로 독자적 화경을 열어가게 된다. <임만적취도(林巒積翠圖)> <야월적벽도(夜月赤壁圖)>는 참으로 그윽한 묵향을 느끼게 해주는 수작들이다. 그리고 해방 후 무등산 자락 옛 오방정(五放亭)을 개조한 춘설헌에 정착하게 되고, 회갑 이후인 1950년대부터 농업학교 운영과 춘설차밭 가꾸기를 화업과 함께 병행하면서 ‘바른 道의 길을 닦아 간다’는 뜻으로 ‘의도인(毅道人)’이라 호를 바꾸고 깊이 있는 필묵으로 정신적 깊이를 탐구해 나가게 된다. 이 시기 금강산 유람 때의 감흥을 우려낸 <원포귀범도(遠浦歸帆圖)>(1956년경)에는 ‘대개 화도(畵道)가 고법에서 나오지 아니하고 내 손에서 나오는 것도 아니며 또 고법이나 나의 솜씨밖에 있는 것도 아니니, 붓끝에서 철강 같은 획이 나와야 하며, 속된 것을 탈피하여 다 익히면 기운을 얻게 되고 능히 말할 수 있으니...’라는 화론 한 구절은 ‘의도인’시기 작품의 중심을 짐작케 한다. 이전의 피마준 부벽준 등 여러 화법을 독자적인 화풍으로 소화시키면서도 화법 그 자체에 얽매이기보다는 화재가 갖는 각각의 계절과 장소, 두드러진 특징과 분위기를 우선하고 각 소재들의 실재감을 드러내는데 우선하고 있다. `60년대 이후에는 굵고 성글면서도 부드럽고 후덕중후하며 훨씬 호방하고 간일한 필치로 의재의 만년기 완숙된 산수화들을 보여준다. 이와 함께 의재 회화에서 보기 드문 생업현장 실경화들도 여러 점 남겨지는데 옛 ‘경직도(耕織道)’ 같은 농사그림 연작이다. 이른 예인 <일출이작(日出而作)>(1954)부터 <농경도>(1961) <백두농인(白頭農人)> <전가팔월도(田家八月圖)>(1970년대) 등이 그 예로 천하의 근본으로서 농사에 대한 깊은 관심을 보여주는 실경산수화들이다. 의재의 회화는 대개가 역사적 과도기에 현세를 초탈한 듯 자연귀의 생활로 정신적 아취를 추구했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고 어지러운 세상의 흐름이나 이웃들의 삶에 무심했다고는 할 수 없다. ‘조상숭배(天)?이웃사랑(隣)?땅의 풍요(地)’ 등의 삼애정신을 바탕으로 식민지에서 갓 벗어난 민족의 빈곤한 의식과 가난한 삶을 극복하기 위해 해방직후 삼애학원(1945)과 농업기술학교(1947)를 설립 운영한 것이나, 민족자존의 뿌리와 얼을 되살리기 위한 무등산 천제단 단군신전건립 추진(1969)에 참여한 일들은 작품활동과 그 정신이 결코 별개가 아니기 때문이다. 비록 심산유곡 같은 산수를 소재 삼은 그림이라 할지라도 여느 남화가 보다 짙은 인간미와 생명력이 배어 나오는 것은 질박하고도 은근한 남도 삶의 체취와 자연스럽게 맞닿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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