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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미술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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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통신앙과 공동체문화, 민속조형물


    극락정토를 향한 절집의 건축미

    서구 전통미술의 중심은 신의 강림처 또는 그 예배소로서 성당건축이다. 우리 전통문화에서 중생 삶의 위안처이자 간절한 염원의 예배소이며 수행도량이기도 한 절집이 정신적 구심점이었던 것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목조건축물이었던 탓에 남아 있는 대부분은 임진란 이후 조선후기에 다시 세워지거나 크게 손을 본 곳이 대부분이다.

    크게 보면 연대가 올라갈수록 단정한 멋이 돋보이는데, 지붕옆선이 곧바른 맛배지붕이 고려시대까지 일반적이었던 오래된 양식이다. 그리고 조선시대로 넘어오면서 양 날개를 단 팔작지붕들로 바뀌어 가는데, 처마 끝을 슬쩍 올려 무게감을 덜면서 날렵하고도 은근한 곡선미를 넣거나, 기둥 위에만 오려지던 포작도 기둥사이 공간에까지 늘어나고 점점 겹침이 많아지며 외출목도 훨씬 곡선이 커지고 길어진다. 또 훨씬 섬세하고 화려해진 닷집과 우물천장, 들보의 용이나 극락조 같은 목조각들, 더 화려해지고 무늬 사이사이에 곡선띠가 늘어난 단청에서도 시대변화를 느낄 수 있다.

    이름 그대로 억지스러움이 없는 강진 성전의 무위사(無爲寺) 극락보전(조선 성종7년-1476, 국보13호)은 오래되고 좋은 예다. 기암준봉들이 현세천불처럼 연이어선 월출산의 천왕봉 구정봉을 뒤에 두르고 그 남쪽자락 구릉지에 자리한 절집이다. 원래 신라 원효대사가 관음사라는 이름으로 창건(617)하여 후에 갈옥사?모옥사로 불리다 조선초(명종10년, 1555)에 지금의 무위사로 바뀌었다 한다. 천왕문부터 극락보전까지 거의 평지상태에서 약간씩 계단을 이루는 배치부터가 편안하게 사바세계의 중생을 반긴다.

    낮으막한 축대 위에 간결한 맞배지붕의 극락보전은 영암 도갑사 해탈문(조선 성종4년, 1473, 국보50호)과 함께 흔치 않은 조선초기 건축물이면서 빼어난 걸작으로 뒤에 유행하는 팔짝지붕 집들과는 첫 미감부터가 다르다. 군더더기 없는 지붕옆선이 수직으로 내려오고 추녀나 용마루선도 거의 직선이지만 그래도 윗선 만은 은근슬쩍 끝을 올려 정중동의 시각적 변화를 주고 있다. 백제에 속했던 지역에서는 이 시기까지도 백제계 건축양식이 일부 이어지고 있는데, 충남 예산의 수덕사 대웅전(1308년), 순천 송광사의 국사전(1404년경 중창) 하사당(15세기 무렵)과 더불어 무위사 극락보전도 그 한 예다. 화순 쌍봉사의 철감선사 부도에서처럼 오랜 전통인 배흘림 기둥을 따르면서 장식이 거의 없는 포작을 기둥머리 위에 얹은 주심포계 양식이며, 법당 안쪽 천장 역시 꾸밈없는 서까래가 그대로 드러나고 천장 가운데 격자무늬 소란반자(중천정) 보개도 불단 바로 윗 부분만 우묵하게 들어가도록 꾸며 인위적 치장을 최대한 피하고 있다.



    자연 속에 묻힌 수행도량

    초기 단아한 양식에 비하면 후대로 갈수록 꾸밈부재들이 늘어가는데 특히 팔작지붕에 공간포 양식들이 많아지고 외출목도 3단 4단으로 겹쳐져 훨씬 화려해진다. 여천 흥국사 대웅전(1624), 구례 화엄사 대웅전(1649) 각황전(1702) 원통전(17세기무렵), 해남 미황사 대웅전(1754), 승주 선암사 각황전(1760), 영광 불갑사 대웅전(1764) 등 임진란 이후 다시 지어진 조선후기 건축물들 대부분의 특징이다.

    그 가운데 무위사와 대조적인 구례 화엄사는 높직한 석축과 거대한 석등 석탑들이 절 마당을 둘러싸듯 배치되어 있다. 특히 백제를 복속시킨 직후 전국 십찰경영(十刹經營)의 교지를 받은 의상이 신라 화엄신앙의 본산답게 공덕을 모아 완성시킨 화엄석경(문무왕17년, 677)을 남벽에 붙였었다는 각황전은 처음에 앞쪽 7칸, 옆 3칸, 3층의 장육전으로 천장 전체가 터진 법당에 16척 높이의 불상을 모셨었다 하니 그 장중함이 짐작된다. 그러나 임진란 때 불에 타 숙종 때 재건한 지금의 모습은 규모는 축소되면서 팔작지붕과 다포작으로 조선후기 양식으로 바뀌어 있다.

    크게 보아 조선시대 불교건축문화는 자연주의 미의식을 함께 따르고 있는데 건축적 짜임새는 물론이고 그 절집이 놓인 주변의 자연풍광들을 천연의 수행도량 배경으로 적절히 활용하고 있는 곳이 많다. 해남 땅끝 가까이 마치 108폭 병풍이라도 두른 듯 깍아 지른 준봉들이 연이어지는 달마산자락 중턱의 미황사는 신라 경덕왕 때(749) 처음 세워져 한 때는 20여 당우를 거느린 큰절이었다 한다. 그러나 정유재란 뒤 중수한 대웅전(1754)과 응진당 명부전 요사채들만이 남아있다가 최근 크게 불사를 일으키면서 번창해졌다. 나래를 활짝 편 팔작지붕 아래 탈색된 단청과 다포를 두고 그것도 세 겹씩의 출목에 또 하나의 새부리 모양을 더 얹은 포작들은 조선후기의 화려한 다른 예들과 비슷하다. 더불어 불당 안쪽으로 뻗은 내출목들에서는 큼직하게 잘 여문 자방을 감싼 연꽃봉우리들을 비롯하여 천장부 목조각의 구성미가 빼어나다(이러한 장식수법은 10년 뒤인 1764년경에 세워진 영광 불갑사 대웅전에서도 나타난다). 또 위아래를 슬쩍 좁혀 멋을 낸 기둥들과 두 겹씩의 연잎이 새겨진 투박한 주춧돌, 특히 앞쪽 주춧돌에는 거북과 게 같은 바닷가 미물까지 천연스럽게 올려져 있어 숲 속 부도전의 투박한 조각들과 함께 미황사를 더욱 정겹게 한다.



    그림으로 편쳐 보이는 부처의 세계-불화

    대개 조선시기 불화들은 걸개탱화들이 많고 후기에는 10여m 안팎의 큰 괘불화들이 많다. 무위사 극락전의 벽화(1476년)를 가장 오랜 예로, 화엄사(1653)ㆍ쌍계사(1687)ㆍ흥국사(1693)ㆍ천은사(1715)ㆍ송광사(1725)ㆍ선암사(1765)의 <영산회상> 후불탱화들과, 쌍계사(1781)ㆍ천은사(1776)의 <아미타극락회상도>, 쌍계사 <약사불회도>(1781)ㆍ<팔상불회도>(1709)ㆍ<감로왕도>(1728)ㆍ<제석천용도>(1781), 송광사의 <팔상불회도>(1725)ㆍ<오십삼불회도>(1725)ㆍ<십육나한도>(1725), 선암사의 <화엄경변상도>(1780)ㆍ<오십삼불회도>(1702) 등이 있다. 이와 함께 민간신앙이 불교 깊숙이 파고든 예로 송광사의 <산신도>(1858), 선암사 <칠성도>(1895), 그리고 석가탄신일 같은 대중법회 때 법당 앞 당간 기둥에 걸어 올리는 대형 걸개화들도 송광사 <영산회상도>(1653)를 비롯한 만연사ㆍ대흥사ㆍ미황사ㆍ도림사 등 여러 곳에 남아 전한다.

    이 가운데 무위사의 오래된 흙벽불화들을 주목해 볼만하다. 불단 뒤에 세운 후불탱화 <아미타삼존도>(1476)는 높직한 대좌에 결가부좌한 아미타여래를 중심에 두고 양쪽에 지장 관음보살을 협시로, 현세 스님 모습과 다를 바 없어 친근감을 주는 여섯 나한이 그 뒤에 위 아래로 배치되어 있다. 고려시대 2단구성에서 조선시대 원형구도로 넘어가는 과도기양식이다. 또 붉은 비단옷에 금선들로 채워진 동그란 무늬들을 넣고 먹선으로 옷의 잔주름들을 잡아준 것 역시 고려불화의 흔적이지만 굵은 테두리로 부처 윤곽을 따라 둘러진 광배는 일반 원형광배들과 달리 쌍계사 흥국사 송광사의 예들과 함께 또 하나의 양식을 이룬다. 무엇보다 절제된 색조에 섬세하면서도 화려한 광배의 선무늬는 배경의 구름묘사와 함께 흔치 않은 묘법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그 뒤쪽 흙벽에는 간결하면서도 완급 있게 내려 뻗은 먹선이 참으로 매혹적인 백의관음상이 모셔져 있다. 앞쪽 아미타와 마찬가지로 당당한 체구에 옷자락을 흩날리며 홀연히 바다물결 위에 서서 발아래 늙은 비구를 그윽히 내려다보고 있는데 배경일체를 생략한 채로다. 아울러 불단 오른쪽 옆벽에는 아미타를 모시고 여덟 보살과 여덟 비구승들이 입구를 향해 늘어선 <아미타래영도>가 눈여겨 볼만한데 이 미타정토를 찾아든 중생을 자비의 품으로 맞이하고 있는 듯한 모습이다.

    명문에는 전 아산현감과 그의 부인, 백성 수십 명이 시주하고 대선사 해련 등이 불사를 봉안하였다고 전한다. 새 왕조의 정치이념이야 유교로 바뀌었더라도 여전히 극락왕생의 미타신앙과 사후세계의 평안을 염원하는 지장신앙에 신분의 고하를 떠나 정성껏 조성한 공양물이었던 것이다.

    그에 비해 여천 흥국사의 <영산회상도>를 비롯한 17세기이후 조선후기 불화들은 부처를 중심으로 보살과 사천왕 나한들을 원형으로 배치하고 진홍과 녹색 대비가 선명하다. 또한 금물과 먹선들로 세부장식요소들은 치밀하고 화려하게 꾸며지지만 본존의 상호처리와 비단가사에서는 깨달은 선지자들의 정신성보다는 이미 틀 잡힌 도상을 반복하는 예들이 많아 무위사까지 이어진 고려불화의 은근한 깊이에는 미치지 못하고 있다.



    삶의 위안과 기원을 담은 마을 지킴이

    민족문화 중흥기인 18세기 무렵에는 무지랭이 백성들이 스스로 삶의 주체가 되고 그들 중심의 민속문화가 크게 활성화되었다. 더불어 오랜 세월 그들과 함께 해 온 불교 또한 세속권세의 높낮이를 떠나 삶의 신앙으로 젖어들고 있다. 특히 영남과 한강유역 등 조선후기 상업활동이 활발했던 곳에서 동적이고 연희성이 강한 탈놀이가 민속문화의 중심을 이룬다면, 전통 농본사회로 공동체의식이 두드러지는 호남지역에는 장승ㆍ벅수ㆍ솟대ㆍ마을부처ㆍ굿 등 현세 삶에 대한 정적인 벽사기복 문화가 이를 대신한다.

    마을 지킴이 돌은 선사시대 선돌과 그 제의 주술의식에서부터 비롯되었고 민초들의 세상살이 바람막이나 알 수 없는 존재와의 소통통로가 되어 왔다. 기본 모양은 따르되 일정한 상호에 얽매이지 않으면서 생의 현장 가까이 세워두고 세상살이 애환을 삭혀오던 그들 자신의 모습이기도 하다. 현실세계에서 얼마큼 물러앉아 절집의 공양을 받던 부처가 내세구복 쪽이라면 민속조형물들은 아침저녁 들고나며 속내를 털어놓는 소구대상이자 현세발복과 벽사를 기원하는 의식의 조형물이다. 이들 토속조각에서 우러나는 고유한 멋과 정감, 울퉁불퉁 과장되면서도 정겨운 얼굴생김, 투박하지만 진솔한 농투사니의 정서가 배인 거친 표면, 현실달관에서 우러나오는 낙천적 해학미는 신앙차원을 떠나서도 삶의 공간을 싸안기에 충분한 조형물이다.

    연대가 확실하면서 가장 이른 나주 운흥사지 입구 한 쌍의 돌벅수는 1719년에 세워진 것이다. 샌님 갓에 안경 쓴 듯 동그란 눈, 합죽이 입에 두 갈래로 흩날리는 턱수염, 웃는 입꼬리에 밀려 잔뜩 부풀어 오른 양 볼의 모습이 동네 생원영감 같은 ‘상원주장군(上元周將軍)’, 늙으막에 할아범과 언제고 함께 마주 서 있는 것만으로도 마냥 복에 겨워 앞니까지 내놓고 콧잔등이 골지게 웃고있는 소박한 할멈모습의 ‘하원당장군(下元唐將軍)’이다. 수호신장이라고 겁을 주거나 무섭게 윽박지르기보다 너른 포용력으로 잡귀까지도 다독거려 보내는 그 여유가 험악한 인상의 이웃 나라 수호신장들과 다른 진짜 매력인 것이다.

    그 여유와 정이 또 다른 걸작이 산너머 운주사 가는 고갯길에 비켜서 있는 불회사 입구 돌벅수다. 운흥사와 비슷한 시기에 세워졌으리라 얘기되는데, 있는 둥 마는 둥 상투머리에 없는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입가에는 송곳니까지 삐져 나와 있지만 고사리잎 같이 말아 올려진 콧볼하며 정갈스럽게 따 흩날리고 있는 턱수염의 ‘상원당장군’, 둥그스름한 얼굴에 넉넉한 살붙임, 왕방울만큼 큼직한 눈과 듬성듬성 위로 치켜올려진 눈섭들, 세상연륜만큼 깊게 패인 이마주름, 미간과 합죽이 입 주위 가득 잔주름 지며 웃고 있는 모습의 ‘주장군’ 할머니는 어떤 악귀라도 품어 안을 자애로움 그 자체다.

    그밖에 무안 몽탄 총대사터와 보성 해평리ㆍ장흥 관산ㆍ진도 덕병리 돌벅수 등도 모두 정감과 개성 넘치는 모습들이다. 본래 지킴이 역할에 맞게 무인상을 하고 있거나(신안 내월리 돌장승 등), 담양 남면 석장승과 담양읍 천변리 비석거리 돌벅수, 창평 오리천 돌벅수, 무안 청계중학교 돌장승들처럼 문인상들도 있다. 그런가하면 기둥 같은 큰 선돌에 부처의 얼굴만 새긴 듯한 장성 북이면과 화순역 뒤 벽나리 미륵장승, 보성 율천리 입구의 보살 같은 돌장승, 곡성 석곡의 미륵장승, 마치 한쪽 어깨에 장삼을 걸친 선사 같은 모습의 고흥 두원면 각시바우 벅수들은 이마의 백호나 손모양과 옷주름선 정도로 부처임을 암시하고 있을 뿐 일반 장승 벅수와 크게 다를 게 없다. 결국 이 땅에 터를 닦고 살아온 민초들이 그들에게 필요한 어떤 신앙이나 문화라도 모두 현실 속에 완전히 녹아들게 해 토착화시킨 예들을 이 민불 또는 마을부처들에서 확인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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