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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남남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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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환기 화단의 변화와 화맥 형성


    원로작가의 타계와 신생 모임들

    근대냐 현대냐 관점에 따라 논란은 계속되고 있지만 20세기 한국미술사에서 새로운 국면으로의 전환과 함께 가장 복잡다단했던 시기는 아마 `50∼60년대일 것이다. 그리고 이 시기의 큰 흐름들이 `70년대까지 고착되면서 `80년대 이후 미술계 움직임과 뚜렷한 차이를 보여주기도 한다.

    해방과 서구 신미술의 본격적인 유입, 그리고 전후 청년세대의 도전과 전위운동 속에서 대개 일본 관전풍에서부터 이어지는 진한 채색 세밀화나, 서양화단의 추상과 비구상 형식을 도입한 필묵효과와 독자적 기법의 새로운 화면형식들이 늘어가는 흐름과 달리 호남 전통수묵산수는 고루한 구시대적 유물로 보여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서구미술의 확산에 대한 동양문화 전통과 자연주의 미학, 남도 토착문화를 지킨다는 의식들이 없지도 않았다.
    문제는 남화 본래의 정신과 감성을 살려내기 보다 단지 그림으로서 형식만을 되풀이하는 아류들이 늘어가면서 새로운 흐름이나 시대감각들로부터도 단절되고 부정적 의미의 지역화풍으로 폄하되는 결과를 자초하였던 것이다.

    이런 시대변화 속에 한국 현대미술사의 첫 전위미술운동이라 할 전후 청년세대들 중심의 `50년대 말부터 격렬한 추상표현주의(앵포르멜) 형식이 젊은 세대의 돌파구로 급속히 퍼져나가고, 서구 현지 미술형식들의 도입시차가 점점 좁혀지면서 미술계는 전혀 새로운 판도변화를 보여주고 있었다.
    예를 들어 [현대미술가협회](`57년 창립)·[60년미술협회](`60)·[악뛰엘](`62) 같은 과도기 청년미술모임을 중심으로 옵아트·개념예술·행위예술·미니멀아트 같은 이름도 낯선 미술형식들이 국제 현대미술이라는 이름아래 서구미술의 변방을 기웃거리는 방편이 되고 있었다.

    이러한 거센 파도와 소용돌이가 기존미술계의 아성과 권위에 정면으로 부딪히며 새로운 시대문화를 열어 가는 동안 기성화단은 이미 굳혀진 입지를 기반으로 세력권을 확장해 나가고 있었다.

    일본유학과 [선전(鮮展)] 경력, 그리고 아카데믹한 형식을 기반으로 다시 [국전(國展)]을 무대로 기득권과 권위를 굳혀가려는 기성세대와, 서울대·홍익대·조선대 등 해방후의 대학 졸업생들의 등단과 서구 현지미술과의 직·간접적인 접촉은 물론 활발한 동인전 중심 발표전, 시대형식을 쫓는 청년세대간의 팽팽한 대결양상이 벌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본래 시시각각 변화하는 일상 현실이나 유행과도 같은 시대감각 보다는 예도의 진정한 고전으로서 자연이법과 그 철리(哲理)를 따르는데 명분을 세워 온 전통 한국화단은 전혀 상황이 달랐다.

    무릎전수라고도 하는 사자전승(師資傳承)의 대물림으로 회화전통을 이어오는 동안 보수적 복고취향이 더욱 강해질 수밖에 없는 한국화단이고 보면 이러한 숨가쁜 시대상황이나 미술환경의 변화에 거의 무심한 듯 했다. 일제 때부터 이어지는 몇몇 원로 중진들의 한국화단내 영향력은 각 화파나 화맥과 지역화단 등을 대표하며 `70년대까지 이어지는데 당시 동아일보사가 매년 개최한 이들 작가들의 회고전은 이제껏 위세를 떨쳐온 근대적 미술양식을 정리하는 상징적인 의미를 지니게 된다.

    곧 이상범(`72년)·허백련(`73년)·노수현(`74년)·변관식(`75년)·허건(`80년) 등의 유작전과 회고전, 그리고 이상범(`72년)·변관식(`76년) 김정현(`76년) 허백련(`77년) 김은호(`79년) 등 원로작가들의 잇단 작고로 호남 남화계는 물론 한국화단 전체로 보아서도 `70년대는 미술의 흐름을 구분 짓는 편년기준으로 삼을 수 있다.



    화단의 중심무대로 자리한 관전

    전통의 보전과 답습, 개인활동들이 주를 이루면서 대학이라는 근대식 정규 교육과정을 마친 이도 드물었던 당시 한국화단에서 '관전(官展)'은 가장 확실한 인증통로였던 셈이다.
    곧 일제 때의 [선전]을 거의 그대로 계승한 [국전]은 화가로서 등단과 현실적 기반을 닦는데 절대적인 영향력을 갖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이른바 관전풍의 회화양식들이 하나의 교본으로 정형화되고 이를 둘러싼 기득권 다툼과 권위주의 아성이 `50∼70년대 화단을 고착시키는 두꺼운 벽이 되어갔다.

    문화적 자극과 출구가 다양한 중앙화단의 동향이 이러할 때 토착문화의 뿌리와 보전성이 방패막이였던 지방화단이야 더 말할 나위 없을 것이다.
    여전히 각 화숙별 화맥이나 [국전] [도전]같은 관전만이 활동력의 잣대가 되거나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허건·김정현·천경자(이상 白陽會, `57년 창립), 천경자·김옥진(이상 靑土會, `62년 발족) 정도가 중앙화단의 동인전에 참여하였을 뿐 애써 모임을 만들지도 않았고, [라우회](`62)·[창작동인회](`63)·[현대작가 에포크회](`64)·[청토회](`70) 같은 지역 서양화단의 줄이은 단체결성과 새로운 활동들보다는 관전만이 화단활동의 거의 유일한 통로이자 거점으로 여겼다고 봐야 할 것이다.

    특히 점차 더 벌어지는 시대문화와의 격차 때문에도 지역화풍으로 몰리게 되는 호남남화가 중앙화단과 소통하고 그 위상을 확보하면서 후진을 양성할 수 있는 길 또한 [국전] 참여로 터 나갈 수밖에 없었다.

    호남출신 한국화가 가운데 [선전]에 이어 [국전] 초기부터 깊이 관여하면서 지명도를 높였던 경우로 역시 의재 허백련(1회 추천, 4회 초대, 3회부터 심사)과 남농 허건(4회부터 초대, 9회 심사위원)을 빼놓을 수 없다.

    그리고 그들 화숙이나 다름없는 '연진회'와 '남화연구원'을 통해 연을 맺은 제자들이 스승들의 직·간접적인 후광을 받으며 그 뒤를 이어 입지를 굳혀가게 된다. 가령 조방원(제4회-문공부장관상, 8회부터 추천작가, 12회 심사)·김옥진·김정현·신영복(10회부터 추천작가, 이후 모두 심사위원까지 거침)·김명제(9회 문공부장관상) 등은 물론 김옥진·신영복·조방원 처럼 이미 `50년대에 3회 이상 거듭 특선을 하면서 이름을 얻게 된 경우들이다. 그러한 [국전]에서 활동경력은 [도전]에서도 그 비중이 거의 그대로 이어졌다.

    가령 허백련·허건·조방원·허행면·구철우 등은 [도전] 첫 회부터 심사위원으로 참여하면서 원로로 예우되었고 수많은 문하생들이 역시 이를 통로 삼아 화단에 등단하였다. 따라서 화단내 입지를 구축하는데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되는 공모전에서도 몇 갈래 화맥이 중심을 이루게 되었다. 물론 개인전이나 기획 초대 등 단체전으로 입지를 쌓는 경우도 없지 않지만 적어도 그 관전들이 민간주도로 전환되는 `80년대 이전까지는 관전경력이 절대적으로 우선시 되던 시기였고, 그만큼 다양하고 자유로운 창작활동과 구조적인 체질개선이 화단내 주요 과제였다.



    사승관계에 의한 화맥의 형성

    호남 남화는 관전(官展)을 통해 비로소 화단(畵壇)이라는 것이 형성되고 그 안에서 각 화파별로 현실적 기반을 다져 왔다.
    그것은 해방 후 이른 바 대학출신 작가들에 의한 학파가 일반적이었던 서양화 쪽과는 크게 다른 점이다. 서구식 신식교육과는 거리가 멀게 향리에서 무릎전수식 그림수업이나 한학을 공부한 화가들이 대부분이던 남화 쪽의 특성상 학교 졸업장 못지 않게 입신의 통로가 [관전] 경력이거나 사승관계였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서화를 연마함으로써 '진경(眞境)에 든다거나 양생(養生)을 진원(眞元)에 이르도록 하는' 풍류놀음 같은 가르침보다는 그림묘법을 익혀 공모전에서 경력을 쌓고 현실적 입지를 다지자는 욕구들이 더 강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듯 공모전 입상경력이 미술계내 기득권이나 권위와 직결된다고 보는 풍토는 공모전용 교본양식을 전형화시켰고, 스승의 관전을 비롯한 미술계 안팎의 영향력 정도에 따라 화숙의 명가가 평가되었다고 할 수 있다.

    한편으로 입문과 등단에 '관전' 못지 않은 영향력이 화맥(畵脈)이나 계보인데 특히 지역에서는 더 큰 힘으로 작용할 수밖에 없다. 특히 소치(小痴)나 의재(意齋) 남농(南農) 같은 이미 화명을 날린 화가를 찾아 그 회화세계의 정신성과 화법을 전수 받고자 하는 후학들이 점차 거대한 인맥을 이루게 된다.

    이 과정에서 곁가지로 중간에서 계보가 나누어진다 해도 근본은 한 뿌리에서 자라난 만큼 서로 크게 다르지를 않기 때문에 서울화단처럼 [국전]을 둘러싼 기득권 다툼이나 세 대결·갈등이 표면화되어 나타나지는 않는다.
    적어도 특정대학 출신 동문들을 중심으로 한 조선대(`47년 문예학부 개교, `81년 미술대학 회화과로 전환)니 전남대(`74년 사범대, `83년 예술대 미술학과 신설)니 하는 출신학교별 학파들이 화단내 중요 비중을 차지하게 되고, 아예 서구식 조형논리를 받아들이면서 개별적인 활동에 전념하는 청년작가들에 의해 전통화법이 크게 위협받는 `80년대 후반 이전까지는 화맥이나 계보가 화단활동의 기반을 제공해 왔다.

    그런 풍토에서 아무리 탁월한 기량과 예술성으로 당대를 주름잡고 기대를 한몸에 받았던 뛰어난 작가라 하더라도 화숙도 없이 후진양성 또한 변변치 못했을 때는 본인마저도 사후 화단에서 어느 사이 잊혀져 버리기 마련이다.
    허림이나 정운면 같은 예가 그 대표일 것이다. 또 한편으로는 천경자 조복순 김정현 등의 경우처럼 대개 채색화나 신감각 현대미술을 지향하는 작가들 대부분이 보다 자유롭고 활동 폭이 넓은 무대를 찾아 서울로 떠나면서 지역화단에는 결국 전통 남화계열의 수묵산수 쪽만 남게 되었다.

    아무튼 남도화단에서 현재 활동하고 있는 원로 중진 대부분은 의재의 [연진회](鍊眞會)' 아니면 남농의 [남화연구원](南畵硏究院)' 직계 또는 2대 제자들이다. 소치와 미산이라는 초기 호남화맥을 잇는 이들 양대 거목들이 서로의 뚜렷한 개성차를 보이고 그를 따르는 제자들의 전통산수에서도 운필용묵(運筆用墨)의 서로 다른 차이가 나타나면서 각각 두 화파를 형성하기에 이른 것이다.

    물론 서로 같은 뿌리인데다 두 스승 모두에게서 일정기간씩 화업을 닦은 경우들도 적지 않아 그림의 표현형식이 섞여있거나 계보를 나누는데 모호한 이들도 적지 않다.
    이 가운데 자연정신에 바탕을 두고 시적 정취와 예도(藝道)를 강조했던 '연진회' 출신들은 60여년 동안 남도회화 전통을 지켜온 주축이었다.

    구철우·허행면 등 1938년 1월 금동에서 화숙이 문을 열 당시의 초기 출신들은 대부분 유명을 달리하였고 호남동과 춘설헌에서 화업을 닦은 허의득(稚蓮) 이상재(綠雪)·김옥진(沃山)·오우선(禹溪)·문장호(希哉)·박행보(金峰) 등과 그 아래 세대인 조승현(松谷) 이강술(和亭) 양계남(月我) 장찬홍(溪山) 박소영(忍齋) 김춘(東雀) 등까지 스승의 남종화풍을 중심에 두고 정회원이 준회원을, 그 제자들이 다시 후배들을 지도하는 식으로 내림을 중시하며 계보를 형성시켜 왔다.

    이 연진회는 의재 작고 1년 전인 1976년 이범재를 회장으로 이미 화단의 비중 있는 중견들로 성장한 27명의 제자들이 뜻을 모아 모임을 재결성하게 되었다.
    그리고 한걸음 더 나아가 이들이 주축이 되어 2년 뒤 농업고등기술학교(三愛學院) 자리에 초급부와 전문부 주·야간 과정을 둔 연진미술원을 개설하기에 이르렀다.

    따라서 기본부터 일정단계까지 정규적인 전통화법의 수련과정을 주기적으로 운영함으로써 전업작가들의 양성 배출은 물론 수묵그림의 대중화 또는 취미화가들의 입문기구로서 호남 남종화의 주요 산실이 되었다.
    그리고 의재 제자인 희재 문장호(1938∼ )는 1965년 3월 [삼희화실](三希畵室)을 열고 수묵 남화를 지도하게 되는데, 김영수 김대양 서영숙 최영임 고영순 박호순 한상요 구영주 김숙 이준섭 손호근 등 그의 화실출신들이 [수묵회](樹墨會)를 결성하여 `71년 첫 창립전을 갖기에 이른다.

    이어 `77년 두번째 발표전 이후로는 매년 정기전을 열면서 서울(`82, 제7회전 때 세종문화회관 전시실) 전주(`84, 제9회, 전주예술회관) 등 타지로 나가 회원전을 개최하기도 하고, 김대원 김부장 박희석 윤복희 조영랑 홍성국 등 차세대 중심작가들을 배출하였다.
    스승 희재의 화풍은 전통 남종화의 소재나 포치, 강약과 농담을 살린 피마준을 주로 사용한 명철하면서도 덩어리감 있는 산수를 즐겨 그려왔다. 한편 사촌지간인 의재에게서 그림에 입문하고, 외가 쪽인 소전 손재형으로부터 서법을 다듬어 문인화 부문에서 두각을 나타낸 금봉 박행보(1935∼ )도 `70년대 후반부터 계림동 사랑채를 화숙으로 삼아 후진들을 지도하였다.

    이들 제자들이 `80년 [취림회](翠林會)를 만들고 훨씬 지나서이긴 하지만 `90년 첫 창립전을 가진 뒤부터는 매년 회원전을 열고 있다. 김근섭 김영삼 김재일 김정난 김용선 박태후 윤영동 이부재 이상태 조창현 한상운 허희남 허임석 황충기 등 대부분 전통과 신감각을 융화시킨 현대적 문인화를 추구하는 작가들이다.
    이들 의재의 화맥을 잇는 [연진회] 출신 중심의 원로에서 중견까지 작가들은 [연진미술원] 운영과 대학교육을 통해 지역미술계에서 의재계열 전통남화산수가 주도적 맥을 잇게 하는 역할을 맡아 왔다.

    하지만 [연진미술원] 출신과 개인화실 수료생들 가운데는 비교적 짧은 수업과정을 거친 뒤 공모전을 통해 화단에 입문하여 직업그림꾼이 되거나 그에 따라 틀에 박힌 전통산수나 사군자류로 오히려 남도화단을 경색시키는 요인이 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한편으로 의재 계열 가운데서도 `80년대 후반부터 전통산수에서 벗어난 개성이 담긴 현대 한국화를 모색하는 예들이 점차 늘어가고 있다. 금봉의 거친 종이질감 위에 단순 평면화시킨 채색산수화, 양계남의 전통문양을 각색한 섬세한 선묘의 채색화, 전통모필의 맛은 살리되 굵은 필치와 채묵으로 산수의 현장감을 적극 펼쳐 가는 김대원 등이 그 대표적 예에 속한다.

    목포의 남농 '남화연구원'에서도 문흥록(松農) 조방원(雅山) 신영복(稻村) 곽남배(白浦) 박항환(田丁) 하철경(林農) 등 문하생들이 배출되어 의재 계열과 또 다른 화파를 이루어 왔다.
    같은 남화전통이지만 남농과 의재의 차이에서 이미 언급하였듯이 이들 남농 제자들은 주로 거칠고 대담한 필묵과 채색으로 연진회 보다는 자유로운 개성표현을 강조해 온 탓에 모임으로서 뚜렷한 공동화풍은 두드러지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의재 계열에 비해 대개 근경을 위주로 하면서 안개나 구름 따위 여백효과가 적고 짙은 먹과 마른 붓질을 즐기면서 파필에 의한 소나무 처리와 대담한 채색의 곁들임 등에서 차이를 보여준다.

    이 가운데 조방원은 창작에 몰두하면서 틈틈이 제자들을 지도해 오다 `79년부터는 담양 무등산자락 지실마을 옆 주공리와 곡성 옥과에 화실을 열어 본격적으로 후진양성을 시작하였다.
    이를 통해 배출된 문하생들이 `87년 묵노회(墨奴會)라는 이름으로 첫 발표전을 갖는데, 박광식 윤의중 강석관 정재윤 오견규 조광섭 등 32명이 참여하였다.
    그리고 격년제에서 `90년부터는 연례행사로 발표전을 계속하면서 김광옥 김송근 조선 황종석 등 한 무리의 청년세대 작가군이 각자의 회화세계를 모색해 나가고 있다.

    또 남농의 직계인 신영복 곽남배 박항환 등 많은 제자들이 서울 등 외지로 나가 입지를 굳혀 활동하고 있고, 하철경은 대학강단에서 자신의 실경산수를 추구하고 있으며, 김형수(碩星) 이창주(梅汀)처럼 한 때 남농의 지도를 받았던 작가들까지 역시 만만치 않은 화맥을 이어가고 있다.

    그러나 심미적 정신성보다는 예술적 개성과 감성을 강조했던 남농의 회화세계에 비하면 오히려 그림의 형식마저도 단조로워진 후대의 그림들이 남화의 형식화를 더욱 부채질하는 요소가 되고 있기도 하다. 전통남화를 따르면서도 호남화단에서 독특한 회화세계를 펼치고 있는 예가 김형수(石星)인데 한때 남농에게 사사받은 적이 있긴 하지만 그 보다는 東岡 정운면의 유일한 제자이자 心汕 노수현(황해도 곡산생, 1899∼1978) 문하에서 상당기간 필묵을 익히기도 해 앞의 의재와 남농 두 계보와 다른 별도의 화맥으로 특색을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특별히 화숙을 둔다거나 체계적인 후학 지도도 없었고 특별한 모임을 이끌지도 않았기 때문에 노경상 박종석 등 몇몇을 빼고는 딱히 석성계보라 할 화파까지는 이루지 못하고 있다. 또 이 지역과 연고는 없지만 이당 김은호(인천생, 1892∼1979) 문하를 거친 몇몇 작가들이 또 하나의 화맥을 이루기도 한다. 이당은 일제시기부터 서울 三越(신세계)백화점에서 가진 [2인전](1932)을 비롯 의재와 몇 차례의 전시를 함께 가졌을 뿐 아니라, 1936년 조선미술원 개설 때와 연진회 발족 때 찬조회원으로 참여하는 등 상당한 친분관계를 맺어 왔었다.

    그의 화풍을 따르는 후소회(後素會) 중심 제자들 가운데 이 지역과 직·간접적 연고를 가진 작가들로 1936년 제1회 회원전 때부터 참여한 장덕(본명 운봉, 翠堂)을 비롯 김한영(玄堂) 안동숙(吾堂) 배정례(淑堂) 등이 그에 속한다. 이 지역 몇 안 되는 채색화 쪽의 작가들은 취당이나 숙당처럼 결혼을 계기로 목포와 해남으로 내려와 이 지역에 정착하게 되었거나, 반대로 오당 안동숙(1922∼ , 구례)처럼 활동지를 서울로 옮긴 뒤 고향화단과 관계가 끊기거나 천경자의 경우처럼 동경여자미술전문학교 유학을 다녀온 뒤 독특한 채색화의 세계를 펼친 작가들처럼 특정 화파에 들지 않는 예도 있다.

    또 조복순(1921∼81)은 어려서 의재로부터 화업을 익혔지만 `60년대부터 홍익대 교수로 올라간 뒤 사생묵화로 전환하기도 하였다. 그와 더불어 조복순 문장호 박행보 김형수 등과 같이 잠시 대학에 출강하거나 재직한 경우, 아니면 매정 이창주(1932∼ )처럼 오랜 동안 강단에 몸담게된 작가들의 경우는 전통 무릎전수에 서구식 교육방식을 결합한 대학 수업과정으로 후진을 양성하게 된다.
    그러나 사제간의 개별적이고 인간사적 접촉이 많은 전통교습법에 비해 교과과정에 맞춰 가는 형식체계상 근본적인 결집력은 약한 만큼 이들 학연중심의 모임이 만들어진 것은 대개 `80년대 중반이 지나서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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