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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도조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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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흥기를 맞은 남도조각


    첫 조각가 모임-[남도조각회]

    남도조각계는 1970년대 후반에 들면서 새로운 전기를 맞고 있었다. 본격적인 조각작품 활동을 하는 작가들이 늘어가면서 조각의 입지와 위상을 가다듬고 활동의 구심점으로서 첫 조각가모임 '남도조각회'가 결성되기에 이른 것이다. 회칙을 보면, ‘본회는 조형적인 미의 근본을 탐구하고 창조적인 작업을 전개하여 한국미술의 발전에 기여함과 동시에, 민족미술창달에 공헌할 것을 그 목적으로 한다’면서 기본적으로 ‘회원구성은 전남거주와 전남출신으로’하고, ‘2년에 1회의 회원 전원의 신작발표전을’ 갖기로 하였다. `78년 9월 창립총회에 이어 `79년 첫 창립전(10.10~15, 삼양백화점3층 전일미술관)을 열었는데, 이 때 창립회원은 고복령 고정수 김왕현 김철수 김행신 문옥자 송미숙 오명희 윤영월 정윤태 정형수 조숙의 조판동 등 모두 13명이었다.

    당시 회장 고정수는 ‘예향 전남미술의 맥락 속에는 표상이 될만한 조각가가 부재한 탓도 있겠지만 아직도 순수미술로서의 조각의 사회적 인식은 충분히 정립되어 있지 않다. 그러기에 이제 뒤늦게나마 전남에서 활동하고 있는 조각가들은 우의와 결속을 다짐하고 조각인구의 저변확대를 위해서 [남도조각회]를 창립하기에 이르렀다...시련을 서로 깊이 공감하면서 우리는 강한 유대의식과 후진양성에 온갖 힘을 기울일 것이다’(창립전 도록 인사말)라고 하여 당시 조각가들의 열악한 환경에 대한 시사와 함께 동인들의 새로운 각오와 의식을 다지고 있다.

    이 모임에 참여한 회원들은 양 대학에 몸담은 고정수 김행신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현직 교사들이었으며 작품경향은 당시 지역 조각계의 추세를 대변하는 것이었다. 전시작품들은 여체를 소재로 한 흉상ㆍ반신ㆍ전신상들로, 세부묘사를 생략한 주관적 형태해석이나 배경구성물을 도입한 경우도 있지만 사실묘사 위주의 인물상들이 대부분이었다. 이 [남도조각회]의 창립은 지역 조각계의 중심단체이자 이후 선배세대로서 역할을 주도해 나가게 되었다. 이는 초창기 앞 세대가 대학 수업기 이후 활동거점을 서울에 두고 개별활동을 펴거나, 고향에서 일정기간 머물렀더라도 다시 타지로 떠났던 예들과 비교되는 점이다.

    한편, 같은 1979년 말 [한국구상조각회] 출품을 계기로 타지역 조각가들과도 교류를 갖기 시작하였다. 고정수 김행신이 `77년 이 모임의 창립 때부터 관여하고 있었는데 이 해 [제 4회전](`79.11.24~29, 미술회관) 때 남도조각회원인 김광진 김숙경 김철수 문옥자 박병희 정윤태 조판동 박양선 윤영월 정윤태 등이 새로 출품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 전시회에 이어 `80년 1월 로마 라고스티아나(l'Agostiniana) 갤러리의 회원전에도 참여함으로써 처음으로 해외 전시까지 활동 폭을 넓히게 되었다.



    선-후배 작가군의 형성

    1980년대는 `70년대 전ㆍ후반에 대학을 졸업한 작가들이 각기 중견 청년작가들로, 또 새로 배출되는 신예들이 서로 세대들을 이루며 조각계의 층을 두텁게 하고 본격적인 활동들을 펼쳐나가는 시기다. 물론 `80년 5.18광주민주화운동 이후 한 동안은 사회 전반적으로 위축 침체된 상황 속에 문화예술활동도 활성화되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이 시기에 조각가들의 단체전 참여뿐 아니라 초대전들이 시작되고 전남대학교에 예술대학 미술과가 신설됨으로써 작가양성의 폭이 더욱 넓어지고 새로 대학교육에 참여하게된 신임교수들을 중심으로 각 학교마다의 특성들이 마련되어져 갔다.

    새롭게 도약하는 시점의 `80년 남도조각계에 조판동의 갑작스런 죽음(80.4월)은 적지 않은 충격이었다. 모교인 조선대학교에서 조교를 거쳐 전임으로 발령 받은 지 3개월만의 일이었다. 그 후임에는 정윤태가 자리를 물려받게 되었다. 그리고 그 해 두 번째 [남도조각회전](80.10.22~11.4, 전일미술관)에는 강명숙 김대길 박양선 박영재 서금희 이순옥 황경숙 등이 새로 가입하여 회원 19명의 작품이 전시되었다. 이어 다음 해에는 모처럼 넓은 전시공간을 갖추고 개관(`80)한 남도예술회관에서 17명이(조판동 서금희 제외) 2~4점씩을 출품하여 규모 있는 회원전을 가졌다.

    이 무렵 조각작품들에는 저마다의 개성들이 뚜렷해져가고 있었다. 특히 유독 둔부 쪽을 풍만하게 강조한 <자매>연작으로 「국전」 등 공모전에서 성가를 올리고 있던 고정수, 사실묘사와 단순조형의 결합이 더욱 뚜렷해진 김행신, 여체 일부를 엷은 천으로 은근히 가리거나 인물 뒤에 배경구성을 둘러싸는 등 수줍은 여심의 <초야(初夜)>를 연작 중이던 문옥자, 향수 어린 소재를 주관화시킨 <새와 인물>연작의 김철수, 이전보다 더욱 날렵하게 늘어뜨린 여체2인상을 통해 <조화의 순간> 연작을 주로 하던 정윤태 등 개성 있는 양식들이 형성되어진 것이다.

    이들 조각가들의 의욕적인 활동으로 조각에 대한 관심이 점차 높아가고 있던 `82년에 남경화랑(南京畵廊)에서 [남도조각회 초대전]이 마련되었다. 김홍곤 명경라 손연자 신은학 장영혜 정세균 황혜정 등 신진작가들이 새로 가입한 이 전시에서는 중견 청년작가들이 목조 석조 브론즈 등 소품 2점씩을 고루 선보이며 선ㆍ후배세대간의 유대를 다졌다. 그러나 상업화랑을 표방했던 이 전시장의 초대전 결과는 너무 기대 이하여서 회화위주의 지역미술풍토에서 조각이 제자리를 잡기는 아직 이른 시기라는 걸 확인하는 셈이 되었다. 따라서 어렵사리 조각 초대전을 시도했던 화랑측은 물론 현실여건들이 불안정한 대다수의 조각가들에게도 실의를 안겨 줘 이후 `85년에 재모임을 갖기까지 회원전조차도 계속 미루어지고 말았다.

    한편 `81년 6월에는 김영중에 의해 대형 기념조형물이 광주 어린이대공원에 세워졌다. 대부분 실내 소품조각 아니면 공모전의 정형화된 인물조각상들에 익숙해져있던 당시 일반인들에게 보기 드문 큰 규모의 조형물이었다. 명제 <희망>에서도 암시되듯이 이 지역 전통문화로서 대지로부터 솟구치는 건강한 힘의 남성 성기 모양을 단순화시킨 작품으로 파도처럼 상승하는 포물선의 맨 꼭대기에 희망의 세계로 날아오르는 인물군상을 얹어 시각적 무게감을 덜어낸 극적 구성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물론 개인적으로도 `77년 세종문화회관 대형부조작업 <비천상>이후 주로 `80년대부터 본격화되는 그의 환경 기념조형물 작업의 막을 여는 작품이라는 점에서 주목할만 하다.

    `82년 11월 10일, 전국에서 처음으로 대규모 야외조각공원이 목포유달산공원에 문을 열었다. 산동네를 철거하고 공원으로 재개발하면서 기념비적인 탑을 세우려던 목포시의 계획을 김영중이 주변 경관과 지역민들의 정서적 공감대, 예술문화환경 조성 등을 들어 방향을 바꿔낸 결과였다. ‘목포범시민유달산공원화추진위원회’와 그의 주도아래 사업을 추진하면서 작가마다 10년 임대계약기간 동안 입장수익의 50%를 고루 배분하는 조건으로 엄청난 작품매입비 부담을 해결하였다. 전국 44명 104점의 다양한 작품들을 세웠는데, 광주 전남지역 연고작가로는 김영중 김행신 강관욱 박병희 김광진 김왕현 김대길 김형준 등 8명이 참여하였다.

    이어 1983년도에는 전남대학교 미술교육학과에 강관욱(姜寬旭, 1946년 군산생)이 교수로 초빙되어 왔으며, 전국단위의 조각전과 오랜만의 개인전들로 조각계가 활기를 띠기 시작하였다. `80년 1월에 로마전시를 다녀온 ‘한국구상조각회’의 5월 제5회전(관훈미술관)에 김형준 서금희 이순옥 등 신예작가들이 새로 가입한 것을 비롯, 타지역과 교류의 통로로서 그 참여가 꾸준히 늘어가고 있었는데 이 모임의 주축으로 독자적 사실조각을 펼쳐나가고 있던 강관욱이 광주로 내려 온 것을 계기로 지역 구상조각은 더욱 내실을 더하게 되었다.

    미술교육학과에서 새로 신설된 예술대학 미술학과로 자리를 옮긴 김행신의 후임으로 광주와 인연을 맺게 된 강관욱은 홍익대학교 재학시절부터 특히 석조에 깊은 매력을 느끼고 있었다. `75년 졸업하던 해 첫 입선에 이어 다음 해 [제25회 국전]에서 <귀향(歸鄕)>으로 국무총리상, 이어 26회부터 28회까지 <문(門)> <피안(彼岸)> <양지(陽地)> 등으로 연속 특선을 거듭하여 `80년 제29회부터는 추천작가가 되었다. 대부분 파도, 나무, 돌문 등의 배경 앞에 여인과 세 아이를 배치시키는 구성들이었다. `81년 문예진흥원 미술회관에서 첫 개인전을 가진 뒤 광주와 인연을 맺게될 당시 그의 작품들은 삶에 대한 경건한 애정을 바탕으로 주변 소시민들의 정서와 내면세계를 정교하고 잔잔한 터치들로 정감 있게 담아내고 있었다. 따라서 감성위주의 지역 조각계에 구체적 현실감을 담아내는 치열한 작가정신과 작업태도로 교육적 효과는 물론 폭넓은 공감대를 넓혀 나갔다.

    `83년, 회장인 강관욱의 주선으로 [제8회 한국구상조각회](83.5.1~5.7, 남도예술회관)가 지역 첫 전국규모 조각전으로 열리게 되었다. 서울과 각지에서 활동하는 중견 청년작가들의 다양한 구상조각들과 함께 강관욱 고정수 김대길 김숙경 김왕현 김행신 김형준 문옥자 이순옥 정윤태 등 남도 선후배작가들이 참여하여 모처럼 조각에 대한 일반의 이해와 위상도 새롭게 하면서 창작의지도 재충전시키는 기회가 되었다.

    아울러 `72년 조제현, 엄태정의 개인전 이후 10여 년 동안 끊겨 있던 조각개인전이 다시 열리게 되었다. `81년 전남대학교 미술교육과를 졸업한 뒤 성신여대 대학원에서 석사과정을 밟고 있던 이영해는 12월 서울전에 이어 광주에서 첫 개인전(`83.1.18~1.24, 남도예술회관)을 가졌다. 석조 몇 점 외에 대부분 겉을 태워 천연발색효과를 곁들인 목조였는데 사각 삼각 등 기하학적 입방체 구조에 부드러운 여체의 부분이미지를 결합시킨 ‘응축’ 연작의 추상작품 25점이었다. 지역미술계에서는 보기 드문 추상조각의 세계였지만 이후 교직에 몸담으면서 구상조각으로 선회함으로써 잠시 동안의 모색으로 그치고 말았다.

    그 해 가을에는 고정수의 첫 개인전이 열렸다(`83.10.6~10.10, 남도예술회관). 그 역시 서울에 이어 가진 이 전시회에 `81년 [국전] 대상작품과 같은 <자매>연작을 비롯, 석조 브론즈 등 풍만한 여체상들 36점을 발표하였다. 이와 함께 이듬해 증심사 아래 운림가든에서 광주 현대화랑이 기획한 [구상조각10인초대전](`84.6.28~7.28)은 자연환경과 조화를 모색하는 첫 야외전으로 김영중 강관욱 고정수 김대길 김창세 김형준 김행신 문옥자 조상필 홍순모 등이 초대 출품하였다.

    그러나 개인전은 물론 여러 성격의 단체 기획전들이 아직은 활발하지 못한 시기이므로 작가로서 등단통로나 발표무대는 여전히 공모전으로 몰릴 수밖에 없었다. `82년부터 민간이양형식으로 새로 출발한 [대한민국미술대전](이하 [미술대전]-이전의 [국전])의 전례를 따라 「도전」도 [전라남도미술대전]으로 명칭을 바꿨으나 운영방식과 체제는 큰 변화 없이 계속 이어졌다. 이 「도전」을 통해 경력을 쌓으며 입지를 확보한 작가들이 늘어가고 거의 김영중 단독으로 진행되어 오던 조각부문 심사도 `70년대에 등단 성장한 후배작가들이 새로 참여하게 되었다.

    아울러 `80년 맨 처음 초대작가가 된 문옥자에 이어 초대 추천작가에 오르는 작가들이 많아지고 젊은 작가들의 등단이 계속되었다. 특히 `80년대 전반기의 심사에 김영중(82~84)과 함께 김행신(80~82) 고정수(80~82, 84) 문옥자(81, 83) 강관욱(84) 등이 참여하기 시작하고, `70년대 말 이후 졸업한 청년세대 가운데서도 김형준(82) 김대길(83) 김홍곤(84) 등이 추천작가에 올랐다. 또 `81~82년 <조화의 순간>과 <남풍82>으로 우수상과 최고상을 받은 정윤태 이외에 최우수상의 윤순곤(83) 김성식(84), 우수상의 김홍곤(80) 김대길(82) 김성식(83) 최규철(84) 등 수상작가들도 젊은 세대로 연령층이 훨씬 낮아지고 있었다.

    [대한민국미술대전]에서도 김영중(82) 엄태정(82, 84) 김행신(84)이 심사위원에 참여한 것을 비롯, `84년 제3회전 <초접(初蝶)>으로 우수상에 이어 이듬해 <개문(開聞)>으로 특선을 수상한 김형준(1회)과 김대길(29, 1~2) 나상국(2~5)을 비롯하여 박병희 정윤태(1) 김광진(1~2) 김지연(2) 최규철(3~4) 김왕현 주동진(3) 배현(4) 등의 입선으로 젊은 작가들의 참여가 계속 늘어갔다. 특히 이들 젊은 조각가들에 의해 정형화되어 온 여체 누드상들은 점차 착의 또는 2~3인의 군상, 아니면 뚜렷한 주제의식과 조형성을 모색하는 비구상작품의 등장으로 새롭게 변모되고 있었다.



    남도조각계의 새로운 풍토 변화

    `80년대 중엽을 넘어서면서 남도조각계는 새로운 변화들이 뚜렷해진다. 새 조각단체들의 창립과 현실 참여조각의 대두, 확장되는 일련의 활동들, 변화하는 시대현실이나 신감각에 대응키 위한 사실조각 또는 형상성 조형성의 극대화, 훨씬 파격적인 소재와 형식, 소통방식으로서 공간활용의 변화, 그리고 새 공모전으로 발표무대의 확대 등 동인의 증가 뿐 아니라 소재와 형식 내용 모든 면에서 새로운 기류로 중흥기를 맞게된 것이다.

    우리 현대사에서 격변기였던 1980년대 후반부를 시작하는 `85년 연초에 조각가들의 결집과 창작의지를 새롭게 다짐하는 [남도조각회]가 `82년 이후 공백을 깨고 다섯 번째 작품전을 열었다(1.30~2.4, 남도예술회관). 비슷한 연배의 서양화모임 [청동회]의 여섯 번째 발표전과 연립전으로 치러진 이 전시회는 몇 회원들의 변동 속에 고정수 김대길 김성식 김왕현 김재삼 김지연 김철수 김행신 김형준 나상옥 문옥자 송미숙 오명희 윤영월 정세균 정윤태 최규철 등 17인이 출품하였다. 해를 걸러 `87년 6회전부터도 신예들의 가입으로 회원이 크게 늘어가고 운영위원제를 도입하는 등 지역 조각가들의 중심단체로서 기반을 굳히며 매년 정기발표전을 이어 나갔다.

    그리고 기존의 [한국구상조각회] 외에 타지역과의 교류를 넓히기 위하여 `86년 전국조각가모임인 [제3조각회 창립전]에 참여하였다. ‘편협한 권위의식이나 노력 없이 받으려는 그릇된 생각에서 벗어나... 작가적 순수성을 일깨우고 지속시켜 나가는데 필요한 공동체가 되고자’ 국내 미술계 주도세력인 서울대 홍익대를 제외한 수도권과 각 지방대학 교수 졸업생들이 창립(10.19, 대표 박병희)한 이 모임은 이듬해 2월 일본의 청년조각단체 [테라(TERRA)]를 초청하여 한일교류전 형식으로 첫 전시회(`86.2.25~3.2, 서울갤러리)를 가졌는데, 이 지역의 김대길 김왕현 김홍곤 마영진 문옥자 박병희 정성용 정윤태 최만길 등(조선대9명 전남대3명)을 비롯 전국 27개 대학 142명이 참여하였다. 그리고 다음 해에는 탁연하 강관욱 김지연이 새로 가입하여 역시 [TERRA]와 연립전으로 동경에서, 이후 일부 회원변동과 더불어 서울 대만 대구 부산 인도(델리) 등을 돌며 전시회를 이어나갔다. 특히 `90년에는 회장 정윤태 등 광주지역작가 32명이 참가한 제 5회전을 가졌고, `95년 3월에는 [전국조각가협회]로 명칭을 바꿔 러시아작가들과 교류전을 갖기도 하였다.

    한편 대학 관련학과 쪽에도 교수진이나 학과, 교육내용의 변화가 거듭되는 가운데 `85년 봄학기부터 목포대학 미술과에 김창세(金昌世), 가을부터 호남대학 미술과에 문옥자, `87년 봄부터 전남대 예대 미술과에 김대길이 각각 교단에 합류하게 되었다. 이 중 김창세는 `78년 서울대를 졸업하고 동문들끼리 기존 단체와의 차별성을 모색하며 1981년 창립한 [마루조각회](`88년 해체) 등을 통해 작품활동을 계속해 오던 터였다. 특히 `88년 12월 목포 KBS전시실과 `92년 서울 금호갤러리에서 가진 개인전 등에서 전통초상화를 소재로 조형적 재해석을 시도한 인물초상조각들로 독자적인 세계를 구축해 나갔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고무적인 것은 `86년 봄학기 부터 조선대학교 미술대학에 조소과가 신설되어 전문인력 양성에 보다 내실을 기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다. 그런 가운데 `74년부터 신설 조소과 초기까지 10년 넘게 조각지도를 맡아온 고정수가 `87년 돌연 사임 후 서울로 올라가고, 이듬해 9월 김인경(金仁卿)과 신현중(申鉉重)이 내려오게 되었다. 신현중 김창세와 김인경은 중흥기를 맞은 지역 조각계에 외부 활력을 수혈한 것으로 이들은 각각 `77~78년에 서울대 홍익대를 졸업한 뒤 외국유학을 통해 현대조형예술에 대한 탐구를 계속하며 공모전보다는 단체 기획초대전들을 통하여 개성 있는 창작활동들을 펼쳐오던 청년세대의 주역들이었다.

    이어 `91년 전남대 예대 미술과에 최규철이 자리를 잡고 대신 미술교육학과에서 사실조각을 지도해 오던 강관욱이 작업에 전념하기 위해 사직하는가 하면, 조선대 조소과에도 `92년 봄 목포전문대에서 옮겨온 조의현(趙義鉉)이, `95년 봄부터는 박상호(朴相鎬)가 전임지도를, `94년 동신대학에는 김왕현이 자리를 잡는 등 교수층이 두터워지면서 `80년대 등단세대들까지 교수진으로 합류하게 되었다.



    청년조각가 모임의 폭발적 증가

    각 대학마다 조각전공 졸업자들이 크게 늘어나고 활동방식도 다양해지면서 대학동문은 물론 학과 동기생 모임까지 이어지는 것도 달라진 풍토변화다. `86년 전남대 예대 미술과 첫 졸업생들인 윤성규 나상국 최광순 하영생 등 9명의 [흙조각회 창립전](`86.8.26~9.1, 금호문화재단, `88년에 두 번째 전시 후 중단)을 시작으로, 조선대학교 조소전공동문 모임인 [조대조각회 창립전](`86.9.3~8, 가든갤러리)가 열렸는데 조대조각회의 경우는 문옥자 김철수 정윤태 등 선배들을 포함한 역대 졸업생 17명과 재학생 32명 등이 조소동문전을 갖고 매년 정기발표전을 이어 갔다.

    이러한 동문성격의 신세대 조각가모임이 `90년대 들면서 부쩍 늘어나게 되는데 특히 조선대 조소과 출신 모임들이 주류를 이룬다. 먼저 4월에는 이해 조선대 조소과를 갓 졸업한 강상규 이이남 등 동기생들의 [~ing 6인 조형전](`90.4.11~4.15, 가든미술관)을 선두로, ‘기존 미술풍토와 정형형식에서 벗어나 젊은 열정의 형상성들을 펼쳐나가겠다’며 각 학교간 연대를 모색하는 [21세기 정신전](`90.9.12~ , 화니미술관)이 창립되었다. 특히 [21세기전]은 고근호 공성순 신만호 노정용 등 전남대 조선대의 재학생과 대학원생 9명으로 출발하여 이후 호남대까지 광주지역 조각전공 출신의 모임으로 회원 수를 늘려가며 주도적인 활동을 이어 간다.

    이어 `91년 9월에는 조대 조소과 첫 입학동기 86학번모임인 [8678전]이, `92년 10월에는 [타래전], 전대 조대 연합전 [침몰직후전]이 `93년 9월에 창립전을 가졌다. 아울러 전대 미교과출신 현역교사모임인 [합(合)조각전]이 `90년 8월에, `91년 호남대 조각전공동문모임인 [호남조각회], `93년 [흙조각회]를 계승한 [전남대학교 미술과 조소전공 동문] 창립전, `94년에는 같은 예대출신모임 [휘모리]가 각각 결성되었다. 그밖에 `94년 전국 젊은 조각가들의 [우리세대조각그룹] 창립에 주도적으로 참여하는가 하면, `87년 10월의 [광주청년미술작가회 창립전]과 `93년 시작된 [광주미술제]를 비롯, 학연 전공별 구분을 떠난 연합전모임 또는 기획초대전 등의 경우는 수없이 많다. 개인전도 점차 활발해지는데 특히 `90년 무렵을 지나면서는 폭발적으로 급증하여 거의 매년 또는 한해에 세차례의 전시를 갖는 경우도 있다.

    아울러 주로 신예들의 경우지만 전업작가로 나서거나 외국유학을 떠나는 작가들이 급증한 것도 이 시기 두드러진 현상이다. 주로 조선대 조소과 출신들이 유학을 많이 떠나는데 가령 정회만이 이탈리아 카라라(`88~94), 김용은 미국(`91~94), 박상호는 러시아 체류활동(`92~93)을 마치고 돌아왔고, `95년 8월 현재 정성용(`92~, 이탈리아 카라라) 오현화(`92~, 독일) 손봉채(`93~ , 미국), 김옥경 나명규 방우송 위성구(`94~ , 미국), 김주호(`95~ , 일본) 주미희(`95~카라라) 김완(`95~ , 미국) 등이 외국유학을 떠났다.



    신인 등용문을 표방한 공모전의 신설

    꾸준한 미술인구의 증가와 활동무대의 확장 속에서 새로운 공모전들의 개설은 그만큼 신진들이 등단과 경력을 쌓을 수 있는 기회를 넓혀주게 된다. `85년 21회 째부터 `95년 31회까지 10여 년간 [도전]의 조각부문 주요내역을 보면 조의현 박상호 박광구 배현 장민석 김기범 이이남 이병선 등이 대상(최우수상)을, 민형기 전범수는 두 번씩 우수상을 받기도 하였다. 신진들의 등단 속에 `88년 김대길 김형준 김홍곤을 비롯하여 조의현(93) 김성식(94) 등 청년작가들이 심사에 참여하면서 세대변화를 나타나기도 하였다. [대한민국미술대전]에서는 `85년 이후 4회 째부터 엄태정 김행신(85) 김영중(88)이 심사에 참여하고, 김형준 김대길의 특선과(85) 배현 김홍곤 김성식 나상국 김지연 등이 여러 차례 입선경력을 쌓기도 한다.

    그 동안 전통적인 권위 속에 작가 등용문으로 자리한 [도전]이나 [국전] 등과 함께 이시기 새로 공모전들이 개설되기도 한다. `85년 10월 전남지역개발협의회와 한국문화예술단체총연합, 한국방송공사 등이 공동주최하고 예총 전남지부 주관으로 [전국무등미술대전]이 첫 회를 시작하였다. ‘예향으로서 자긍심 제고와 지방미술문화의 향상발전, 미술인의 창작의욕고취, 신인미술인 등용문, 지역안정 및 화합 등의 목적’으로 5회부터는 광주전남지역개발협의회(후에 광주전남21세기발전협의회) 단독주최로 매년 행사를 갖게 되었다.

    기존의 [도전]이 심사위원 일반공모자 등 전반적인 운영면에서 지역중심 행사라면, 심사위원부터 서울 등지에서 주로 초빙하여 지방행사의 지협성을 탈피하고자 하였으나 기본 틀과 운영방식은 이전의 공모전형식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았다. 이 지역 출신 가운데 심사위원은 김영중(1,3,5,7) 엄태정(2) 박병희(6,10) 문옥자(7) 김행신 정윤태(8) 고정수 김철수(9) 등이 참여하였고, 대상(국무총리상)에 배현(1) 송경훈(7) 나명규(8) 정연하(9) 임동희(10)를 비롯 부문우수상의 김성식(2) 최규철(3) 정숙경(6) 김기범(9) 등의 입상자들을 배출하였다.

    이어 `88년 광주직할시 주최 [광주직할시미술대전]이 문을 열게됨으로써 같은 지역권내 비슷한 체제의 미술공모전이 네 개로 늘어나게 되었다. 이 [시전]은 첫 회부터 문옥자 김철수 김행신 김대길 등이 초대작가로, 김형준 윤영월 정윤태 김홍곤 김성식 조의현 최규철 등이 추천작가로 선정되었다. 그리고 심사에는 `95년까지 김행신 6회, 문옥자 5회, 정윤태 4회, 김철수와 전뢰진이 각각 2회, 최규철 김인경 박상호 박양선 등이 1회씩 참여하였다. 주요 입상자는 최만길 박상호 김용우 박민광 임명혁 나종록 김용준 등이 대상을, 정숙경 정연하 박정용 임명혁 윤선종 이이남(2회) 등이 최우수 또는 우수상, 정춘표 나상국 조솔 등이 3회씩, 김지연 김상옥이 2회씩의 특선을 받았다. 심사위원은 물론이고 초대ㆍ추천 그리고 출품자들 대부분이 4개의 공모전에 동시 참여함으로써 기성작가는 물론 아마츄어나 입문자들이 문호는 넓어졌지만 주최만 다를 뿐 방향이나 성격에서 별 차별성을 갖지 못하고 더구나 극히 일부 작품 외에는 이미 정형화된 공모전 양식을 더욱 고착시키는 구태를 반복하고 있다.



    사실정신과 새로운 형상성의 탐구

    전성기를 맞아 매우 활발해진 `80년대 후반부터 지역 조각계의 가장 두드러진 현상은 발표회수 급증 뿐 아니라 표현형식 재료 소재 주제의식 전시방법 모든 면에서 지금까지와는 다른 새로운 탐구들이 많아진다는 점이다. 물론 중견작가로 입지를 굳힌 선배들의 경우에도 각자의 양식들이 뚜렷해지고 있는데, 대부분 초기의 인체탐구의 전형에서 벗어나 주관적 재해석과 유기적인 구성연출을 결합하여 조형상의 완결미와 함께 자연본성, 가족애, 염원 등을 서정적 의미로 담아내는 작업들이 주류였다.

    그러나 무엇보다 뚜렷한 변화는 현실적 구체성과 삶의 실체와 정서에 주목하기 시작한 젊은 세대의 등장이다. 국내 `80년대 미술의 전반적 기류였던 민족민중미술운동의 확산과 함께 시대의식을 분명히 하며 당대 사회환경과 현실 제반문제에 정면 대응하려는 현실주의 참여미술이 그 두드러진 예다. 홍순모는 서구 조각형식과는 다른 토속적 조형미를 살려 작달막한 키와 움츠린 자세, 삶의 고단함이 배인 표정, 까칠거리는 표면질감과 흑갈색 처리로 도회지 소시민의 초상을 되비추어 내면서 독자적인 세계를 구축해 가고 있었다. 물론 그는 이미 `85년 첫 개인전(11월, 한강미술관) 무렵부터 ‘우리시대 초상’ ‘인간시대’ ‘문제작가전’ 등 여러 전시를 통해 주목을 받고 있던 터였다. 그의 작품들은 일반대중들에게 짙은 연민과 동류의식을 불러일으키는 친화력을 보이면서도 직설적 시사성이나 선전 선동성 현장미술과는 성격이 다른 것이었다.

    회화 쪽에 비하면 늦었지만 `80년대 말에 이르러 오월의 체험과 일련의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응축된 청년세대의 저항과 분노를 비판적 주제의식으로 담아내는 조각작품들이 늘어갔다. 나상옥은 [광주전남미술인공동체](약칭 광미공, `88.10.29창립) 참여와 개인전 [오월의 사람들](`89. 6월, 화니미술관)을 통해 발표한 연작형식 작품들로 이 문제를 본격 형상화하기 시작하였다. 곧 이어 `90년 3월 김명조 김선자 나상옥 박미용 최광순 박미경 이기원 정순남 등이 광미공 산하 조직으로 [오월조각패]를 결성하여 5.18 10주기를 기념하는 [십일간의 항쟁, 십년간의 역사전](`90. 5월, 금남로 거리전)에 참여함으로써 이른바 오월조각의 장을 열어 나갔다. 같은 해 전남대 광주대 교정에 제작된 <5월에서 승리로>(전남대 미술교육학과 4학년생들)과 <광주시민상>(조소패 흙) 등도 이러한 흐름과 맥을 같이 한 것들이다.

    특히 [오월조각패]는 확대되는 회원들의 활동으로 다음 해 광미공 오월정기전인 [오월에 본 미국전](`91.5월, 망월동 오월묘역 현장) 때, 조소분과 공동작업에 의한 <5월에서 통일로> 연작부조 발표와, 이어 가을 정기전인 [‘일하는 사람들’전], `92년 3월 조각패 첫 발표전인 [‘그 싹은 열매되어’전]을 광주와 서울에서 가짐으로써 광주청년조각의 현재를 새롭게 선보였다. 이들의 매년 [오월전]과 정기발표전 참여, 더불어 [광주민족민중미술운동연합](약칭 광미련, `91.2.28창립)의 김희상 천현노 등의 `92년 2월 [‘민중 삶 투쟁’전] 참여 등 전통조각의 피상적 관념미에서 벗어나 비판적 사실정신의 작업들이 꾸준히 진행되어 갔다. 이들의 현실주의 조각 또한 일부에서는 특정주제와 소재의 반복으로 또 다른 정형을 낳기도 한다.

    한편으로 냉철한 현실주의와 다른 성향으로 삶의 모습을 담거나 조각 본래의 입체조형성을 적극 탐구하기도 하고, 때로는 회화적 형식이나 문학적 서술성을 곁들이는 작품들도 늘어간다. 특히 이전의 ‘누드’ 일변도에서 벗어나 일상 속 삶의 모습과 주변 이야기들을 소재 삼거나 주관적인 형태해석으로 개성 있는 인물상들을 모색해 나가기도 한다. 김홍곤의 <정류장(도시에서)>(84), 민형기의 <오후>(87) 처럼 평면부조와 배경물을 결합한 일상의 이야기, 김창세(한국인의 초상) 조의현(배불뚝이) 김홍곤(투박한 농군상) 김지연(반복나열된 소조군상) 등의 독특한 인물상들과, 최민수(제의 주술 금줄, `91~) 김상범(연鳶, `92~) 박광구(장승과 노인, `92~) 등 전통의 재해석에 바탕을 둔 연작, 김성식 전범수 나상국 송경훈 등의 추상형식과 박상호 최만길의 반추상조각, 마영진 김용우의 테라코타상 등 각자 독자적인 세계를 모색해 나가고 있다.

    이러한 조각계의 변화 속에 ’88년 김인경 신현중의 조선대 조소과 교수 합류로 지역 조각계에 조형형식과 형상언어, 소재에 대한 인식의 새롭게 전환되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특히 ’90년대 들어 철, 천, 종이, 네온피스, 폐기물 같은 재료의 확대와 설치형식의 등장까지 그 동안의 조각이라는 개념과 상반된 조형실험들이 급증하게 되었다. 그러나 뚜렷한 조형의식과 방향설정이 부족한 상태에서 단지 유행을 뒤쫓는 경우가 없지 않은데 일천한 지역 현대조각의 역사나 인적 기반에서 비롯된 문제라고도 보여진다.

    아울러 이전의 여체누드 대신 일상 소시민들의 모습을 토속성을 살려 독자적 해석으로 변용시켜내거나, 무대소품 같은 배경구성들로 문학적 서술성을 살리기도 하고, 표현재료에 구애됨 없이 입체조형의 공간구성미를 탐구해낸 경우까지 커다란 변화 폭을 보이고 있다. 그러한 예술개념과 조형성의 확장은 전공 소재 형식에 관계없이 펼쳐져 [제3회 광주현대미술제-‘자연+입체’전](`85,3. 광주박물관 앞)이나 [제9회 탈-이미지](`94,3. 무등) 등에서 설치형식으로 적극 시도된 바 있다. 나아가 날로 증대되는 변혁의지와 각 개인의 창작역량들을 한데로 모아 새로운 청년세대문화를 정립하기 위한 결집체로 `93년부터 광주전남 20대후반-30대 젊은 작가들의 대동 한마당으로 추진된 [광주미술제](`93,8. 시내일원 전시공간)도 이러한 풍토변화의 한 모색일 것이다.

    아울러 1%법이라 통용되는 건축조례 시행으로 도시 곳곳 대형 건물 앞에 환경조형물들이 설치되는 것도 이 시기 두드러진 현상 가운데 하나다. 가령 `95년까지 조성된 50여 점 가운데 `87년 이후 일년에 한 두 점 선보이던 정도에서 `92년에는 10점, `91년과 `93년에는 각각 6점씩이 조성될 정도로 크게 늘어난다. 이 건축물 앞 조형물들은 일상 도회지 삶 가운데서 불특정 대중을 향한 미술의 접근이나 딱딱한 건물에 유기적 조형미를 곁들이는 효과를 가져 온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주변 공간과의 조화는 물론이고 건물 표정을 가꾸고 거리에 문화적 활력을 불어넣는데는 역부족이고, 마치 공사수주와도 같은 이 환경조형물 작업을 둘러싸고 동료간 선후배간 갈등이 파생되기도 한다.



    서정성 위주에서 조형성과 현실의 접목으로

    근ㆍ현대성에 대한 분명한 개념정립과 조형형식이나 매체ㆍ공간에 대한 기본 인식조차 다져지지 않은 상태에서 단지 물리적 형상을 빚어내는 기술적 표현방법의 도입과 소재ㆍ양식에 국한되어 온 것이 남도조각의 큰 흐름이다. 그리고 개별 활동들로 분산된 채 수업과정과 공모전의 전형이 반복되거나 전통적인 제작방식을 답습하는 경우들이 많았다. 물론 `70년대 말에 이르러 각자의 고유감성이나 주관성들이 반영되기 시작하고, 점차 늘어가는 인적자원과 함께 단체결성 등 새로운 활로를 찾는 모습들도 보인다. 기본 틀이 정해진 공모전, 현실적 부담을 감내해야 하는 개인전만이 아닌 순수 창작발표무대로서 소통창구를 갖게 된 것이다.

    무르익어 가는 여건 속에 `80년대 들어서는 인적 증가와 다양해지는 활동 폭, 개성 있는 조형세계의 구축과 신세대들의 구체적 현실대응, 신감각 형식의 창출 등 점차적인 풍토변화가 이루어져 왔다. 그리고 이른바 ‘남도조각’이라 하는 지역 양식도 `70년대 말 `80년대 전반 무렵에 유형화가 뚜렷해진 셈이다. 주로 여체상을 소재로 생명의 모태ㆍ풍요ㆍ향수 등 전통 농본사회인 남도의 자연주의 토착정서에 뿌리를 두면서 현대인들의 순수생명 또는 정신적 고향에 대한 회귀본능을 담아내는 경우들이 많아진다.

    물론 세대마다 성향은 약간씩 달라 현재 남도조각계에서 실질적 중추를 이루고 있는 50대 전반에서 40대까지 선배세대에서는 지나친 주관적 변형이나 인위적 흔적을 삼가하며 자연감성을 드러내는 부드러운 서정성이 두드러진다. 그 제자들인 30대 중ㆍ후반 청년세대들의 경우는 비슷한 소재와 수법을 이어받되 훨씬 대담하면서 개성을 살린 다양한 인물상 또는 반자연주의 현대문명을 비판 풍자하거나 전통조형소재를 재해석하는 작업들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이들 역시 주로 내적 생명력과 순수자연본성을 근본으로 삼기는 마찬가지이다.

    아울러 대개 `80년대 후반에 등단한 30대 초에서 20대 후반 신진세대에게서는 훨씬 자유로운 소재와 형식탈피를 기본으로 생활주변의 오브제나 매체의 확대 도입은 물론 설치형식으로 조형의 개념에 대한 확장을 시도하는 등 과도기 현상들이 나타나고 있다. 이들 청년세대 가운데는 `80년대 말부터 지역문화 역사의 큰 흐름인 의기(義氣)를 구체적으로 형상화하여 시대의 난맥상이나 현실 삶의 질곡에 정면 대응하는 사실조각형식을 취하는 등 앞 세대와의 차별성이 두드러지는 것도 큰 특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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