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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남남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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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대변화 속에서 청년화단과 전통남화


    전통의 계승과 변화하는 시대문화의 충돌

    소치이래 남농과 의재, 그리고 그 제자세대들로 이어지는 계보와 큰 화맥을 따르며 사자전승관계를 이어 온 겉늙은 청년 동양화가들의 작업과, 그런 빛 바랜 전통산수의 답습으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현실소재와 수묵채색의 회화형식을 찾고자 하는 수묵화운동이 맞부딪히게 된 것은 `80년대 과도기 상황의 가장 두드러진 현상으로 거론될 수 있다.

    기존의 화재와 화면형식, 필묵운용, 특히 단순한 소재중심의 잘못된 '전통' 개념에 따른 과거양식의 답습이 현실주의니 참여미술이니 포스트모더니즘이니 하는 거센 외풍을 만나면서 새로운 돌파구를 찾아야 할 현안으로 고민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80년대 중반이후 서울화단의 채묵화 바람이나 서구 조형형식을 도입한 신감각 채색화풍들이 지역의 대학 실기실에도 파고들면서 새로운 기류가 형성되기 시작한 것이다.

    원래 현대미술의 새로운 기운은 대학 실기실에서 금새 나타난다.
    그것은 일정한 화맥으로 이어온 화숙중심의 도제식 사사보다는 접하는 정보나 자료들이 훨씬 넓고 형식과 의식면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대학가의 특성 때문이다.
    물론 지역화단 풍토와 적지 않은 연관을 맺게되는 지방대학의 특성상 일종의 지방양식 아카데미즘으로 굳어진 경우들도 없지는 않다.

    전통남화로 이미 화단 내 지명도를 높인 선배 중진작가들이 지역의 대학강단에 서기 시작한 것이 `70년대 후반부터다. 조방원(`77년∼, 전남대 미술교육과) 김형수(대건신학대) 박행보(`78∼, 조선대 미술교육과) 문장호(`80∼, 전남대 미술교육과) 이창주(조선대 미술교육과) 등이 그 예다.

    이들은 대개 남화전통의 계승을 중히 여기고 그에 따른 운필용묵의 기초와 정신성을 기르는데 역점을 두었으며 사군자와 남화기초를 지도하여 [전남도전]을 비롯한 공모전에 입상 등단케 하는 등 수업기 청년세대에 직간접적으로 남화전통을 이어주는 가교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워낙 강렬한 시대변동에 휩싸이게 된 자연과 수묵중심 남도화단에서 순수예술과 조형감각중심의 채색화 또는 채묵화들이 소개되고 강단에 이를 지도하는 외지출신 교수들(전남대 예술대학의 송계일, 윤애근 등)이 들어오면서 기존 토착화단과 보이지 않는 갈등이 일기도 했다.

    또 양계남 김대원 등은 의재나 희재로부터 전통남화를 익혔음에도 전혀 새롭게 독자 양식을 모색해 감으로써 자연 학생들에게도 한국화에 대한 새로운 흥미와 가능성을 열어주는 선례가 되기도 하였다.

    또 하철경 노경상 김재일 등의 경우처럼 이미 사숙을 통해 전통남화를 익히고 공모전이나 발표전을 통해 등단한 경력자들임에도 만학도로 다시 대학수업과정을 밟는 경우도 `80년대 이후의 달라진 현상이다.
    그 만큼 개인적인 사승관계를 대신하여 체계적 교육과정으로서 대학이 화가 입문에 통과처로 자리하게 되었다는 것이며, 실제 대학에서 필묵의 기초를 닦아 한국화가로 업을 삼게 되는 예들도 늘어가고 있다.

    이렇듯 크게 늘어난 대학출신 젊은 작가들을 중심으로 비슷한 연배 또는 작업성향의 작가들끼리 새로운 모임을 만들면서 보다 다양한 조형방식의 모색이 이어지는데, 각 대학별 학파 성격을 띠는 교수와 학생 중심의 동문중심 학연모임들이 등장하게 된다.

    가령 전남대학교 예술대학 미술학과 출신들의 [경묵회](耕墨會, `85년)와 조선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 동문들의 [선묵회](鮮墨會, `88년) 등이 그 예다. 이들 모임은 지도교수의 화풍에 따라 특정 성향을 보이기도 하지만 이름 그대로 학파라 부르기에는 학구적 탐구나 회화성의 체계적 모색에는 미치지 못하여 동문친목 모임에 머무르고 있는 편이다.

    아울러 조선대 대학원생 중심의 [백악원전]이나 전남대 동문들의 [먹풀이-채묵의 신형상전] 같은 수많은 청년미술전들이 명멸을 거듭하고 있다. 이들과 달리 출신학교에 상관없이 한국화 청년작가들 모임으로 발족한 [창묵회](蒼墨會, `88년 창립)의 경우는 관념산수와 수묵작업이 강세를 보여온 지역화단에서 가장 한국적이면서도 현대적인 미의 세계를 공동모색하자는데 뜻을 두고 출발하였다.

    위성만 김광옥 김송근 등 10여명이 창립한 이 모임은 형식화된 전통이나 구습, 학연·계파 따위 예술외적 소모적인 경쟁과 반목 불신으로 예술적 창작력을 소진하기 보다 변화하는 문화환경에 맞춰 한국화의 새로운 활로를 모색하면서 청년세대로서 적극적인 활동을 북돋워 나가고 있다.



    현실주의 수묵화와 채묵의 신형상성

    창작활동의 기본배경이자 대상이기도 한 문화현상의 다변화는 지역 미술계에 새로운 풍향변화를 일으키게 되었다.
    그 동안 지역 고유양식처럼 굳어져 왔던 전통 수묵남화의 틀로부터 벗어나 자기시대에 충실하면서 각자의 개별성을 세우려는 집단활동이나 개성의 발휘, 나아가 크고 작은 모임과 활동들을 만들어 내었다.

    대개 `80년대 중반을 넘어서면서 당시 20대 말에서 30대 젊은 작가들을 중심으로 전통산수와 현실주의 사실화, 수묵화와 채묵화, 실경사생과 추상성이 강한 화면운용 등이 함께 공존하면서 장르와 양식과 이념상의 여러 면에 걸쳐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었다.

    먼저 청년세대로서 시대의식과 사회참여를 지향하는 현실주의 사실화를 들 수 있다. 당대 현실이나 세상사와는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었던 전통 남종화와는 전혀 다른 성격의 이들 활동은 `80년대 일련의 정치 사회적 격변기 속에서 청년의 소임에 대한 자각과 뜻을 함께 하고자 한 것이었다.

    이를테면 `80년대 초부터 대두된 민족민중미술운동 현장에 참여하기 시작한 것인데 그 동안의 전통적 남화입장에서 보면 자연과 예도 중심의 기성문화와는 판이하게 다른 사회적 현실참여 활동인 셈이었다.

    이들 대부분은 `88년 발족된 [광주전남미술인공동체](약칭 광미공)의 회화2분과로 힘을 결집하게 되는데 이듬해부터 매년 역사의 현장에서 거리전으로 여는 [오월전]을 비롯하여 [광주수묵미술인회전] 같은 별도의 분과 발표전을 통해 미술의 사회적 책무를 실천하고자 힘을 쏟고 있다.

    이들 대부분은 시사성이 강한 현실소재를 취하여 주관적 감흥이나 붓질의 기교를 최대한 줄이고 대신 먹의 농담에 의한 입체적 명암효과를 살리는 말끔한 수묵화들로 공통점을 보인다.
    채색을 기피하고 배경이나 여백에 선염과 필묵의 효과를 일부 곁들이는가 하면 사실적인 묘사이면서도 상징성을 함축하는 화면구성 등에서 특징을 보인다.

    이들 가운데 김경주 김진수는 이미 `80년대 중반기부터 현실비판과 역사기록 성격의 목판화작업들을 펼쳐오던 활동에 이어 시대적 발언이 담긴 말끔한 수묵화로 중심을 옮긴 경우들이다.
    또 하성흡 허달용은 진경산수나 풍속화 같은 전통회화의 일부 요소들을 적극 접목하며 새로운 사실주의 회화를 모색하고 있고, 대체로 객관적 사실성에 충실코자 하는 동료들에 비해 독자적인 회화성을 강조하는 박문종은 거칠고 뭉툭한 필묵효과로 남도의 흙과 같은 농투사니의 질박한 시대정서를 담아내고 있다.

    더불어 시각매체연구회 활동에 이어 `91년 재결성한 [광주민족민중미술운동연합](연합 광미연) 쪽에 참여한 홍성민의 경우는 대담한 농묵과 직필들을 위주로 민중의 잠재된 주체 의지를 형상화시켜내기도 한다.

    이러한 청년작가들의 수묵사실화 작업은 오월 광주민중항쟁의 정신계승이라는 시민사회의 인정에도 불구하고 사회주의적 이념성에 대한 경계심, 예술의 수단화에 대한 거부감, 그리고 이미 낯익은 전통회화와는 전혀 이질적인 성향에 대한 반감 등이 복합되어 전폭적인 공감대를 이끌어 내지는 못하였다.
    하지만 난세 때마다 필묵으로 역사와 대의를 지키고자 했던 선대부터의 의향의 맥을 잇는 작업으로서 의미가 깊다 하겠다.

    초기에는 선동선전성을 기본으로 사회적 복무에 비중을 두기도 하였지만 `90년대 중반 이후 점차 각자의 개성이 발휘되면서 회화성을 높인 독자적인 먹작업에서 설치형식에 이르기까지 여러 표현형식들을 탐구하고 있기도 하다.
    이와는 달리 동·서양화 구분을 떠나 단지 화폭 위의 색다른 변주를 통한 회화성의 확대를 추구하는 일단의 작업들이 확산되어 간다.

    특히 회화형식상의 두드러진 변화로 `80년대 후반부터 일기 시작해 `90년대 들면서 더 늘어난 신표현주의 또는 비정형추상 계열의 작업들이 청년미술계의 또 다른 축을 이루고 있다.
    그 배경에는 `80년대 중반부터 강력한 시각효과로 대사회적 역할을 다하고 있던 민족민중미술운동에 대한 대응형식처럼 순수예술론자들을 중심으로 받아들여진 포스트-모던 형식의 해체·이탈·개별성들과 일정한 연관을 갖는 현상이다.

    대부분 20후반∼30대 초반 작가들을 중심으로 활발히 펼쳐진 이러한 표현성과 조형형식의 강조는 한국화 쪽의 '채묵의 변용과 가능성'으로도 나타나 활달하고 대범한 전통 선묘의 복원과 선염·발림효과 아니면 진채의 시각효과들을 최대한 살린 공간운용들이 부쩍 늘어간다.

    뿐만 아니라 기존의 화구들만이 아닌 천연안료와 재료들을 적극 활용하여 화면질감과 공간처리를 새롭게 시도해낸 작품들이 많다. 말하자면 동서 회화의 접목과도 같이 한지와 먹과 채색을 이용하고 여백을 운용하되 굵은 붓질들을 겹치거나 번지고 뿌리고 흘리는 등의 과감한 표현흔적들로 화면을 채우는 공간조형성의 강조라는 점에서 하나의 시대양식을 만들며 이전의 전통회화와 큰 차이를 보인다.

    예술의 사회성보다는 순수 자율성을 강조하는 이들은 대개 `87년 발족한 [광주청년미술작가회]를 거점 삼아 모아지는데 김세중 임정기 장현우 등의 초기활동에 이어 장진원 주재현 장복수 등이 합류하게 된다.

    이들이 지향하는 창작풍토와는 지역 문화환경 자체가 워낙 거리가 먼 것이 현실인 만큼 대개 개인적으로 중앙화단과의 교류나 자료접촉, 별도의 수업 등을 통해 스스로 길을 열어 나갈 수밖에 없었다.
    자연형상의 탈피 변형과 자유로운 화면공간 운용과 표현형식 탐구, 과감한 필묵이나 채색사용 등 각자의 자유롭고 창의적인 작품활동을 추구하며 정례모임과 발표전을 계속해오고 있다.

    이런 현상은 지역의 특성 있는 문화예술 육성 계발을 명분으로 `90년부터 시작된 [한국화특장대전]을 비롯해서 여전히 시대착오적 관전형식을 답습하고 있는 [전남도전]과 `80년대 중반이후 신설된 [전국무등미술대전]·[광주시전] 등의 출품작들에서까지 나타날 정도로 일반화되어 간다.

    물론 여전히 사군자나 전통관념산수·인물화의 형식을 답습하는 부류들이 적지 않지만 대개 일정한 틀이 유지되는 이러한 공모전에서조차 소재나 화법상의 변화가 점차 더 뚜렷하게 드러날 만큼 문화풍토나 회화감각들이 바뀌어 가고 있는 것이다.

    전반적으로 `80년대 이후의 청년세대 미술활동은 형식과 예술개념·작가의식 면에서 전통남화 중심의 틀이 무너지고 동·서양화의 구분마저도 흐려지면서 '회화'에 대한 인식자체가 크게 변화하는 과도기를 지나 온 셈이다.

    그러나 문화적 배경과 일반의 심미 취향이 크게 달라진 시대환경 속에서 단지 전통이라는 허울만으로 호남남화가 온전한 뿌리를 지탱할 수 있을 것인지, 이제 지난 시대의 문화유산이거나 틀 속의 전통쯤으로 단지 그 껍데기만이 답습될 수도 없는 상황이다. 본래의 뿌리를 바탕으로 시대와 이웃과 함께 하면서 예술적 생명력을 새롭게 꽃피워내야 하는 공동의 과제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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