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미술문화연구소

본문 바로가기

팝업레이어 알림

팝업레이어 알림이 없습니다.

남도조각

Home > 남도미술의 역사 > 남도조각
    정착단계의 남도조각


    활발해진 중격조각가들의 개별활동

    인적 자원이나 환경여건이 지극히 열악했던 태동기에 의욕에 넘쳐 있던 한 청년조각가의 타계는 실로 큰 손실이 아닐 수 없지만, 이 `70년대 전반부터 남도 조각계는 중요한 시기를 맞고 있었다. 대학 미술수업과 공모전을 통해 꾸준히 늘어가는 신진작가들의 등단과 이어지는 개인전, 점차 무르익어 가는 조각계의 활성화 기운 등이 그것이다.

    그 가운데 조제현은 `70년에 이어 2년 뒤 Y다실에서 세 번째 개인전(2월)을 갖는데, 석고와 백시멘트를 이용한 30여 점의 환조 부조작품들이었다. 물론 `71년 제7회 [도전]에서 추천작가로 지정되기까지 그 동안 2회 때 최고상 수상과 이듬해 입선, 제5회 <자매> 수석특선, 제6회 <상념> 특선, 그리고 [국전]에서는 `57년 첫 입선 이후 3회(`68, 69, 71) 입선 등 꾸준히 경력을 쌓아왔지만 양두환에 비하면 특별한 주목을 받지는 못하고 있던 터였다. 어려운 경제현실 속에서 작품제작비 마련 등 어려운 여건을 조금이나마 타개하기 위해 마련한 전시였던 만큼 기존 사실풍의 인물상 외에 독수리 토끼 같은 동물상들을 함께 전시하였는데 결과는 기대 이하였다. 결국 직면한 현실을 극복하지 못한 채 그 동안 몸담아온 조선대학교 교수직을 뒤로하고(양두환이 후임) 돌연 잠적하고 말았다.

    한편 조선대학교 여대에 몸담고 있던 박양선도 1970년 Y다실에서 첫 조각개인전을 열었다. 주로 인체소재 구상 또는 약간의 단순변형을 시도한 석고 시멘트상 29점을 전시하였다. 또 이 무렵 [전남미협]과 [조대미술연구회](1973발족), [한국여류조각가회](1974발족), 그리고 `75년부터 `78년까지는 이 지방 추상미술중심단체인 [현대작가 에포크] 회원전에 참여하는 등 공모전보다는 동인활동을 주로 하며 단순조형미 위주의 추상작품 쪽에서 독자적인 입지를 닦아 나갔다. `76년 조선대학교를 사직한 뒤 이듬해부터는 신설된 전남대학교 사범대학 미술교육학과에 출강하기도 하였다.

    또 `72년 9월에 지역 미술계에서 첫 비구상조각전이었던 엄태정의 개인전도 주목할만한 것이었다. 서울에 올라가 서울대학교와 대학원까지 마치는 동안 방학 때면 광주에 내려오곤 하던 그는 [국전]을 무대로 꾸준히 작품발표를 하고 있던 차였다. 대학 재학중인 `62년 [국전]에 구상작품 <사색자>로 첫 입선한 바 있지만 `64년 대학원과정부터 본격적으로 추상을 탐구하기 시작하여 이듬해 입선작 에 이어 `67년 제17회 때는 [절규]로 국무총리상을, 그리고 19회까지 연속 특선을 차지하여 다음 회부터는 비구상부(`70년부터 구상ㆍ비구상부 분리) 추천작가가 되었다.

    특히 `63년 7월 국립중앙공보관에서 창립전을 가진 서울대 미대출신 조각가모임으로 현대적 조형성을 추구하는 추상미술단체 [락우회(駱友會)]의 창립회원으로 참여한 이래 사각의 쇠막대를 구부려 입체조형효과를 강조하거나 동판을 두들겨 비정형성을 표현한 철조 비구상, 입방체의 일부 각이 풀어지면서 만들어낸 불규칙한 파열 속에서 거친 면을 드러내 대조시키는 등 실험적인 조형형식을 모색하던 때였다. 따라서 개인전 작품들도 대부분 이 같은 모더니티(modernity)를 추구하면서 `70년대 미술조류인 미니멀리즘(Minimalism)으로 옮겨가는 과정의 25점으로 추상형식이 낯설기만한 지역문화계에 새로운 현대조각 형식을 선보였다.



    청년작가군의 형성

    한편으로는 양두환에 이어 젊은 조각가들의 잇따른 배출인데, `70년대 전반까지만 해도 지역 유일의 미술 관련학과였던 조선대학교 사범대학 미술교육과(`69년부터 변경)와 [도전]을 통한 등단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70년대 들어 신예작가들의 출품이 활발해지면서 참여숫자도 늘어가는데 가령 최고상을 수상한 박선희(74) 조판동(76), 우수상 경력의 문옥자(71, 73) 김철수(72,75) 조판동(74) 김대길(76, 77) 조숙의(78, 79) 외에도 박병희(73) 김철수(74) 김왕현(75, 76) 조판동(75, 78) 정윤태 고영을(75) 등 특선을 수상한 작가들까지 그 수가 점차 늘어갔다.

    `70년대에 지역 대학에서 조각을 전공한 청년조각가는 대부분 현역교사로 나가게 되었는데, 많을 때는 한 회 입상자가 36명에 이른 적도 있어(`78) 첫 회 단 4명에 비하면 대단한 성장이라 하겠다. 이들 가운데 문옥자는 맨 처음으로 추천작가(`74~)와 초대작가(`79~)에 올랐고, 이어 김철수는 78년, 조판동 김행신은 `79년부터 추천작가가 되었으며, 박병희(70, 76, 77, 79), 김광진 김철수(75), 정형수(76) 문옥자(78) 등은 국전에 입선하기도 하였다.

    특히 `70년대 들어 배출된 젊은 조각가들 가운데 [도전]에서 가장 먼저 확실한 입지를 다진 문옥자(文玉子, 1949 광주생)는 `73년 조선대학교 미술교육학과 졸업 직후부터 광양 영암 등 시골학교를 전전하는 교직생활 중에 좋은 결과를 얻어내기도 하였다. `69년 대학 1학년 때 조제현 교수의 석고 모각을 보고 흥미를 느껴 수업과는 별도로 반신상 <회심(回心)>을 제작, 처음으로 [제5회 도전]에 출품한 것이 특선을 차지한 이래 주관적 해석과 변형을 삼가 한 사실적인 묘사의 여체상 <상념>과 <훈풍>으로 `71년 `73년에 각각 부문우수상 2회, 그리고 특선 1회를 추가하여 일찍 추천작가가 된 것이다. 그리고 `79년 광주근교인 송정여상고로 자리를 옮겨오면서 `80년대 본격적인 작업의 계기를 가질 수 있었다.

    아울러 `75년 조선대학교를 졸업하기까지 조제현 양두환 고정수 교수의 지도를 거쳤던 김철수(金喆洙, 1946 태인 생)는 군복무 후 대학 2학년 때인 [도전] 제8회(72)와 9회(74)에서 <파종>과 <회고>로 두 차례의 부문우수상 수상을 비롯, 졸업반이던 `74년과 `77년에 특선 2회를 추가하여 문옥자에 이어 두 번째로 조각부문에서 추천작가가 되었다. 대학재학시절부터 상투적인 석고상 외에 목조와 시멘트상을 비롯, 석공장에서 석조기술을 익혀 3학년 때는 [제4회 대학미전]에서 석조 여인좌상 <추(秋)>로 은상을 수상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이듬해 졸업작품 <전설>은 서로 등을 맞댄 남녀 2인 목조상으로 여인의 머리 위에 3단의 타원체를 올린 사실조각인데 구성과 표면처리 등에서 양두환 교수의 영향이 나타나기도 한다. 그 역시 졸업직후부터 광주상고 등 중고등학교에 근무하느라 조각에 전념치는 못하였는데, 시멘트 작업을 보완하는 틀 작업이나 새로운 합성수지(Polyester) 떠내기 기법 등을 앞서 시도하기도 하였다.

    조판동(趙判童, 1948년 생)도 당시 새롭게 성장하는 조각가 중의 한 사람이었다. 2학년인 `74년 [제10회 도전]에서 <서있는 사람>으로 부문우수상을 수상한 것을 처음으로 `75년에는 특선을, 아울러 같은 해 [제6회 대학미전] 특선과 [제12회 목우회전] 특선 등의 수확을 거두었다. 이어 졸업반이던 `76년에는 [제12회 도전]에서 <조율 76>으로 최고상을 수상하기에 이르는데, 등 위의 아이와 함께 수평으로 나르는 무중력감의 여인상을 특별한 변형이나 과장 없이 사실적으로 묘사한 목조각이며 이 무렵 다른 재료와 소품연작으로 즐겨 다루던 형식이었다. 주로 ‘생명의 내재율’(律)을 주제로 여체의 독특한 자세연출과 함께 부드러운 곡선과 율동미를 즐겨 찾던 그는 이어서 `78년에도 특선을 한차례 더한 뒤 `79년부터 ?도전?에 추천작가로 참여하게 되었다.

    정윤태(鄭允台, 1946년 완도생)도 이 무렵 신예 조각가의 한 사람이다. 서양화가인 형(정윤식, 조대 7회 졸업)의 영향으로 어려서부터 미술을 가까이 접하였으나 어려운 생활형편으로 군복무 후에야 대학에 입학한 그는 `75년 <시선>으로 [제11회 도전] 첫 특선을, 같은 해 [제6회 대학미전] 동상과 [제12회 목우회전] 특선을, 이듬해 졸업반으로 [제7회 대학미전]에서는 <새 차원의 노래>로 은상과 [제13회 목우회전]에서 <남풍>으로 국립현대미술관장상을, [제12회 도전]에서는 3점 모두 입선하는 등의 연속 수상으로 성과를 올리게 되었다.

    특히 그는 대학 3학년 무렵부터 상투적인 인체 사실묘사보다 독자적인 해석과 변형으로 심상적 주제의 조형미를 이끌어 내는데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하였다. 말하자면 일차적인 조각의 물리적 속성 속에서 상하좌우 시각적 균형이 이루어지는 조화점을 찾는데 우선하면서, 그 형식미 속에 내적 의미를 함축시켜내는 작업방식에 중점을 두었다. 앞의 <새 차원의 노래>도 새를 든 모녀상을 원통형으로 단순화시키면서 실제보다 길게 늘어뜨린 작품인데, 인간내면 속의 간절한 염원을 주된 의미로 담아내는 후의 <조화의 순간> 연작의 전조가 된 셈이다. 또 순천출생으로 목원대학을 졸업하고 동신여고 교사로 근무하던 조숙의(趙淑義)도 `78~79년 독특한 분위기의 여체상 <운(雲)>과 <여인>으로 연속 우수상을 수상하며 지역 조각계에 참여하고 있었다.



    대학교육 여건의 변화

    이 `70년대 중반부터 새로 대학 미술교육에 참여하면서 지역 조각계의 중추역할을 맞게되는 작가들이 있었다. 먼저 `74년 봄학기부터 조선대학교와 연을 맺게 된 고정수(高正守, 1947년 생)의 활동이다. 어려서부터 인천에서 성장한(본래 충남 예산태생) 그는 `70년 홍익대학교 조소과를 졸업하기 이전부터 공모전에 작품을 발표하면서 입지를 다져 왔다. 이미 `67년부터 시작하여 `77년까지(`74제외) 십여 년 간의 [국전] 연속입선을 쌓고 있던 때인데, 그 가운데 조선대학교에 내려오기 전인 `71년부터 `73년까지는 철판과 금속 파이프 등을 결합하여 나무나 잘려진 원기둥 등의 형태들로 당시 국내 미술계에 폭넓게 확산되고있던 단순조형미으로 [국전] 비구상부문에 세 차례 입선한 바 있고, `71년 [제2회 한국미술대상전]에서 특별상을 받을 때도 마찬가지의 작품이었다.

    광주에 내려오면서 다시 구상으로 전환하여 대지 또는 풍요의 여신과도 같은 풍만한 여체로 지역 농경사회 특유의 정서와 문화풍토를 수용하기 시작하였다. `76년에는 석조로, 이듬해부터는 브론즈상을 출품하는데, `78년 [제27회 국전] 특선작인 <연모(戀慕)-26>나, 이듬해 문공부장관상을 수상한 <자매(姉妹)> 등 일련의 작품들이 모두 풍만감을 강조한 연작들이다. 아울러 `77년에는 지금까지 김영중 단독으로 진행되어오던 [도전] 심사에 김행신과 함께 처음으로 참여하고, 다음 해부터 추천작가가 되면서 활동기반을 넓혀 나갔다.

    한편 1974년 봄학기부터 전남대학교 사범대학 미술교육과 신설은 `62년 교육대학으로 전환되면서 폐교된 광주사범대학의 전통을 이어 조선대학교 사범대학 미술교육과와 양립하는 작가산실로서 새로운 장을 마련한 셈이다. 이 전남대에 `76년부터 전임으로 눌러 앉게 된 김행신(金行信, 1942 고흥생)을 중심으로 조선대학교 주축이던 지역 조각계에 경쟁적 분위기가 형성되기 시작한 것이다. `63년 서라벌예술학교 회화과에 입학하였던 그는 군복무 중 국립묘지 기념조형물 조각병 차출기간 동안 야간 공예과로 전과한 것을 계기로 제대 후 같은 서라벌예술대학 공예과에 재입학하게 되었다. 이미 고교입학 전 `58년부터 김영중 조각실에 기거하면서 그의 [국전] 출품작이나 신흥대학(현 경희대) 분수대 조형물, 동국대 백성욱박사 동상제작 등을 거들며 일찍부터 조각의 실제 기초를 익힐 수 있었다. 그리고 <4.19 학생운동기념탑> 제작 참여차 소개받은 당시 홍익대 조소과 교수 김경승(金景承, 동경미술학교 조각과 졸업)의 작업실에서 수년간을 지내기도 하였는데, 김영중으로부터는 조형성을, 김경승에게서는 사실적 표현력을 키울 수 있었다.

    헨리 무어(Henry Moore) 작품에 매료되어 몇 차례 모작도 해보았던 그는 `66년 예총주최 <신인예술상 공모전>에 단순조형작품 출품을 시작으로 `67년 [국전] 입선과 이듬해 [제17회]에서 <습작>으로 문공부장관상을, `69년 <불로장생>과 `71년의 <나부> 특선을 비롯, `80까지 연속입선(73,77제외)을 거듭할 때 대부분 전형적인 여체 사실조각상들이었다. 그러나 `70년대 중반을 지나면서 `76년의 <달맞이>처럼 면의 단순변형과 유기적 선의 변화, 매끄러운 표면질감과 부분적으로 거친 질감이나 열린 공간을 두어 추상과 구상형식을 결합시킨 인체상들로 삶의 기원이나 향수 어린 정서들을 담아내는 형상성을 모색하게 되는데, 이러한 태도는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이어지게 된다.

    실기수업시간에는 테라코타(Terra-cotta)를 지도하였는데, 그가 고정수와 함께 처음으로 심사에 참여한 `77년 [제13회 도전]에 이 테라코타상들이 다량 출품되어 명제부터가 테라코타와 연관된 작품들이 많았다. 하지만 이 테라코타 작업은 개인가마를 빌려 구워내야 하는 등 교내 작업여건이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은 탓에 지속적으로 이어지지는 못하고 `80년대 들어서는 일부 개별적인 작업에 머물게 되었다.

    김행신의 지도아래 `78년부터 전남대에서도 조각전공 졸업생들이 배출되기 시작하는데, 김대길 김숙경 이재심 최규철(1회), 김병식 정유숙 조인기(2회), 김형준(3회) 등이 그 예다. 사실 학과운영 자체가 교사양성 중심이기 때문에 여러 분야를 섭렵해야 하는데다 근무 여건과 작업현실을 감안하여 조각을 전공하는 예는 극히 드물었다. 이 가운데 김대길(金大吉, 1955년 여천생)은 1학년 때 <토르소>로 목우회 공모전에 첫 입선한 것을 시작으로, `76년에는 [제13회 목우회전] 특선, 같은 해와 이듬 해인 [제12회]와 [제13회 도전]에서 <창공> <애마>로 연속 부문우수상을 수상하면서 초창기 신설학과에서 주목받는 성과를 올렸다. 최규철(崔圭澈, 1954년 영암생)도 `75년 [제12회 목우회전] 특선과 이듬해 [제7회 대학미전]에서 <갈망>으로 동상 등을, 김형준(金亨俊)은 `78년부터 `80년까지 <제비 날던 날의 꿈>과 <봄을 향한 태동> <초우>로 연이어 [도전] 3회 특선을 차지하고 졸업 후에는 홍익대 대학원으로 진학하기도 하였다.

    아울러 1979년 국립목포대학 미술학과의 개설은 미술학도들의 입문에 더 넓은 기회를 제공하게 되는데, 조각지도는 홍순모(洪淳模, 1949년 서울 생)가 맡게 되었다. `76년 서울대학교 조각과와 동 대학원을 마치고 `79년 가을부터 목포에 내려온 그는 미술을 통한 시대의식 표출작업을 하며 `77년부터 [12월전]에 참여하고 있었다. 이 모임은 서울대 출신 서양화와 조각전공 청년작가들이 암울하기만 한 사회환경과 삶의 현실에 대한 시대의식을 미술형식으로 담아낼 것을 결의하며 `76년 창립한 모임으로 `80년대 본격화되는 ‘참여미술’의 선도적 위치에 서게 되는데 홍순모도 `80년까지 그들과 함께 하였다. 당시 `78년과 `79년의 제27~28회 [국전] 비구상부에 출품 입선한 <파흔(破痕)> 연작을 계속하던 때로, 마대자루나 녹슬고 탄흔이 남아 질곡의 역사와 삶의 퇴적을 암시하는 금속판과 돌가루를 혼합한 합성수지(Polyester)재료의 암시적 형상에 그을음 따위를 입혀 시각적 효과를 더하는 작업들이었다. 아울러 [낙우회전](`79~86) 등에도 참여하면서 `80년대 새롭게 대두된 사실주의 미술에서 개성 있는 조각가의 한 사람으로 주목받게 되었다. 그의 지도아래 `83년부터 배출되기 시작한 목포대학 조각전공 졸업생들도 많지 않은 수이지만 내적 상징의미들을 강조하는 독특한 분위기들을 선보이며 개별활동을 펴 나가게 된다.


    © Copyright 2021 광주미술문화연구소 All Rights Reserved
    본 사이트의 이미지들은 게시자와 협의없이 임의로 사용할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