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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도조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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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창기 청년조각가들의 등단


    [도전]의 창설과 초기 동향

    지역 조각계에서도 초창기 신진작가들의 주 등단무대는 「도전」이었다. 1965년 가을, 제46회 전국체육대회와 함께 치러질 전라남도 상공회의소 주최 「산업박람회」를 기념하여 특별행사로 추진되던 「미술전시회」를 도에서 뒷받침하는 공모전으로 바꿔보자는 오지호의 제안이 받아들여져 같은 해 10월 박람회 기간에 맞춰 첫 회를 치르게 된 것이다. 물론 기본 체제와 운영방식은 일제시대의 [조선미술전람회(鮮展)]와, 해방 후 이를 표본 삼아 개설된 [대한민국미술전람회(國展)]를 따른 것으로 그 지방축소판과도 같은 것이었다.

    도 단위 공모전으로는 전국에서 처음으로, 그 주최도 「국전」의 문교부처럼 전라남도 교육위원회가 주최하여 광주공원에 있던 시립미술관에서 첫 전람회(1965. 10.5~11.4)가 열렸다. 동양화ㆍ서양화ㆍ조각ㆍ공예ㆍ서예ㆍ건축ㆍ사진 등 7개 부문 128점의 입상작 가운데 조각분야는 특선작인 조선대 교수 조제현의 <강변 스케치>와 신진작가 오진아(吳珍我)의 <정사(靜思)> 외에 입선 2점을 포함하여 총 4점이 전부였다. 조각부문 심사위원은 김영중이 초빙되었는데, 그는 `79년까지 15회 동안 심사를(`77제외) 도맡다시피 하면서 「도전」 조각부문에서 절대적 입지를 갖게 되었다.

    심사위원장 오지호는 당시 전남일보(1965.10.15, 10.20)에 실린 심사평을 통해 ‘짧은 준비기간과 협소한 전시공간이 우려되었으나 지역 미술인들의 정열과 높은 관심으로 예상 밖의 많은 작품들이 출품되었다’고 그 출범과 가능성에 만족하면서도 ‘제3부 조각은 작가의 부족보다도 시간의 부족 때문에 그 수나 질에 있어 별로 말할 것이 없고 다음 기회를 기대할 수밖에’ 없다고 하였다.

    아주 적은 수로 시작하였지만 미술계를 고무시키는 새로운 전기였음에 틀림없는 [도전]에서 2회 때 조각은 모두 7점이 입상되었다. 특히 최고상에 조각분야인 조선대 교수 조제현의 <욕후(浴後)>가 선정되고, 명창준(明昌俊)의 <작품>이 수석특선, 그리고 나머지 입선 5점이다. 이 때 조제현의 작품은 석고를 재료로 매끄러운 질감에 주관적 변형이나 과장 왜곡 없이 좌대에 걸터앉아 두 팔을 머리위로 들어올린 여성나부좌상(女性裸婦座像) 이었다. 과도한 표현성이나 노출을 삼가 하고 대상의 정확한 관찰 묘사를 우선하는 자연미와 예술미의 고전으로서 여성 인체미의 탐구는 점차 남도조각의 보편양식으로 자리잡게 되지만 [도전] 초기에만 해도 제작기술이나 재료, 모델을 구하는 문제들 때문에 아직 전신 여체상이 흔치는 않았다.

    그리고 이해 조선대학교 미술과를 졸업한 명창준(明昌俊, 1940~ )의 <작품>은 고대 금관을 소재로 부활의 의미를 추상화시킨 독특한 소재와 표현형식의 철조 작품이었다. 첫 해 특선에 이어 제4회까지 추상조각으로 연속 입선한 그는 이미 광주사범대학 재학시절부터 현대적 조형형식에 관심이 많아 비구상미술을 탐구해 오던 터였다. `64년 최종섭ㆍ박상섭과 [비구상 3인전]을 갖고 같은 해 연말 남도 추상미술의 첫 모임이자 이후 그 중심 거점이 된 [현대작가 에뽀끄(Epoque)]의 창립회원으로 참여하여 제 1회전(1964.12.30~`65.1.5, YMCA화랑)부터 `70년 7회전 후 탈퇴하기까지 10여 년 동안 여러 실험적 소재와 형식의 비구상 조형작업을 계속하였다. 「도전」 수상작도 이 무렵의 ‘생명’을 주제로 한 조형작업들 가운데 하나로 고물상에서 수집한 폐고철들을 이용한 비정형 추상작품이었다. 당시 지역에서 신표현 양식을 접할 수 있는 통로가 그렇듯이 명창준도 미국 공보원 자료실과 시내 헌 책방에서 구한『News Week』,『Time』등에 실린 화보를 참조하며 새로운 조형세계를 시도해본 것이었다. 「에포크」 창립전에 홍익대 출신인 이세정의 작품도 철판을 두드리고 용접하여 비정형으로 구성해낸 철조였다.

    명창준의 예와 마찬가지로 초기 [도전]에서 서양화와 조각부문을 함께 출품하는 경우들이 많았다. 제2회 때 최영훈, 제3회 때 김종표 박복규, 제3,4회 오순덕, 제4회 임승택 신정근 등이 이 경우로 아직 전공과목이 확실하게 나누어지지 않은 당시 조선대학교나 광주사범대학 등 지역 대학들의 교과과정 때문이기도 하지만 여러 분야의 기초를 두루 익히면서도 특히 두 분야가 같이 서구미술을 모본으로 삼고 있어 비교적 가깝다는데서 비롯된 초기 현상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아직 불모지나 다름없고 뚜렷한 전공자들도 없던 도입단계에서 새로운 매체에 대한 호기심과 관심들도 적지 않게 작용한 것으로도 보인다.

    아울러 [제5회 도전]까지 습작에 가까운 두상 석고상들이 자주 등장하는데, 이 또한 초기에 두드러진 특성 가운데 하나다. [제4회 도전](`68)에서 수석특선한 손연자(孫姸子)의 도 그 한 예로서 1회 때 <자각상(自刻像)>부터 매회 입선을 거듭하다 [제4회]에 조각부문 최고영예를 안게 된 것이다. 당시 사정이 골격과 근육 등 인체이해에 필수적인 해부학 수업이나 전신 누드작업들이 이루어지지 못하던 때라 같은 과 학생을 모델 삼아 떠낸 흉상이다. 석고면의 거친 질감처리와 음영효과가 강조된 작품인데 이 초기에는 주관과 개성, 예술적 창의성과 시대감각에 맞는 조형성을 발휘한 작품보다는 조각의 기본을 익히며 객관대상을 충실하게 탐구하는 학습의 연장선에서 제작된 작품들이 일반적이었다.



    목조로 일가를 이룬 양두환

    전공자가 귀하던 초창기에 이 지역대학 출신 신예 조각가 양두환(梁斗煥, 1941~74)의 등단은 주목할만하다. [제3회 도전]에서 <양지(陽地)>로 최고상(회장상)을 받은 그는 본래 진도출신으로, 진도중학교 미술부시절 미술교사 조규일(曺圭逸, 서양화가)의 지도를 받았다. 그리고 진도농고시절에는 비싼 화구대신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화강암을 재료로 석조상을 새기던 것이 조각에 대한 접촉이 된 셈이다. 그리고 이런 돌 작업 중에 눈동자를 다쳐 시력이 염려되자 원예업을 하던 집안에 쌓여있던 고목을 이용하여 목각을 시작하였는데, 이후 목조작품을 주로 하는 계기가 되었다. 군복무를 마치고 행남사에 근무하던 중 쑥돌에 새긴 <여인두상>을 `65년의 [제14회 국전]에 출품하여 첫 입선을 하고, 이듬해에도 <남해의 비바리>로 연이어 입선을 하게되자 조각에 대한 자신감과 뜻이 뚜렷해지고 주변의 권유들도 있고 해서 `67년 27세의 늦은 나이로 조선대학교 문리대 미술학과에 입학해서 정식으로 미술수업을 받게 되었다.

    입학 전부터 공모전에 출품해오던 터라 1학년 때인 「제3회 도전」(`67)에 처음 출품하여 <양지>로 최고상을 받았다. 이어 <열풍>(`68)과 <꿈꾸는 여심>(`69)으로 연속 특선을, 그리고 [제6회](`70)때는 <원시림>으로 부문우수상을 차지하여 `71년부터는 조제현 교수와 함께 첫 추천작가가 되었다. 특히 이 <원시림>은 목재의 천연조건 그대로 길쭉한 기둥모양을 살려 마치 생명의 유기체가 구불거리며 자라 오르는 듯한 추상작품으로 다양한 조형형식에 대한 탐구의지를 보여 주기도 한다. 아울러 `68년에는 부산에서 있었던 [제1회 동아국제미전]에서 금상을 수상하고, [국전]에서도 `65년부터 연속입선을 거듭하다가 조선대학교 졸업과 동시에 석산고에서 교사생활을 시작하던 `71년과 다음해에 2회 연속 「국전」 문공부장관상을 수상하여 본인은 물론 지역 미술계를 크게 고무시키기기도 하였다.

    초기의 석고상 몇 점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인체소재 목조상들인데, 목재의 넓이제한 때문에 인물입상을 주로 하면서 단독상에서 모자상 쪽으로 변화되어 간다. 대체로 사실적이면서 경우에 따라 원기둥에 가까운 몸통에 가슴이나 대퇴부만을 단순화시켜 강조하기도 하고, 신체 각 부분의 각을 크게 잡거나 표면에 잔잔한 칼 맛을 살려 목조특유의 질감효과를 내기도 하였다. 이 가운데 `71년 [제20회 국전]에서 문공부장관상을 수상한 <풍요(豊饒)>는 과일광주리를 머리에 인 여인 앞에 사내아이를 배치한 모자상으로 원통의 재료를 활용하여 엷은 천 속에서 드러나는 신체골격과 살붙임을 적절히 새겨내었다. 같은 문공부장관상이면서도 이듬해의 <상황 72>는 시사성이 담긴 주제를 조형화시킨 작품으로 이전과는 형식과 주제 면에서 새로운 변모를 시도했던 것 같다. 애절한 표정의 두 남녀가 키만큼 높은 칸막이를 사이에 두고 서있고 남자 손에는 평화의 새, 아래쪽에 사내아이, 구멍들이 뚫린 가운데 장벽에는 실재 쇠사슬까지 오브제로 도입하고 있다. 당시 민족분단과 이산가족현실을 해소하기 위한 남북적십자회담(`72~73년 사이 8차례 진행)과 ‘7.4남북공동성명’(`72) 발표 등 남북간 정치적 교섭이 진행되고 있던 시기의 시의성이 담긴 상징적 조형작업이었다.

    그리고 작업에 대한 열념과 야심을 더 한층 불태워 이듬해 때마침 벼락에 쓰러진 고향 진도의 해묵은 당산나무 거목을 어렵사리 옮겨다 몇 달 동안 <상황-73> 작업에 심혈을 기울였다. 구성은 <상황-72>와 비슷한 연작형식으로 앞쪽에 간절한 염원을 형상화한 자세로 한쪽 무릎을 꿇은 여인과 뒤에 아이를 안고 선 남자, 그 사이를 창살 꽂힌 구멍들과 쇠사슬이 얽힌 장벽이 가로막고 있는 거대한 기념비적 조형물로 서사적 연출 또는 구성력이 훨씬 구체화된 작품이었다. 그 동안의 어떤 작업과도 비교할 수 없는 열정과 노력을 쏟아 부은 대작인데다, 이후 대통령상 수상과 초대작가 획득, 유럽유학을 통한 국제무대 진출 등 장기계획을 세워두고 그 발판으로 삼기 위해 국회의장상을 목표로 한 것이었다.

    그러나 장대한 전체 구성 속에 해부학적 골격과 비례가 크게 어긋나는 시각적 부조화를 일으키고 말았는데 그 때문인지 결과는 입선에 그치고 말았다. 스스로 외적 형상추구 이전에 인체를 깊이 있게 탐구할만한 수업과정이나 작업현실이 갖추어지지 못한 당시 지방 조각계의 안타까운 현실이면서 한편으로는 의욕이 지나쳐 부른 실수이기도 하였다. 더구나 훨씬 역동성과 공간구성력을 강조하는 다음 작업까지 밑그림을 준비해 두고 조각인생의 원대한 포부를 향한 중요 전기로 삼으려던 시점에서 부딪힌 이 좌절은 그의 창작욕구에 상당한 심적 타격과 실의를 가져다 주었고, 이듬해인 `74년 2월 우연찮은 사고로 갑작스럽게 요절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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