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전통문화를 얘기하다 보면 불교를 빼놓을 수 없다. 그것은 발원부터가 그렇지만 서역을 거쳐 중국으로 건너오면서 동양의 보편적 세계관인 범신론과 자연주의 노장사상이 서로 만나 그 닮은 사유방식과 인식체계로 쉽게 섞여지고 시간이 흐를수록 토착 전통문화의 한 갈래로 자리잡아 왔다. 외래문화이긴 하지만 중국이라는 여과장치를 거쳐 들어와 전통문화 속에 스며들면서 오랜 세월동안 일상 삶과 함께 해 오는 동안 이미 외래종교라고 굳이 구분 지을 만한 요소가 거의 사라진 셈이다. 특히 광주 전남지역은 본래의 민족정서와 전통의식이 뿌리깊은 만큼 불교가 들어온 흔적은 뒤늦게 나타나면서도 토속신앙 속에 훨씬 깊이 녹아들어 있는 예들을 보게 된다.
이 지역에 불교가 전래된 시기에 대하여 사료로서는 믿을만한 것이 못된다 하더라도 여러 사찰에서 보전해 온 사적기나 관련 기록들을 참고해 볼 수 있다. 이 가운데 가장 이른 예로써 인도에서 온 마라난타(摩羅難陀)라는 승려가 중국 남조 때 진(晋)나라를 거쳐 영광 법성포로 들어와 384년 불갑사(佛甲寺)와 나주 불회사(佛會寺)를 세웠다고 전한다. 이어 해남의 대둔사(대흥사)를 426년 정관존자(淨觀尊者)가 만일암(挽日庵)이라는 이름으로 처음 세우고 아도화상(阿度和尙)이 514년 다시 세웠다고도 하는데, 그 아도화상은 지금의 승주 선암사인 청량산 해천사(淸凉山 海川寺)를 열었다고도 한다. 또 구례 화엄사를 처음 열었다고 하는 연기조사(緣起祖師)는 백제 법왕(法王, 599~600) 또는 후기신라 경덕왕(景德王, 742~765) 때의 인물로 다르게 기록되어 있기도 하고, 신라의 원효(元曉,617~686)가 광주 원효사와 곡성 도림사, 나주 심향사(尋香寺, 처음 이름은 미륵원), 여천 향일암(向日庵, 처음에는 圓通庵) 등을 세웠다는 얘기도 빠른 예에 속한다.
시기로 보면 삼국시대 앞인 마한소국이나 백제시대에 이 지역에 불교가 처음 들어왔다는 얘긴데 그렇지만 이를 뒷받침할 구체적인 물적 자료는 아직 나타나지 않고 있다. 현재 알려진 유형문화재들로 보아도 후기신라 말의 몇 가지가 이른 흔적들이고 본격적인 것은 고려시대로 들어서면서부터다. 어찌 보면 외래종교인 불교가 독자적인 입지를 쉬이 세우지 못할 만큼 이 지역 토착문화가 강했기 때문은 아닌지 하는 생각도 든다.
정신적 이상미를 상징하면서도 세간사람들이 부처라는 경배대상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도록 빚어 놓은 것이 불상이다. 손 모양이나 들고 있는 지물, 자세 등에 따라 아미타ㆍ석가ㆍ비로사나ㆍ약사ㆍ미륵 등으로 나누어지고 옆에 서는 보살들도 저마다 다른 이름과 역할을 갖고 있다. 그러나 불교가 이 지역에 처음 들어왔을 때에는 이미 본래의 정통도상(32길상 80종호-相好)에서 많이 벗어나 있고 또 굳이 그 형식에 연연하지 않은 예들을 볼 수 있는데 전파과정이나 토착화 과정에서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이 지역 출토 불상 가운데 연대가 가장 올라가는 원효사 발굴 아미타여래청동불상(현재 광주박물관 보존)과 운주사 출토 청동불상이 있다. 겉모습은 비록 손바닥길이도 안된 작은 호신불이지만 기본 도상이나 옷주름 모양은 후기신라 말의 형식이며, 도톰한 눈ㆍ코와 얼굴ㆍ손 등에서 백제양식의 흔적, 특히 남도인의 후덕스러움을 느낄 수 있다. 또 무등산 약사암 돌부처는 높직한 팔각기둥 위 활짝 핀 연꽃받침에 가부좌(結跏趺坐)를 틀고 앉아 은근한 미소를 띠고 있다. 오른손은 항마촉지인이고 왼손은 손바닥을 위로 향하고 있다. 이 불상은 석굴암 본존을 전형으로 삼으면서 경주 남산의 삼릉계 석불(현재 중앙박물관)이나 미륵골 석불, 합천 청량사, 의성 고운사, 영주 부석사 석불들로 묶어지는 후기신라말 일반양식을 따르고 있다. 이 돌부처는 약사암을 처음 열었다고 전하는 철감선사 도윤(澈鑑禪師 道允, 증심사와 화순 쌍봉사의 개산조)의 창건연대와 연결시켜 9세기 중엽으로, 또는 이 시기의 양식을 따르되 형식화된 부분의 변화를 들어 고려시대 것으로 미루어 짐작하기도 한다. 한편, 신라 말 고려 초인 9~10세기 격동기에 파격적인 새로운 부처의 모습이 등장한다. 바로 지혜와 광명의 부처- 대일여래(大日如來)라고도 하는 비로사나불이 철불로 여러 곳에서 조성된 것이다. 경주 귀족사회를 중심으로 한 화엄종이나 미타신앙 중심과 달리 정치권의 비주류와 신흥 육두품 출신, 호족, 지방민 같은 소외된 사람들 사이에 급속하게 퍼져나가던 선종(禪宗)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데 사회변동기이자 정신사적 전환기를 반증하는 예들이다. 이 가운데 조성연대도 가장 빠르고 대표적 형식을 취하고 있는 예가 장흥 보림사의 철조 비로사나불이다. 정신적 이상미를 추구하여 간결 우아한 선들로 다듬어지던 고전적 석굴암양식과는 전혀 다르다. 왼쪽 팔 뒤의 명문으로 보아 신라 말(858년)에 만들었음을 알 수 있는데, 앉은키가 3m에 가까운 위압적 분위기에 신체의 고전적 비례미는 깨지고 눈꼬리는 가늘고 길면서 평평한 콧등은 각이 져 있어 전체적으로 날카롭고 강건한 느낌을 준다. 뿐만 아니라 옷주름선의 흐름들에서 쇠붙이의 딱딱함과 함께 주물 틀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는 투박한 불상이다. 왼손 검지를 오른손으로 감싸 쥔 지권인(智拳印)의 모습으로 이 시기 선종사찰들에 새로 봉안되기 시작한 비로사나불의 이른 예이기도 해서 더욱 주목을 끈다. 이와 달리 원래 전남도청 부근에 있던 대황사(大皇寺)에서 옮겨진 것으로 전해지는 무등산 증심사의 비로사나불은 같은 9세기의 지권인 철불상이지만 과도한 힘보다는 훨씬 아담하고 부드러운 형태로 전통양식을 따른 편이다. 앉은 키 90cm 남짓에 손 모양도 경주 불국사 비로사나불처럼 왼손으로 오른손 검지를 감싼 모습이며 양 어깨부터 덮어 내리는 옷주름도 훨씬 간략하다. 자세나 표정에서 보림사의 응축된 힘이나 경주의 당당한 이상미와는 다른 소박함과 평온함을 보여준다.
신라 말 고려시대의 또 다른 현상은 거대한 돌부처들, 특히 높은 암벽이나 바윗돌에 새기는 마애불의 등장으로 지역별로 양식의 차이가 보인다. 나주 봉황 철천리, 영암 도갑사, 곡성 석곡, 순천 낙안동, 승주 창촌리, 보성 반석리, 함평 해보리, 무안 약사사, 장흥 안양면, 구례 대전리ㆍ사도리, 고흥 학계리 등의 돌부처들, 그리고 영암 월출산, 보성 유신리, 해남 대둔사 북암, 광주 운천사, 진도 금골산, 승주 선암사의 마애불 등인데, 전통양식에 충실하려는 쪽과, 기본만 어렴풋이 따르고 있는 경우 등 겉모양은 조금씩 다르지만 이미 깊숙이 토착화되어 가는 불교문화의 흔적을 볼 수 있다. 나주 봉황농공단지 너머 철천리(현재 미륵사) 낮으막한 야산 위 돌부처는 두툼하면서도 정성스런 조각수법과 배 모양의 뒷광배까지 제 모습을 갖춘, 어른 키 두 배가 넘는 큼직한 불상이다. 비록 오른손모양이 아미타의 시무외인(施無畏印-손바닥을 펴 맞이하는 모습)을 거꾸로 뒤집어 놓은 어색한 모양이지만 전체적으로는 신라이래 정통양식을 따르고 있다. 넓직하고 원만한 상호, 넉넉한 체구, 섬세하면서도 번잡스럽지 않은 광배의 불꽃무늬까지 설령 조성주체가 당시 지방 유력자였다 해도 근본은 나주 평야를 바탕으로 형성된 지역감성이 반영된 것이라 하겠다. 또 월출산 구정봉 정상 조금아래 절벽에 8.6m 크기로 조성된 마애여래좌상(국보 144호)이 있다. 감실처럼 불상의 바깥을 파들어 가며 다리부분까지 전체를 고루 도드라지게 새기고 있다. 아래 예불자의 위치에서 편안하게 올려다 볼 수 있도록 윗 부분을 키운 신체비례, 위엄 속에서도 깊은 자비심과 덕성이 우러나오는 얼굴모습, 부드러운 연꽃잎과 화염무늬로 채워진 광배의 섬세화려하면서도 우아한 조각수법은 고려초 마애불상을 대표할만 하다. 오른쪽 무릎 옆에는 작게 새겨진 공양자가 있다. 너른 골짜기를 품듯 둘러선 준봉들과 함께 마애불 바로 옆 용암사 터와 정면 작은 봉우리에 각각 세워진 삼층석탑의 호위를 받으며 멀리 영산강 하류가 만나는 서해를 굽어보고 앉아 뱃길의 무사풍성을 돌봐 주었을 부처다. 그러나 남도인의 감성을 대변하는 토속적 부처의 세계는 역시 화순 운주사(雲住寺), 이른바 천불동의 돌부처들을 으뜸으로 꼽을 수 있다. 길지만 그리 넓지 않은 골짜기와 야트막한 양쪽 산자락을 타고 상생과 평등, 어우러짐의 세상이 천불천탑들로 펼쳐져 있다. 허틀게 쪼아 만들어진 서로 닮은 모습으로 옹기종기 모여 선 거칠고 투박한 돌조각들이 부처와 무지랭이, 도솔천과 이 승의 분별을 넘어 억겁의 적요 속에 잠겨 있다. 과거 현재 미래의 삼천불 가운데 이 땅에 몸을 빌어 대동세상을 이룬 천불들은 현세구복과 극락왕생 아니면 용화세계의 꿈을 꾸다 몸을 바꿔 환생한 민초들의 모습이다. 중생제도를 위해 내려온 부처가 아닌 신심을 다한 이 승의 희노애락 삶 끝에 부처가 된 무지랭이들의 모습인 것이다. 특히 현세구복의 기원처로 골짜기 한 가운데 돌법당 안에 앞뒤로 등을 대고 앉은 한 쌍의 돌부처와, 내세의 꿈을 담고 산등성이에 거꾸로 누워 있는 거대한 와불(臥佛)이 골짜기 위ㆍ아래로 세간과 출세간의 중심을 이룬다. 옆 산등성이 와불은 13m에 이르는 크기와 머리를 산 아래 쪽으로 둔 특이한 자세 때문에 이곳 운주사의 상징물처럼 여겨지고 있다. 그런 별난 모습이 갖가지 상상을 불러일으키고 그럴듯한 의미들을 더하면서 오랜 시간 여러 전설을 만들어 왔다. 흔히 와불이라 하지만 큰 부처는 가슴 앞에 두 손을 모으고 가부좌를 틀고 앉은 모습이고, 왼쪽에는 작은 부처상이 붙어 서 있으며, 오른쪽에는 불상을 털어 낸 흔적이 뚜렷한데 그 크기와 똑같은 부처상이 바로 옆에 서있어 본래 삼존불상을 만들려던 것으로 보인다. 처음부터 와불을 의도한 것은 아니어서 옆으로 누운 열반상도 아니고 다리모양도 앉은 자세이다. 또 와불에서 조금 떨어진 산비탈의 칠성바위는 천상과 현세사이 시공간이 하나로 열려있는 신비스런 성소가 아닐 수 없다. 오랜 세월 동안 이 부처의 세계에 마음을 붙여 현세 삶을 엮었을 무지랭이들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지고 모셔져 왔는지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다. 어쩌면 몇 줄의 기록에 매이지 않는 점이 더 많은 신비감과 상상의 여지를 남겨 놓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사람의 발길이 잦아진지 십 수년이 지난 지금 돌법당을 내려다보는 큼직한 절집과 개량식 요사채가 들어앉고, 부처들과 벗이 되어 생을 일구던 밭뙈기 대신 기념공간 잔디밭과 철책들만이 시공간을 가르는 울타리로 둘러쳐져 있다.
장엄하게 또는 경건하게 불교문화를 가꾸어 온 법당과 석탑, 부도(사리탑), 그 부도의 조성내력을 떠받들고 있는 거북받침돌과 용트림머릿돌, 불화, 석등, 불교공예품에 이르기까지 많은 불교미술품들이 있다. 특히 석탑은 후기신라 말부터 구례 화엄사, 장흥 보림사, 광주 구동과 지산동 등 곳곳에 세워지기 시작한 신라양식의 탑들, 담양읍 오층석탑과 해남 대둔사 북암 등의 고려탑들, 그런 가운데서도 백제탑의 맥을 잇고 있는 월출산 월남사터 삼층석탑 등이 있다. 불교 석조물 가운데 신앙의 의미나 조형성, 세부 조각에서 독특한 가치를 지닌 것이 부도(浮屠)다. 그 대표적인 것이 철감선사 도윤의 부도로 화순 이양면 증리 쌍봉사에 있다. 절 뒤 산자락에 호젓하게 앉아 있는 이 부도는 선종 초기인 신라 말 868년경에 세워진 것으로 지붕돌 일부가 깨지고 상륜부가 없어졌지만 우아한 팔각원당의 초기 고전양식을 대표하는 걸작이다. 2m쯤의 아담한 키에 사바세계와 천상계를 구분 짓는 구름 띠, 물고기를 입에 문 사자들, 악기를 연주하는 극락조(가릉빈가)들이 층을 이루고, 활짝 떠받든 연꽃송이 위로 목조건물을 섬세하게 재현해 올려놓은 팔각 몸 돌은 배흘림 기둥 등 목조건축을 재현한 극락세계로 앞 뒤 문과 열쇠고리, 양편의 사천왕상, 비천상들이 적당한 살붙임과 부드러운 옷자락, 도드라진 새김질로 둘러져 있다. 그 위로 막새기와 골과 연꽃무늬 와당 등 기와지붕 모양까지 선의 흐름과 불교도상들이 시공간은 물론이고 극락과 현세간의 경계마저 잊게 한다. 또 부도 옆에는 비신은 잃었지만 당당한 자세로 버티고 선 거북돌도 그 균형 잡힌 비례에 당찬 표정과 힘있게 앞으로 나아가려는 오른발의 역동감이 어느 귀부와도 비교할 수 없이 빼어난 조형미를 보여준다. 구례 연곡사, 곡성 태안사 것과 비슷한 시기에 같은 양식이지만 대개가 철감선사 사리탑 형식을 따른 것들이다. 선종 초기의 순수 신심과 선사에 대한 지극한 경배심으로 조성된 이 걸작은 신라말 고려초의 격변기 속에 세속권력의 정치적 이해까지 개입되면서 점차 내적 신앙심과 정성어린 조각은 형식화되어 굳어져 간다. 더구나 고려시기부터는 대개 크기만 커지거나 얼굴주변의 괴이한 꾸밈들로 위압감을 강조하기도 하고, 변형된 팔각당형 또는 비교적 단순한 종모양의 부도나 변형양식들로 대체되기도 하지만 아무튼 쌍봉사의 철감선사부도와 거북받침돌은 역사를 뛰어넘어 존재하는 귀중한 문화재다.
몇 가지 살펴 본 이런 예들 뿐 아니라 우리 주변에는 참으로 아름답고 소중한 불교문화재 미술품들이 그 동안의 숱한 망실 속에서도 적지 않게 남아 있다. 종교미술로서 정신성은 물론이고 조성주체와 시대배경 면에서 지금과는 같을 수 없지만 모두 이 땅에 터를 내리고 자연과 이웃과 당대사회와 더불어 진솔한 생을 일구다간 선대인들의 희노애락과 소망들이 절절이 묻어있는 그야말로 생생한 삶의 역사 자료들인 셈이다. 그러나 여전히 편협된 종교관념에 사로잡혀, 또 재화의 가치에 눈이 멀어 그 헤아릴 수 없는 넋과 수백 수천년의 역사가 한 순간에 파괴되고 뿌리 뽑히기도 한다. 진정한 뿌리를 외치는 한편에선 지역과 민족과 그 어떤 고유한 것이라도 세계화 국제주의의 허망한 미망에 매달려 지협적 소아주의쯤으로 잘라내려 애쓰는 문화의 갈등구조를 본다. 하지만 이 땅과 사람의 역사 속에서 뿌리내리고 피고 져 온 삶과 의식과 멋이 한데 어우러진 종교문화유산은 단순한 예배대상 이상으로 지금 우리에게는 시대인식의 거울이자 건실한 자존의 역사를 가다듬을 수 있는 바탕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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