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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미술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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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러져 이 땅의 넋이 된 선사인의 삶과 문화


    생존방식으로서 문화

    요즘에도 이 따금 각지에서 발굴 출토되고 있는 구석기유적들, 이를테면 곡성군 입면이나 옥과지역, 승주 곡천지구, 주암댐 수몰지역, 근래 광주첨단과학산업단지일대 유적 등은 이미 녹아 스러진 혼백들의 넋이라 할 수 있다. 그 것들은 이 땅과 우리네 생명이 결코 껍데기만 겉도는 뜨네기 문화가 아닌 참으로 길고도 깊은 혈맥을 이어온 것이란 걸 깨닫게 한다.

    사실 우리 구석기 유물들은 돌을 다듬어 만든 것들이 대부분이고, 박물관 유리관 속에 정성스럽게 모셔진 구석기 유물들은 눈으로 보기에는 도무지 싱겁기 짝이 없다. 어디 밭고랑이나 산비탈에서 발에 걸려 채이는 막돌하고 별로 다를 것도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주먹도끼?찌르개?자르개라는 이름을 받긴 했지만 조형예술 차원의 인위적 가공이 적극적인 단계는 아니다. 다만 이들 구석기시대 유물에서 인류의 문화 또는 조형예술의 기원이 원초적 삶이나 생존방식과 깊게 관계되고 있다는 것만큼은 분명하다.



    쓰임새와 멋스러움의 조화

    갈아만든 돌칼 · 돌도끼 · 화살촉들은 돌 속에 숨어있는 석질의 무늬를 절묘하게 살려 내 대칭형 모양을 만들어내는 가공솜씨부터와 짜임새 있는 형태미에서 절로 감탄을 불러일으킨다. 그것은 인간 본능 속에 자리한 미의식과 조형감각을 적극적으로 표현해낸 인위적 가공물로서 쓰임새와 창의성, 미적 정감을 조화시킨 명품들임에 틀림없다.
    이 신석기 유적들은 앞에 든 구석기 유적의 윗 층에 함께 복합문화군을 이루고 있는 경우들 뿐 아니라 장성 석마리, 영암 장천리, 함평 구산리, 돌산 송도 등 그 자취가 훨씬 넓게 분포되어 있다.

    이와 함께 신석기시대에는 커다란 바윗돌을 이용한 석조유적들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승주 고인돌공원과 채석장 흔적까지 남아 있는 화순 춘양면 등 남도 어디를 떼를 이루고 있다. 이 자연석을 이용한 소박한 인공축조물들은 건축의 시원으로서 뿐 아니라 원시공동체의 상징물로서 결코 소홀히 할 수 없는 것들이다. 또 들녁이나 마을 어귀 곳곳에서 역시 마을공동체 의식을 담은 큼직한 선돌들이 있다. 인위적으로 세워놓은 조형건조물로서 단순한 경계표시를 넘어 신이 머무는 이른바 강신(降神)의 몸체라 할 수 있다. 비로소 한곳에 머물러 살게 되는 농경시대의 새로운 사회체제 속에서 집단화되어 가는 자연숭배의식의 예이다. 신과 만나고 소망을 기원하던 매개체였던 셈이다.

    이러한 새로운 문명사적 변동기를 대표하는 문화유산으로 흙으로 빚어 구운 토기를 들 수 있다. 쓰기 좋고 멋진- 조형적 창의성에서 눈에 띄게 달라진 예다. 이 시기 토기들은 삶을 보다 멀리 넓게 바라보게 된 선사인들의 저장문화 또는 운반방식과도 관계되는 것으로 밑이 뾰족한 팽이모양이 많으면서 표면에 가느다란 직선을 잇대어 긋거나(빗살무늬 토기) 돋을새김무늬(돌산 송도출토품처럼)를 남기고 있다. 비록 태토의 질은 거칠고 무르지만 적당한 비례나 깔끔하고도 부드러운 선의 흐름, 표면무늬 구성에서 공간 변화 같은 미적 감각은 독특한 멋을 지니고 있다.



    문명의 혁신-청동기 유물

    문화변동사에서 청동기의 개발은 자연에 의존하면서 수동적인 삶에 익숙해져 있던 고대인들에게 혁명에 가까운 것이었다. 금속가공 사용은 중국은 기원전 1500년경, 한국은 기원전 800년 무렵부터로 본다. 중국의 것이 대개 그릇종류이면서 입체적인 돋을무늬들로 채워지고 있다면, 우리는 짧고 가느다란 선들을 반복시키며 일정한 무늬띠를 이룬다. 전쟁무기나 권력 상징물과 함께 의기들이 많은 것은 훨씬 복잡해진 사회상의 반영이자 보이지 않는 절대존재에 대한 경외감이 집단적 무의식으로 더욱 확산되어 가고 있는 증표들이다.

    함평 초포리, 화순 대곡리 유적을 비롯하여 여천 적량동과 오림동 · 봉계동 · 평려동, 승주 우산리, 보성 덕치리와 봉능리 등 많은 지역의 고인돌(支石墓)에서 석기와 함께 출토되는 이 시기 청동유물들은 금속기 특유의 훨씬 섬세한 조형성과 무늬들을 보여 준다. 그 대부분은 사냥?어로용 같은 일상용품들 못지 않게 이 시기 들어 더 의례로 고착된 풍요다산기원 또는 자연신 숭배의식에 소용되는 무구류(巫具類) 아니면 제사의식의 의기(儀器)들이다.

    특히 치밀한 기하학적 밀집선 무늬로 채워진 구리거울들은 빛을 담는 성스러운 물건(聖物)이라 여겨 귀한 사람이 몸에 지니거나 죽은 이의 다음 세상의 평안을 기원하며 무덤 속에 넣어주는 명기(冥器)로 쓰였다.

    청동기시대 토기들은 대부분 무늬가 없는 토기로 바뀐다. 영암 장천리의 것처럼 밑부분을 납작하게 하여 어디에든 놓기 좋게 하고 주둥이도 좁혀 엎질러지지 않게 형태를 변화시켰는데 내륙 깊숙이 들어와 살게되면서 농사가 주업이 된 생활양식의 변화를 반영하는 것이다. 또 승주 구산리 것처럼 단단하게 빚고 정성껏 문질러 광을 낸 붉은단지(紅陶)나 그을음을 입힌 검은그릇(黑陶)들도 이 시기의 특별한 유물들이다.

    그밖에도 여천 평려동?봉계동 등지에서 발굴된 옥(玉)을 구슬이나 짧은 대롱모양으로 깎아 꿰어만든 목걸이와 곡옥(曲玉), 돌산 송도와 해남 군곡리 유적들에서 발견된 소라나 조개껍데기 같은 패각(貝殼)을 이용한 장신구도 흥미 있는 장식물들이다. 특별한 지위의 신분이나 권위를 나타내는 치장물들이다. 사실 선사시대 여러 생활도구와 특수용품들은 실용성이나 미적 가치 어느 쪽이든 현재 우리 삶의 근원이자 미술본래의 뿌리를 생각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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