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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남남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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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문화 신미술 속의 근대 남화


    근대적 과도기의 전통과 현대

    남농과 의재의 활동기 전반부에 해당하는 시기에 한국화단은 몇 갈래 화맥으로 흐름이 나뉘어지고 있었다. 크게 보아 정통파와 신감각파 또는 절충파, 전통수묵담채화와 채색화, 국내 전수파와 일본 유학파, 사실화법과 정신주의 등이 뒤섞인 복잡다양한 모습이다. 이들 가운데 하나의 맥을 잇고 있던 남화는 문기 높은 옛 자취를 좇으며 그 정신과 시적 정취를 닮으려 하고(寫意性), 그에 따라 수묵담채의 간결하고 촉촉한 필치와 여백의 깊이로 자연대상과의 감성적 교감을 모색하는 산수나 문인화 화제를 다루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것은 신문물의 유입 속에서도 옛 왕조시대의 형식을 고스란히 이어받고 있던 남화가 남쪽이라는 지리적 개념과 함께 주로 보수적이고 전통성이 강한 호남지역 문화풍토를 배경으로 남도화단에 터를 다져가고 있었다.

    물론 일찍이 중국 상해에서 망명생활 당시 오창석ㆍ포작영 등 중국 문인화가들과 사귄 바 있고, 정갈한 필법에 운치 있는 묵죽 묵란 서법을 즐겼던 조선말 민영익(閔泳翊)이나, 한때 항일운동에 가담하기도 하면서 꼿꼿한 지조를 묵죽도로 담아내던 김진우(金振宇)에게서 문인화의 정신성을 일부 연결시킬 수 있지만 남화전통이라 보기는 어렵다. 또 왕조시대로부터 근대화단까지 과도기 인물인 조석진(趙錫晋) 안중식(安中植), 그리고 그들에게서 배출된 많은 작가들에게서도 남종문인화의 자취가 나타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옛 화본에 기본 틀을 둔- 단지 화제로서의 산수화와 문인화 형식에 머물러 있는 정도고, 당시의 향토적 사실주의와 같은 유혀의 일반 산수화, 또는 신미술이랍시고 일본화의 감각적 표현요소를 뒤쫓는 그림들이 흔한 때였다.

    경성을 중심으로 늘어가는 서화가들의 모임이나 후진강습소, 이를 중심으로 일정한 화파와 세력권을 이루어 가는 원로 중진이나 배출된 후학들의 작품에서도 딱히 남화전승에 대한 애착이나 관심사를 찾아보기 어렵다. 가령 1911년 윤영기 이완용 등이 주도하여 첫 근대식 미술교육기관으로 문을 연 [서화미술회](~1919)에서 서과와 화과를 두고 문인화 지도를 하였으며, 해강 김규진(金圭鎭)이 1915년에 세운 [서화연구회]에서 서과와 문인화를 두어 후진을 길러낸 것, 1918년 조석진ㆍ안중식 등이 발족시킨 조선 [서화협회], 1940년 조선총독부 지원으로 한ㆍ일 작가들이 창립한 [문인서화연구회] 등이 있지만 대부분 남화의 전승이나 교습과는 거리가 먼 것들이었다. 과거의 도제식 사자전수(師資傳受)에서 서구식 교육방식을 받아들인 화숙이나 강습모임을 통해 신진작가들이 크게 늘어나면서도 청년세대의 신문화 신감각 선호추세에 비추어 상대적으로 고루하고 산뜻하지도 않은 남화는 묵은 유산쯤으로 외면되지 않았나 싶다.



    근대기 중국과 일본의 남화

    사실 남화는 그 발원지인 중국에서도 ‘옛 선인의 정신을 배우기 보다 그 자취를 더듬는’ 관념적 사의성의 답습으로 자연 본래의 생기를 잃고 단지 형식에 얽매임으로써 개성과 독창성을 앞세운 신감각파들에게 점차 밀려나고 있었다. 이 시기 신해혁명(1911)을 전후하여 상해를 중심으로 펼쳐진 ‘해파(海派)’의 활동이 주목된다. 전통을 개성 있는 화법으로 풀어낸 조지겸(趙之謙)과, 재치 있는 포착과 산뜻한 채색에 구륵몰골의 사의화를 펼쳐낸 임이(伯年), 형사를 뛰어넘는 운치와 서권기를 담아낸 오창석(吳昌碩) 등이 그 선도자들이다. 그러나 이들도 시ㆍ서ㆍ화 일체의 문인화와 명ㆍ청대 이래 ‘대사의수묵화(大寫意水墨畵)’ 전통을 따르면서도 전통과 신감각을 곁들인 새로운 근대회화를 지향함으로써 전통남화의 형식적 틀에 갇혀 있지는 않았다.

    또 신미술교육에 대한 관심이 높아가면서 단지 옛 것을 모방하거나 껍떼기 사실묘사만을 고집하는 태도를 배격하고 서양의 사실화법 등 새로운 미술교육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주장들이 퍼져가기도 하였다. 실제로 1910년대에 대도시 중심으로 중서미술학교ㆍ상해도서미술원ㆍ북경미술전과학교 같은 근대식 사립미술학교와, 청 말기부터 1930년대까지 서비홍 임풍면 오작인 등 일본과 프랑스 유학생들의 귀국 후 미술교육과 작품활동은 근대적 미술풍토 변화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그리고 남종문인화 전통을 새로운 시대감각으로 풀어낸 제백석(齊白石)은 시문과 서법을 바탕으로 문기어린 필묵을 구사하면서도 담대호방한 채묵화 세계를 펼쳐냈으며, 시서화를 고루 갖춘 황빈홍(黃賓虹)도 다양한 필묵법으로 중국화의 현대적 변모를 함께 이끌었던
    예다.

    일본에서도 교토(京都)를 중심으로 한 [일본남화협회](日本南畵協會, 1896년 창립)가 근대 남화의 거점역할을 맡고 있었다. 당시 신미술이라는 이름으로 확산된 양풍이나 짙고 섬세한 장식풍의 일본화에 맞서 전통남화의 맥을 지키며 수묵위주의 시정 어린 운치와 문기를 담아내는데 중점을 두었다. 그 창립자인 도미오카 뎃싸이(富岡鐵齋)는 경도미술학교(京都美術學校) 교수로 유가와 도가사상 등 폭넓은 학식을 바탕으로 자연사물의 외적 형상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필묵과 호방한 수묵화 세계를 펼쳐갔다.

    한편 江戶출신으로 동경미술학교 교수를 거쳐 일본미술원을 창립하고 사의성을 지닌 수묵담채화를 펼쳐나간 하시모토 가오(橋本雅邦), 愛知縣 출신이며 수야파(狩野派)의 전통을 바탕으로 감미롭고 시정 어린 몽롱체 산수화를 이룩한 가와이 교쿠토(川合玉堂), 群馬縣 출신으로 동경에서 [문부성미술전람회(약칭 문전)]을 무대로 남종수묵화가로 활동한 고무로 스이운(小室翠雲), 大阪 출신으로 서양 고전양식과 동양전래의 문인화 남종화들을 결합한 무라카이 카가쿠(村上華岳) 등이 있다. 이와 함께 당시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한 일본작가들의 일부 수묵산수화에서도 일본풍의 남화전통을 연결 지어 볼 수 있지만 그러나 일본에서도 정통 남화의 맥은 전반적으로 퇴조하는 흐름을 보이고 있었다.



    시대변화 속의 신감각 근대 남화

    의재ㆍ남농의 큰 그늘이 드리워진 일제시기부터 해방을 전후한 시기에 꾸준한 정진으로 이름을 얻은 이들이 더러 있다. 이 가운데 의재의 넷째 아우인 목재 허행면(木齋 許行冕, 1906~1966)은 그림에만 전념했던 형과 달리 광주학생의거 연루, 일본 체류, 공직생활, 광산업과 화선지 공장운영 등 세상사를 두루 거쳤던 인물이다. 미산 허형으로부터 전통 남화의 기초를 닦았고, 1938년에 의재가 [연진회]를 만들 때 정회원으로 참여하여 이후 화업에 열심히 매진하면서 일가를 이루었다. 의재에 비해 부드러우면서도 섬세하고 정갈한 필먹의 운용과 운무나 수면공간 등 공간미가 돋보이며, 실경사생의 현장감흥을 담아내는데 뛰어나다. 크게 보아 의재 화풍의 잔영이 남아있으면서도 붓질이 훨씬 생기 있고 분명하며 공간운용이 널찍하고 농담이 또렷한 필묵 위에 담채를 올리는 등 화사함과 청명함을 더하지만 오히려 이런 요소들 때문에 의재처럼 그윽한 문기를 우려내는데는 미치지 못하고 있다. 춘헌 허규ㆍ희재 문장호ㆍ녹설 이상재 등이 그의 문하를 거쳤다.

    목재와 동갑이면서 독특한 회화세계를 펼쳤던 동강 정운면(東岡 鄭雲面, 1906~48)은 짧은 작품활동으로 끝나버렸지만 단연 개성 있는 신화풍이 돋보이는 예다. 송강 정철의 12세손인 20대 초반이던 1926년부터 4년간 광주에 머무르게 된 소정 변관식(小亭 卞寬植)으로부터 화업을 닦았다. 따라서 소정의 회화처럼 구도나 묵법이 굵고 대담한 시도들이 많고 특히 실사를 중심으로 하되 화가의 주관적 감흥을 위주로 한 강한 먹과 화면 가득 차 보이는 포치에서 그 영향이 드러나 보인다. 거기에 [문전] 자료들을 통해 일본 남화풍을 접목하다가 점차 마르고 성글면서도 부드럽게 차 보이는 독자적인 화법을 세움으로써 전통 남도화단과는 다른 길을 걷고 있었다. 초기의 굵고 대담한 묵법과 부벽준들에서 점차 신미술에 대한 관심과 개성화법으로 선회하게 된다. 무게를 갖는 경물마다 거칠게 스쳐 그린 듯한 필치들로 스산한 분위기를 만들고 무디고 둥근 산봉우리와 잎이 떨어진 나뭇가지들로 화면 중심부를 채우고 있다.

    또 `40년대 들어 일본 [문전] 풍을 받아들인 흔적이 두드러지는데 특히 1942년 일본 [문전] 입선과 같은 해 광주 상업은행 전시실에서 가진 첫 개인전 때의 작품 대부분이 문전풍이었다 하며, 이듬 해에는 직접 일본에 건너가 고무로 스이운(小室翠雲)을 만나는 등 일본 화단을 둘러보고 오기도 했다. 당시 지역화단에서는 그의 색다른 신감각 그림들을 '동강바람'이라 하였는데 해방 후 훨씬 간결하고 부드러우면서도 힘이 있는 동강화풍을 펼쳐 가면서 1948년 서울전시를 준비하다 43세의 젊은 나이에 복막염으로 돌연 사망하고 말았다. 그에게서 연진회 출입 당시 정소산과 허정두 등이 그림을 배웠지만 그들마저 일찍 요절해 버렸고, 누문동 화실에서 당시 서중학교 학생이었던 석성 김형수가 잠시 그림지도를 받은 것 외에는 특별히 후학조차 남기지 못하였다.

    한편, 남농의 막내 아우인 임인 허림(林人 許林, 1920~44) 또한 독자적인 회화세계를 추구했던 예다. 허씨 가계나 당시 화단풍토에서는 마치 이단아 같은 존재로 재기발랄한 사생화와 신감각의 문전화풍을 유입시킨 장본인이었지만 25세로 요절함으로써 화단에 뚜렷한 영향을 남기지는 못하였다. 어린 시절 진도를 떠나 목포에서 학업과 함께 신문물을 접하면서 타고난 재기를 드러내 보이던 그는 일본유학을 통해 얻은 세상에 대한 개안으로 관념적 자연관조와 전통추수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회화세계를 열어 가고자 하였다. 그는 의재의 그림이 ‘너무 중국냄새가 짙고 고답적이며 한눈에 미감을 주기보다 독화(讀畵)를 강조한다’고 비판하며 일본의 신 남화풍을 받아들여 돌파구를 찾고자 하였다. 붓을 옆으로 길게 쓸어 가는 피마준과 여러 번 덧쌓은 갈필효과로 황량하리 만큼 거칠고 건조한 분위기를 자아내어 가법전승과는 거리가 멀어지고 있다. 특히 1940년 일본 근대미술의 산실로 평가받던 가와바다 화학교(川端畵學校)에 다니면서부터 아예 호남 전통남화와는 무관한 신흥화풍을 익히게 된다. 이를테면 주변 생활소재들을 서양화 형식의 구도와 스케치풍으로 묘사하면서 일본화의 채색을 과감히 올리는 작업을 많이 하였다. 이어 1943~4년에는 두 차례 연속 [문전]에 입선하는 등 동강과 더불어 답보상태에 빠진 호남남화를 새롭게 열어 나갈 수 있을 것으로 기대를 모으며 짧은 기간이나마 지역화단에 신선한 자극이 되기도 하였다.

    또 일찍이 의재와 남농문하에서 화업을 닦고 임인의 회화를 통해 신감각에 눈을 떴던 소송 김정현(小松 金正炫, 1915~76)도 현장성을 살린 사생풍의 수묵담채 실경화들로 독자적인 회화세계를 이루었다. 영암출신인 그는 `43년부터 일본 가와바다에서 새로운 회화세계를 익히고 돌아와 해방 후 목포에서 교직과 화업을 병행하다 `50년대 중반에 활동기반을 서울로 옮겼다. 가지가 부러진 듯 강건한 수지법과 활달한 필치, 무엇보다 실재 대상의 현장감을 강조하는 화풍에서 남농과 임인의 영향을 내비치기도 한다. 속사화 형식으로 그린 풍속도, 여섯폭 병풍의 신농경도 <수확>(1954), 이외에도 가로수길을 들녁 배경과 함께 평원산수화로 포치해 낸 풍경화 등 간결한 필묵운용을 통해 전통과는 또 다른 자기세계를 구축코자 하였다.
    또 화순출신으로 의재에게 사사를 받고 연진회 창립회원이 되었다가 마지막 [선전]에 입선도 하고 일본 미술학교 유학으로 채색화를 익히고 돌아와 한때 광주사범 미술교사를 거쳐 서울로 옮겨간 소향 조복순(素鄕 曺福淳, 1921~81)과, 역시 채색과 사실묘법들이면서 대개 이당 김은호의 제자들이었던 취당 장덕(翠堂 張德, 1910~76), 호당 신방우(浩堂 申芳雨, 1912~73), 현당 김한영(玄堂 金漢永, 1914~88) 등도 이 시기 지역 전통화풍과는 달리 또 다른 가지를 뻗어나간 예들이다.

    대개 일제 후반기인 1930년대 말부터 `50년대 무렵까지 남도의 근대화단은 문기와 시적 감흥의 사의성을 중시하는 호남남화의 전통이 확고하게 정립되는 시기이다. 이와 함께 한편으로는 새로운 시대적 변화를 모색하는- 특히 1940년대를 중심으로 새롭게 등장한 신감각 실경사생과 개성화풍들이 두드러지는 때이기도 하다. 과거 중국의 남종문인화 전통과 그 화적에 뿌리를 둔 전통 남화와 그로부터 벗어나려는 신감각 신화풍이 양축을 이루는 현상이 짧게나마 공존하던 때라 하겠다. 아무튼 본래의 문기와 자연관조를 통한 시정, 그에 따른 그림의 운치 등이 새로워져 가는 시대조류에 따라 변화를 거듭하며 대상수용의 관점과 표현형식에서 실질적인 한국 현대 남화를 이끌어가는데는 실패하고 만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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