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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미술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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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환생과 탈속의 멋- 고대 도자문화


    생명의 안식과 부활처-독널

    나주 ‘반남면 고분군’은 ‘영산강유역 옹관묘문화’의 중심지라 일컫는다. 자미산 봉우리에 올라보면 드넓은 나주평야와 함께 지금은 저만치 물러난 영산강 줄기, 산자락 아래 군데군데 자리한 무덤들을 한눈에 살필 수 있다. 이 곳을 중심으로 영암의 시종면 일대와 무안ㆍ함평를 비롯, 강진ㆍ해남ㆍ영광ㆍ장성ㆍ광주의 선사문화 자취들과 폭넓게 연결되어 있다.

    독널무덤은 청동기부터 삼국시대까지 전통 장례법의 하나로 평양 대동강유역부터 서울 한강 아래쪽과 금강유역, 낙동강자락 등지에 고루 분포되어 있다. 그러나 유독 전남지역 서부, 특히 영산강유역 하류에 집중되고, 나주 반남면 일대는 십여 개 독널들이 합장되는 등 다른 지역과 차이가 뚜렷하다.
    마한(기원 전후부터 5세기 중엽 무렵) 후반에 주된 묘제로 자리잡으면서 규모가 커지고 독자적인 성격이 두드러진 한국 독널무덤 양식의 중심을 이루게 된 것이다.
    이 가운데 반남면 신촌리 9호분은 단정하면서도 우아한 금동관과 금동신발ㆍ팔찌ㆍ구슬ㆍ큰칼 등이 함께 출토되었다.
    백제에 병합되기 전 이 지역 토착문화, 영산강유역의 기름진 나주평야를 터전으로 한 마한 54국 가운데 선진문화의 수준을 반증시켜 주는 예다.

    이 독널들은 막강한 지배계급 권력자의 것일 듯 싶은데도 톱니모양 무늬나 제작과정의 흔적인 듯한 망사무늬 말고는 특별한 치장이 없다. 독의 모양도 알 모양의 둥그스름한 타원형으로 영원한 생명과 환생으로 넘어가는 통과의례처이자 안식처였던 셈이다.



    화려한 환생-맵시 고운 청자

    고려청자는 한국의 미를 대표하는 문화유산이면서 기물 이상의 빼어난 예술적 걸작들이다. 이 고려청자의 모태이자 중심지가 바로 이 고장 강진은 물론 고흥ㆍ해남ㆍ함평ㆍ영광ㆍ영암 등인데, 천혜의 자연조건에 물길을 끼고 일찍이 다른 지역, 특히 중국 청자문화 중심지인 강남문화와 활발히 소통하던 지역이다.

    지금 청자기념관과 도요지가 보전되어 있는 대구면 사당리를 중심으로 용운리ㆍ계율리, 칠량 심흥리 등 강진지역에서 조사된 가마만도 100여 군데에 달한다.
    사실 후기신라 말까지도 뒤쳐져 있던 우리 도자기술은 고려 초 정치적 과도기에 급성장하여 11~12세기에 이르면 중국의 강남청자와 견줄만큼 되는데, 특히 표면에 가느다란 홈을 파고 자토나 백토 같은 흙을 채워 표면을 긁어낸 뒤 구워내는 상감기법과, 산화동 성분의 유약으로 붉은 색을 띠는 진사무늬를 올리는 기법은 오히려 중국보다 앞서 개발한 독창적인 것이다.

    9세기 말부터 새 왕조 초기인 11세기 전반까지는 유약 빛이 무겁고 탁한 녹청자 계통이다가 차츰 밝고 맑은 빛깔로 정제되어 가는 이른바 ‘햇무리굽 청자’라는 초기단계를 거친다. 그리고 12세기 전반의 순청자 절정기에는 중국의 비색(秘色)과 또 다른 비색(翡色)으로 깊고 맑은 빛깔을 내는 수준에 이르고, 뒤이어 상감청자 전성기에는 그 잔잔하면서도 정갈한 흑백의 상감무늬에 은근한 푸른빛을 머금고 더욱 맑아진다.
    특히 최고의 품격에 이르렀을 12세기 중엽 의종 때 기록(고려사, 1157)에는 도읍지였던 개성의 만월대 궁원에 양이정(養怡亭)을 지으면서 강진 사당리 가마의 청자기와로 지붕을 얹었다 하니, 몸체의 단청장식과 어우러진 진짜 청와대의 모습을 상상해 볼만하다.

    무엇보다 혼을 불어넣는 힘겨운 노동의 흔적이나 인공의 군더더기보다는 자연스런 멋으로 녹여내고 그 청자의 오묘한 매력을 빚어낼 수 있었던 남도인의 심성이 최고의 청자를 만들어낸 바탕이 되었을 것이다. 비록 즐기고 애용한 이들이야 왕공귀족층이지만 그릇을 빚고 꾸며낸 솜씨와 멋은 흙과 불에 묻혀 이름 없이 혼을 사르다간 이 땅의 무지랭이 도공들의 것이다.



    탈속무아의 멋-분청사기와 백자

    분청사기를 고려청자가 흐트러진 말기현상이라고도 하지만 17세기말 임진란이 있기 전까지 조선 전기 도자문화를 대표하는 것이었다. 잔잔하면서 화려한 꽃도장 찍기(인화분청)에서 점차 투박하고 대범하게 긁어내거나 파내고(박지ㆍ조화분청) 훑고(귀얄분청) 담궈 내는(덤벙분청)- 애써 꾸미려는 흔적을 털어 가면서 조선중기 이후의 소박하기만 한 순백자로 이어지기까지 무위자연미의 극치를 향한 문화흐름을 탔던 것이다.
    이런 솔직 대범하고도 독특한 형식은 한국 분청사기만의 독특한 토속적 자연미이며, 스스로 합리주의 틀에 얽매여 왔던 서구인들이 20세기 후반에 비정형추상(앵포르맬)이니 미니멀아트(표현요소 극소화)니 전위미술형식으로 유행시켰던 파격미를 일찍이 뛰어 넘은 것이었다.

    고흥 두원, 영암 학산, 해남 황산, 무안 청계ㆍ몽탄, 나주 다도ㆍ다시 뿐 아니라 함평ㆍ영광ㆍ장성ㆍ담양 등 넓게 나타나고 있는 분청사기 가마터들 가운데 대표적인 곳은 무등산 가마다. `91년 봄 국립광주박물관의 대대적인 발굴조사 때 30여m에 이르는 긴 등가마를 비롯, 여러 번 터를 옮긴 가마의 흔적들이 함께 발견되어 무등산 가마의 실체를 일부나마 보여 주었다.
    특히 한자로 명문이 쓰여지는 일반 예들과 달리 ‘어존’이라 한글이 써진 작은 대접이 출토되기도 했다.

    막부(幕府)시대 오산문화(五山文化)의 주역인 선승(禪僧)들이 정신문화를 주도하고 있던 일본에서 우리 분청사기에 그토록 매혹되어 임진란을 일으켰다 하는데, 많은 도공들이 붙들려가 일본 도자문화의 신기원을 이루기는 하지만 그 때문에 한국 도자사에서 분청사기는 소멸하고 17세기 초부터는 백자가 주류를 이루게 된다. 그러나 같은 자연주의, 도가적 초탈의 세계이면서도 백자는 훨씬 더 인공미를 털어 버린 무념무상의 선경(仙景) 아니면 무욕의 아름다움이다.
    자연의 철리에 따라 모든 생명과 더불어 세상을 크게 볼 수 있었던 범속과 탈속이 함께 녹아 담긴 것이다.

    사실 백자는 조선 후기 한강유역 특히 광주 분원시대로 대표되지만 이 지역 나주 남평ㆍ다도 등지와 함평 대동ㆍ나산, 장성읍과 삼서ㆍ진원, 담양 용면, 영암 학산ㆍ덕진, 승주 등 여러 지역에서 앞선 도자전통의 맥을 잇고 있다.
    크게 보아 순백자 말고도 청화ㆍ철회ㆍ진사백자 또는 푸르고 검고 붉은 유약발색 효과로 흰 바탕에 회화적 표현을 올린 경우도 있지만 근본은 백자이며, 색을 남용하지 않고 소박한 그릇모양과 하얀 바탕을 압도하지 않는 정도에서 지극히 절제되어 사용되고 있다.
    이러한 특성은 당시 명나라 청나라의 오채(五彩) 화려한 다채유도자(多彩釉陶瓷)와 뚜렷이 다르다. 그런 화려한 중국 도자문화가 흘러들었다 해도 우리만의 미감, 오히려 훨씬 대범하고 소박한 자연본위 정신의 근본을 가시적 조형물로 담아낼 수 있었던 미의식이 두드러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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